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누구를 위한 요리인지 몰랐던 게다

식당 개업과 책 출간의 절묘한 공통점

by 캬라멜

항상 일기같은 글을 쓰곤 했다. 일기같은 글은 독백이다. 내 일기를 읽을 대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가는대로 글을 쓰고, 그 글을 다시 읽지 않는다. 일기는 고치지 않는다. 집 부엌에서 하는 요리는 일기와도 같은 글이다. 잘 만들어도 먹고, 맛이 없어도 먹는다. 버리지는 않는다. 음식 만드는 실력이 나아지지 않아도 또 그렇게 만들어 먹는다. 의식주는 일단은 생존이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내가 먹지 않는 누군가를 위한 요리다. 일단 맛이 있어야 한다. 다른 식당의 요리와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 부엌에서 내가 만들어먹는 음식이 요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건 덜어내야 하고, 어떤 건 더 넣어야 한다. 맛있는 음식, 좋은 요리가 되기 위해서는 재료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비싸게 장은 본 뒤 좋은 원료를 모두 넣을 수만은 없다. 비싼 음식은 손님들이 찾지 않고, 식당도 이윤을 남기기 어렵다. 그렇다고 내가 미슐랭 스타 같은 일류 음식점을 차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봐놓은 장을 다른 사람이 먹는 요리로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식당의 콘셉트가 중요했다. 난 어떤 요리를 잘 만들고, 누구를 위한 음식을 만들 것인가?


1. 나의 요리 실력

난 전문 작가는 아니다. 기사를 쓰기 시작한 지는 23년. 블로그에 가끔 글을 쓰기도 했지만 에세이 같은 글, 누군가를 위한 글을 써서 올려본 건 브런치가 처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첫 요리는 보편적인 것이 적합했다. 기사를 쓰면서 단련된 쉬운 문장, 누가 들어도 쉽게 읽히는 그런 글, 두꺼운 책보다는 가볍게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이 내가 가장 잘 썼던 글이다. 일단 내가 하고 싶은 요리보다는 내가 잘 하는 요리, 내가 만들고 싶은 음식보다는, 남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기로 했다.


2. 시장 분석

처음 식당을 열려고 하면서 식당 개업을 번화한 유흥가에 할 수는 없다. 내가 개업하려고 하는 곳에 우리 식당과 같은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 있어도 안된다. 그렇다고 아예 식당이 없어서 먹거리 골목이 아닌 곳에 차리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첫 책으로 전문 작가들과 승부를 겨룰 수는 없다. 하지만, 유튜브 시대가 되면서 글 쓰기와 말 하기는 더 중요해졌다. 짧은 글이나 긴 글 할 것 없이 글을 써야할 일이 많다. 글 쓰는 방법에 대한 시장은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3. 우리 식당의 콘셉트

직장 생활을 하면서 평생 남의 얘기를 듣고, 기사를 써왔다. 기사는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은 독자가 공감해야 한다. 스토리텔링은 나보다 아내가 더 잘한다. 30년 가까이 방송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 시청자들을 설득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아내에게 많이 배웠다. 말하기의 핵심은 무엇인지. 그걸 쓰기로 했고, 그렇게 브런치 북을 완성했다. 우리 식당은 말하자면 입시나 직장, 다양한 분야에서 글을 쓰고, 말을 해야 하는 고객들. 그 예비 독자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가볍게 먹고 갈 수 있는 그런 식당을 열기로 했다.


4. 누구를 위한 음식을 만들 것인가?

잘 되는 식당, 노포는 역설적으로 메뉴판이 단순하다. 을지면옥은 냉면과 제육이면 끝난다. 해운대 암소갈비는 생갈비와 양념갈비면 끝이다. 하동관은 곰탕과 깍두기로 수십년을 버텼다. 하지만, 이런 식당은 평소에 자주 가지 않는다. 내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은 그냥 회사나 집 가까운 순대국밥이나 백반집이다. 고등어 하나만 잘 구워내는 생선구이집은 일주일에 2번을 가도 질리지 않는다. 고객은 우연한 계기에 만들어진다. 처음엔 누구나 와서 메뉴판을 본다.


'개업빨'은 있다. 단골은 다르다

신장개업 효과가 있다. 속칭 '개업빨'이다. 점심 시간 여의도에서 길을 가면 10장이 넘는 전단지를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신장 개업하는 식당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문을 닫는 식당도 많은 셈이다. 잘 되는 식당은 콘셉트가 단순하다. 그냥 먹고싶은 음식이 딱 보인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장씩을 받는 신장개업 식당들의 공통점은 음식이 많다. 주방장이 제일 잘하는 것이 뭔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린 새로운 '모험' 하는 것보단 그냥 평소에 가던 곳을 간다. 검증됐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책의 콘셉트를 구체화하기로 했다. 제목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메시지가 통일 되도록 큰 제목과 소 제목을 바꿨다. 책의 메시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기존의 전문 요리사들의 레시피를 중간에 가미하도록 했다. 고전이나 유명 작가들 가운데 내가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구를 찾아서 넣기로 했다. 출처를 표시하고, 인용하면서 책은 더 단단해져 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