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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Apr 01. 2023

역사적 사실의 재현에 있어서 소설의 역할

김숨, <한 명>을 읽고

김숨, <한 명>의 표지 그림.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커튼이 쳐진 창가 앞에 앉아 있다.
들어가며


  거의 7년 가까이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소재가 하나 있다. 제주 4.3 사건.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 피해자와 국군과 민병대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을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어떤 날에는 이야기를 들었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어서, 어떤 날에는 말을 들은 이상 이야기를 꼭 써야 할 것 같아서, 어떤 날에는 증언자 할아버지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만지고 만지다 보니 7년이 흘렀다. 그리고 7년 동안 딱 한 문장을 썼다. ‘김복자가 죽었다.’


  7년을 생각했으면서 다음 문장을 쓰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과연 내가 이 이야기를 써도 되나, 자격이 있나,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내가 과연 ‘진실’을 재현할 수 있을까? 진실과 사실은 어떻게 변별되며, 내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자주 재현과 진실, 사실과 묘사 사이에서 기우뚱거렸고 결국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피해자의 증언 앞에서 소설은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고 트라우마를 보는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얄팍하게 느껴졌다. ‘김복자가 죽었다’라는 문장을 쓰고도 다음 문장을 잇지 못했다. 이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김숨의 소설을 수업 시간에 발제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오롯이 이러한 고민 때문이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여러 차례 소설로 재현한 바 있는 작가의 글을 읽으면 내가 품어온 질문이 일부라도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 피해자가 살아 있고 증언이 명확할 때,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는지, 역사 재현 문제에 있어 작가의 사유는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소설로써의 역사의 재현은 효과적인 체험에 있는지, 아니면 사실 전달에 있는지, 작가의 윤리 의식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지……. 여전히 피해를 사과받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김숨의 소설을 읽으면서 논픽션 소설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한 여성이 허공을 응시하며 서 있다.


작품 분석


  김숨의 소설 <한 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한 명’ 남은 상황을 가정하면서,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이자 93세의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며 위안부 피해자로서 겪었던 삶을 풀어낸 작품이다.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인도네시아 등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책과 기사, 영상 다큐멘터리 등을 각주로 담고 있는 이 소설은, 13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20살에야 탈출할 수 있었으나 끝끝내 세상에 지워진 사람이 되고 만 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 김숨은 <한 명>의 일본어 번역판에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떠나 폭력적인 역사의 와중에서 한 사람의 인간이 받아야 했던 고통에 대한 것이었다” 1)고 적으며 이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밝힌 바 있다.


  그러한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듯, 소설은 단 한 명 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세상으로 호출한다. 그리하여 그 한 명이 상징하는 개인들을 일일이 세상으로 호명한다. ’한 명‘(개인)임과 동시에 하나의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전체‘를 대변하는 위안부 피해자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설정은 인물을 소설 속에서 지칭하는 방식으로도 연결한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을 내내 ‘그녀’라는 3인칭으로 서술하면서 인물이 겪어온 이름들을 하나씩 짚어간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마을에서 불리던 이름, 동사무소에 등록된 이름, 위안부로 끌려가 붙여진 이름 등, 각각에 얽힌 사연을 풀어나가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단순히 피해자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고단하고 끔찍한 피해를 겪었음에도 한 생애를 꿋꿋이 살아낸 사람으로 그 지위를 복원시킨다.


  서사는 주인공이 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생활을 하면서 만난 인물과 사건들을 한 축으로, 93세의 할머니가 되어 쓸쓸히 생활하는 현재의 시점을 오가며 인물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형성해 나간다. 인물의 나이가 93세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소설의 서사 방식은 하나의 회고록이자 동시에 타인을 향한 애도의 방법으로 느껴진다. 주인공 ‘그녀’가 과거의 서사를 하나씩 꺼낼 때마다 그에 얽힌 인물들이 함께 호명되면서, ‘그녀’ 나름의 방식의 애도를 거친 뒤 서사에서 떠나가기 때문이다.


  소설의 99쪽을 살펴보면, ‘그녀’가 십수 년 전 꿈에 찾아온 ‘순덕’과 이야기를 나누며 과거의 고통을 나누는 장면을 확인해볼 수 있다.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냥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고 싶다고 말하며, “내가 고기를 못 먹잖아. 시체 태우는 걸 하도 봐서.”라고 답한 뒤 ‘그녀’를 떠나는 ‘순덕’의 발화에는 이제 떠나는 자의 후련함과 끔찍한 과거가 함께 담겨 있다. 이제는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운 주인공에게 한 명 한 명 찾아왔다 떠나길 반복하는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 ‘그녀’에게 고통을 상기시키지만 동시에 아픈 기억을 회상하며 그들을 애도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


펼쳐져 있는 책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논픽션 소설로서의 <한 명>


  이 작품을 읽다 보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쉼 없이 오가는 이 소설의 장르는 과연 다큐멘터리인가, 소설인가. 그 대답으로 작가는 아주 절묘하게 다큐멘터리와 소설의 중간에 위치한 논픽션 소설을 제시한다. 아마 작가는 실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그의 증언을 효과적으로 되살리기 위해서는 사실성이 중요하지만, 밀도 있고 깊이 있는 심리 묘사를 위해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어야 한다는 고민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285쪽에서 “내 소설적 상상력이 피해자들이 실제로 겪은 일들을 왜곡하거나 과장할까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상을 입힐까봐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웠다.”고 밝히는 작가의 말을 읽으면 이러한 작가적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을 소설과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소설에 조금 더 가까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길 택한다.


  이러한 결정은 소설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메타포와 소설가의 사유, 그리고 효과적인 묘사와 비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설이 사실을 나열하는 데만 그치는 것을 피하고자 작가는 여러 메타포를 사용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의 손바닥에 흉터처럼 남아 있는 기억을 상징하는 다슬기, 소녀들의 죽음과 한 많은 생을 연상케 하는 까치, 살생을 통해 인간의 끔찍함을 떠올리게 하는 고양이 나비, 인간에게 포획되어 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들을 암시하는 아기 고양이 등, 다양한 메타포를 통해 작가는 이야기에 소설적인 긴장감을 더하고 인물의 내면 갈등을 심화하며, 그의 일상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대부분의 메타포가 자연물이라는 점을 떠올릴 때, 우리는 작가가 인간에게서 받은 상처를 자연으로 치유하고 또한 환기하고자 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다음으로 소설가의 사유를 소설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와 소설은 모두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을 작가가 드러내는 방식일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사실의 나열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드러낼 때, 소설은 이야기와 문장으로, 소설적 상상력으로 자신의 사유를 드러낸다. 다음은 소설의 78쪽의 문장을 인용한 것으로, 인간의 잔악성과 타인을 갈취하는 행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맨 처음에 인간은 땅도 그런 식으로 차지했을까? 밤나무나 감나무 같은 나무들도? 샘도? 개나 염소나 돼지 같은 가축도?
만주 위안소에서 소녀들은 닭이나 염소 같은 가축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토상은 소녀들이 말을 듣지 않거나 도망치다 잡히면 누런 가죽 끈으로 목을 옭아매서 끌고 다녔다.


  위의 첫 문장은 작가의 견해, 아래의 두 문장은 위안소에서 피해자들이 겪었던 사실이다. 작가는 사실을 묘사하기에 앞서 소설적인 사유가 드러나는 문장을 제시하면서 인물들이 겪은 사건을 종합적으로 보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방식은 소설 전반에 걸쳐 메타포와 함께 사용되면서 소설을 메타적인 관점에서 작가와 함께 사유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다음은 문장이다. 밀도 있고 간결하며 담담한 어조의 문장은 소설의 전체적인 톤을 잡으며 독자가 감정에만 사로잡히지 않도록 적정선을 유지하게 한다. 작품의 장르가 소설과 다큐멘터리를 오가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단순히 ‘분노’에만 치우치고 소설이 밝히고자 하는 진실을 보지 못할 수 있는 것을 대비하여 문장 자체의 차분한 톤을 전반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특히 작가가 심리 묘사를 할 때는 비유가 도드라지고(소설의 영역), 사건을 설명할 때는 사실적인 사건 묘사(다큐멘터리의 영역)를 충실히 이어가는 것은 논픽션 소설로서 독자가 균형점을 잡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한다.


  위의 이유를 살펴봤을 때, 어쩌면 작품이 너무 소설 쪽으로만 치우쳐져 있을 수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비로소 논픽션 소설로 기능하게 하는 것은, 소설의 문장 문장마다 달린 주석들이다. 이 주석들은 실제 피해자들의 증언과 인터뷰들로, 작가의 상상력에 사실성이라는 무게를 더해준다. 작가는 자신의 사유와 문장으로 진실을 말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라는 사실로 그것을 뒷받침해 문장 문장에 힘을 싣는다. 316개에 달하는 이 주석들은 그리하여 소설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재현’의 한계를 보완한다. 작가의 소설적 상상력으로 실제 사실을 왜곡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이렇게 한고비를 넘어가며, 작가는 한 편의 훌륭한 논픽션 소설로 작품을 완성한다.   


세 개의 촛불이 켜져 있다


나오며


  그러나 이 소설을 둘러싼 다양한 콘텍스트가 제거되었을 때 작품이 논픽션 소설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로 남아 있다. 이미 작품은 그 자체로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는 인용문의 힘을 위태롭게 감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 ‘그녀’의 현실 상황이 ‘그녀’가 과거를 맞닥뜨리고 마침내는 치유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이끄는 데 적절했는가 역시 토론해볼 여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토론 거리를 포함하면서도, 김숨의 <한 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가장 소설다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며 진실을 밝히는 데 일조한 논픽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논픽션 소설 작품은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가?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던진 질문이다. 다양한 메타포의 활용, 절제된 문장, 과거와 현재를 교차 서술하는 서사 진행 방식 등, 작가는 <한 명>이라는 작품으로 우리가 재현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진실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곳곳에 ‘인간’에 대한 작가적 사유를 드러내면서, 다큐멘터리에서 자칫 지워질 수 있는 인물 자체에 대해 메타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했다. 끔찍한 역사적 사건을 재현할 때 작가는 소설적 상상력을 어디까지 발휘할 수 있을까, 혹은 발휘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 가장 적절한 대답을 찾은 기분이 드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최소 3년 동안, 어쩌면 20대를 통틀어서 나는 4.3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올해로 75주년이 된 사건의 무게에 비해 내가 고민한 시간은 턱없이 짧기 때문이다. 김숨에게 ’한 명‘이라는 제목이 오기까지 걸린 시간의 배 이상으로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숨의 <한 명>을 읽으면서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한 명’이 숨지는 그날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진실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나 역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미처 접근하지 못했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노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 또한 김숨이 그러했던 것처럼 진실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친다.   


*미주

     조기원, “김숨 작가의 ‘위안부’ 피해 증언소설이 일본에서 출간된다”, 한겨레, 201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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