왜 short & simple해야 할까?
집에서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코로나로 영화관에 가는 것은 아직은 기분이 내키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아쉬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징어게임으로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는 넷플릭스가 있으니까요. 거실에서 영화관 기분을 냈습니다. 주연 배우와 내용 모두 나쁘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중간중간 재미 요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중간에 아내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답답한 건 나만 그런가? 기분 탓인가. 예전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을 텐데...”
“하긴 나도 그래. 빨리 돌리기 하고 싶음. 좀 더 속도감이 있었으면 좋은데.”
2시간 남짓의 영화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5분. 요즘은 짧은 콘텐츠가 대세입니다. 유튜브에서 시작된 짧은 동영상 트렌드는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영상을 보면서 인내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이 됐습니다. 짧으면 뭔가 아쉽지만 길면 이내 지루합니다. 15분이 길게 느껴지는데 그 영상을 계속 보도록 잡아두려면 중간중간에 뭔가 임팩트도 있어야 합니다. TED나 세바시 같은 강연 동영상 콘텐츠도 길면 지루하다고들 합니다. 인사를 하면서 정보 핵심을 전달하고 요약하기까지 모든 것을 15분 안에 끝냅니다. 서론-본론-결론, 기승전결의 이야기 스토리텔링의 방정식은 이제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일하고 있는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유튜브에서 성공하는 동영상은 그 얘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성공하는 공식이 있다고 합니다. 그건 우리가 학창 시절부터 익히 배워서 알고 있는 글쓰기와 이야기 전개의 문법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대충 이렇습니다.
먼저, 영상 시작 몇 초 안에 전체 영상에서 가장 임팩트가 있을 만한 한 방을 날려줘야 합니다. 하이라이트입니다. 그 시간은 길어서도 안됩니다. 말하자면 뉴스의 헤드라인과 같은 셈인데 정확히 같지는 않습니다. 뉴스의 헤드라인이 한 두 문장에 그 뉴스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라면 유튜브 동영상의 첫 시작 하이라이트는 내용을 집약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대사나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둘째, 하이라이트 이후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시청자들의 긴장감은 느슨해지기 시작합니다. 제목과 주제에 맞는 메인 동영상이 나오기 전까지 떨어지던 시청률은 메인을 향해 가면서 다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 길이는 길지 않습니다. 10분 즈음이 되면 광고가 나오는 만큼 광고가 나오기 전에 뭔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만약 10분을 넘기려면 그 이후에 나올 내용이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고 잡아둘 만한 값어치가 있어야 합니다. 짧은 영상에서도 대충 10분을 주기로 또 흐름이 끊기는 셈입니다.
셋째, 얘기가 끝났다고 그냥 끝내면 안 됩니다. 모든 시리즈물이 그렇듯 다음 동영상에 대한 예고나 자신의 채널에 대한 광고를 담은 쿠키를 제일 마지막에 실어 다시 한번 시청자들을 잡아둡니다. 왜 그렇게 다들 ‘구독’ ‘좋아요’를 애원할까요? 예전 영화 같으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내용을 상기하면서 감상에 젖을 법도 한데 그놈의 ‘구독’ ‘좋아요’ 눌러달라는 엔딩이나 자막 때문에 여운은 금세 날아갑니다. 저만 그런가요?
이 같은 시청자 이목끌기와 잡아두기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을 때 비로소 성공한 동영상이 됩니다. 결국 높은 조회수가 의미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체류하느냐가 유튜브가 가중치를 주는 알고리즘의 중요한 요소라고 합니다. 유튜브뿐만 아니라 넷플릭스 등의 글로벌 OTT 서비스가 개인별 맞춤형 콘텐츠 소개와 제공을 할 수 있는 비결도 해당 콘텐츠를 얼마나 오래 보고 있느냐가 주요 고려 대상입니다. 결국 동영상 체류시간입니다.
오래 머무르게 하고 싶은데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의 과거 스토리텔링의 방정식을 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흔히 시리즈물이 그렇듯이 다음회를 보게 하기 위해서는 극적인 긴장감을 해당 회의 마지막에 배치해 다음 편의 궁금증을 극대화시킵니다. 숏폼 콘텐츠에서는 시작과 중간 끝에 이른바 한방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짧은 콘텐츠가 유행이 된 것은 사람들의 인내력 때문일까요? 영상 제작도 길게 만들지 말라고 하니 호흡이 짧아집니다. 15분 안에 긴장이 있어야 하고, 국면 전환이 있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단거리 경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긴 호흡의 장거리 근육이 만들어질 리가 없습니다. 짧은 글쓰기, 짧은 말하기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긴 글을 쓰라고 하거나 1시간 강연을 부탁하면 난감해합니다.
15분짜리 동영상 4개를 가져다 붙인다고 1시간짜리 긴 콘텐츠가 되지 않습니다. 강약이 있어야 하고 흐름이 있어야 하고 잘 이어져 붙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청자인 보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게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요즘 히트를 치고 있는 넷플릭스의 시리즈물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뛰어난 연출력으로 무장한 콘텐츠들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문법을 쓰고 있습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일단 결론부터 얘기하고, 그다음에 부연 설명을 시작합니다. 얘기가 길어지면 듣는 사람이나 상대방의 주의가 흐트러지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다른 주제로 넘어가자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앞에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보는 파편화되고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짧은 방송 뉴스만 계속 만들다 보면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닙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서론이 길면 그냥 뒤로 넘어가게 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면 호기심을 갖고 더 들어볼 만도 하지만 인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데 흥미를 끌지 않는 글에 시간을 내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전자책이 많이 나오면서 e-book으로 책을 많이 사보게 되는데요. e-book으로 책을 보니 빠른 속도로 영상 돌려보기처럼 책을 보게 됩니다. 나중에는 줄 친 것만 요약 노트로 따로 볼 수 있으니 책을 2번 보는 것은 잘 안 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그렇게 본 책이 아닙니다. 내 손으로 줄 치고 요약해보고 여백에 내 생각도 써보고 포스트잇 붙여서 몇 번이고 들춰보고 했던 책의 글들이 결국 내 것이 됐습니다. 글을 써보면 확실히 그게 느껴집니다. 짧은 글을 모아놓은 파편화된 정보는 좀처럼 머릿속에서 꺼내 쓰기가 어렵습니다.
오해는 그렇게 생겨납니다. 길게 말해도 상대방이 내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줄여서 말하면 더 힘들어집니다.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거나,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상대방이 애써 차근차근 쓰고 길게 말했는데, 듣는 사람이 잘라 듣거나 뛰어넘고 듣는다면 오해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숏폼에 길들여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길게 말해야 하는 전화보다는 문자나 SNS를 쓸 때가 훨씬 많습니다. SNS는 대화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깝습니다. 상대방이 내 쪽지를 봤다는 표시, 즉 숫자 1이 없어진다고 해서 상대방이 내 말을 100% 읽어 봤거나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없을 때는 상대방의 톡을 봤다는 표시를 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렇게 또 오해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숏폼 전성시대에 인내의 한계 시간은 더욱 줄어들고 그와 동시에 이래저래 ‘오해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유튜브에서 요즘은 10분을 채우지 않더라도 광고를 붙일 수 있게 해주는 모양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광고가 보기 싫어서 유튜브 프리미엄을 보고 있습니다. 가끔 놀라기도 하지만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싫어서 주기적으로 시청기록(쿠키)을 지우기도 합니다. 뭔가 제 취향을 찾아서 추천을 해주는 것은 놀랍기도 하지만 좋아하던 것만을 좋아하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안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고집이 늘어가는데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나 필터버블(filter bubble)은 15분이 만들어낸 ‘오해의 시대’의 1등 공신입니다. 다음에는 이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