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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차이

by 전선훈

처음 해보는 일이 익숙해지고 자기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면서 전문가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될까?


자주 들어본 이론 중에 10,000 시간의 법칙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한 분야를 하루에 세 시간씩 1년(대략 1,000 시간 정도)을 투자하면 알기 시작하고 3년(대략 3,000 시간)을 투자하면 보이기 시작하고 10년(대략 10,000시간)을 투자하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이론이다.


이 개념은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의 심리학자 앤더슨 에릭슨의 논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며 말콤 글래드웰이 자신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앤더슨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10,000 시간의 법칙이 알려졌다는데 논문을 쓰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어낸 결론이기에 나름 설득력이 있지만 성공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 MZ 세대에겐 그렇게 매력적인 이론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0,000 시간의 이론 이전에도 우리나라 속담에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저것 여러 일을 하는 것보다 한 가지를 꾸준히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인데 선조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속담이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뭐든 하나에 집중해야 성공한다는 것은 공통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인턴 생활을 시작한 큰 아이와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는데 MZ 세대들의 취업 관념이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인턴 생활 할 만해?”


“처음 배워보는 일이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재미도 있고. “


“그래봐야 인턴 기간이 3개월짜리인데 일을 많이 시키겠나? “


“아니에요. 처음엔 자료 정리만 시키더니 이제는 PPT 자료를 직접 만들라고 할 정도로 일을 많이 줘요.”


“지난번 탁자 위에 있던 그 자료를 네가 다 만든 거야?”


“네. 이젠 PPT 만드는 거 식은 죽 먹기죠. 헤헤헤”


“아빠도 예전에 좀 한다했는데 네가 한 거 보니까 내건 아무것도 아니던데…흐흐흐. “


“하다 보니 늘더라고요. 헤헤헤.”


“오. 다행이네.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경력이 뭐 별거냐. 네가 한 일에 대한 결과물이 곧 경력이지.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좋네. “


”일 외에도 팀원들과 늘 함께해야 하니까 그게 조금 힘들긴 한데… 그래도 어디 가자고 하면 쫓아가고 그래요. 헤헤헤. “


“아주 좋은 자세네. 너를 뽑은 회사가 인턴한테 업무적으로 바라는 건 많이 없을 거야. 사회성이 있는지를 많이 볼 거야. 그리고 근태 관리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네. 지금껏 한 번도 지각한 적도 없고 남보다 일찍 출근해서 자료 브리핑 파일도 출근 전에 메일로 상사들에게 다 보내놓고 시작하니까…”


“인턴 자세가 마음에 드는구먼. 하하하.”


“시작해 보니까 일도 중요하지만 팀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도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특히 이쪽은 인맥관리가 아주 중요한 것 같고. “


”짧은 시간에 파악을 다했네. 사회생활은 자기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팀원들과 불화가 있으면 말짱 도루묵이야. 그만큼 스트레스도 엄청나게 받고. 제명에 못 살지. “


”네. 그래서 과거에 인턴일을 하던 직원들과 비교되기 싫어서 뭐든 배우려는 자세로 일을 하니까 오히려 도움을 더 주려고 하더라고요. “


“당연하지. 자기 할 일 다 끝났다고 퇴근 먼저 해버리고 회식자리도 선약이 있어서 빠지고 그러면 팀원 누구도 너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하지 않지. 그런 면에서 아주 잘하고 있는 거야. Good!”


처음 시작한 인턴일을 힘들어할까 봐 걱정했는데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비어있는 잔에 맥주를 부어주었다.


”시원하게 한잔 마셔. 역시 맥주는 카스야. 탄산이 가득하네.”


예전 해외에서 살 때엔 한국의 맥주는 그저 소주나 양주에 타먹는 용도로 생각했었지만 호프집을 하고 나니 한국 맥주의 맛을 이제야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인턴 끝나면 따로 계획은 있냐?”


“이쪽 일을 해보니 재미도 있는 것 같고 계속 외국계 회사 쪽으로 알아보려고 해요.”


아들은 이미 계획이 다 있는 듯 자신 있게 자기의 계획을 얘기했고 나는 그저 듣기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국계 회사들이 일을 워낙 힘들게 하는 곳이라 힘들기도 하지만 지금 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인력이 많이 없는 분야여서 나름대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성과에 대한 보상도 일반 기업들과 차이도 많고…“


아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비전을 설명하며 왜 외국계 회사를 계속 다니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잠자코 듣고 있던 나에게 아들은 질문을 던졌다.


”일에 대한 재미도 있고 성과에 대한 보상도 크고 좋은데…”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맥주 한잔을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빠 생각은 지금 너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메이저 금융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고 그곳에서 경력을 쌓은 후 조금 이른 나이에 명예퇴직을 신청해서 보상금 두둑이 받고 노후를 편안히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껄껄껄…”


나는 남은 맥주를 마시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지만 맥주잔 너머로 본 아들의 얼굴은 실망스럽다는 표정이 살짝 보였다.


“아빠도 참…”


아들도 어이없다는 듯 남은 맥주를 단숨에 마시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아빠. 아빠 시절에는 이직없이 꾸준히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달라요. 적당한 경험을 쌓은 뒤 이직을 통해서 자기 경력을 계속 이어가고 그러면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점점 더 빨라지는 거죠. 오래 다닌다고 전문가로 인정받던 시대는 끝났어요. “


”그래도 10,000 시간의 법칙이라고 알지? 한 우물을 꾸준히 파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이론? “


”알죠. 하지만 요즘같이 바쁘게 변하는 시대에 10,000 시간이면 거의 10년이라는 얘긴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전문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 시간에 부족한 다른 것을 배우며 보충해야 진정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죠. “


아직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이 큰 아이는 이미 내가 생각하던 이상의 어른이 되어 있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꾸준히 해야…“


큰 아이의 의견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고 오랜 시간을 한 회사에 버티면서 오너에게 눈도장을 받기 위해 애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준비된 PPT 발표를 오너 앞에서 마치고 오너의 표정을 살피던 나의 모습은 마치 고양이 앞의 쥐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오너의 한마디에 생사가 걸려있었기에 발표를 마치고 강평을 하는 자리에서 오너가 무슨 얘기를 할까 긴장하던 모습이 내가 다니던 때의 회사생활이었다.


‘Good’


오너의 이 한마디면 모든 게 다 정리되었고 생명 연장의 꿈을 계속 이어나가기를 반복하던 그 시절 나의 직장 생활의 모습이었다.


나는 이미 퇴직을 했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지금 전문가 행세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곳에서 이직한 사람들이고 짧은 경력이지만 지금의 회사를 다 키운 것처럼 얘기하고 다닌다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착잡한 생각이 들곤 했다.


초창기 해외사업을 세팅하러 다니며 칭기즈칸의 후예라 칭하던 그 시대의 우리 노력을 기억하는 건 함께 재직하던 시대의 OB들 뿐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내 아이들은 더 당당하게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성숙된 사회환경이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야… 이젠 우리 큰 아들이 많이 성장했네. 아빠가 별도로 조언을 하지 않아도 되겠는걸… 하하하.”


“아니에요. 그래도 아빠가 GLG 전문가 자문위원 활동을 하는 걸 보면서 오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도 무시 못하겠던데요. 하하하. “


”그럼… 내가 해외영업하면서 먹은 짬밥이 있는데… 하하하. “


오랜만에 맛나게 먹으며 진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자리였고 아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그냥 속으로 혼잣말하며 마무리를 했던 행복한 휴일이었다.


“아들아. 라테는 말이야… 전문가로 대접받으려면 한 회사에서 한 분야를 꾸준하게 경험해야 했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네. 이제는 아빠가 열심히 응원할게.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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