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서울.
18년 동안 중,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고향 속초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나는 대학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처음 왔던 기억이 났다.
강남 버스 터미널에서 대학까지 가기 위해서 처음 타보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법을 몰라서 헤맸던 기억…
길 건너편 건물을 가려고 횡단보도를 찾아다니다 결국에는 한참을 걸어서 택시를 타고 갔던 기억…
모든 게 낯설었지만 군 제대 후 취업을 하면서 촌놈이 아닌 당당한 서울 사람으로 변신했다고 생각했지만 고등학교 동창들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여전히 북한 억양이 섞인 속초 사투리가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야… 이게 얼마 만이니? 다들 잘 지냈니?”
“야… 반갑다야… 자주 보자고 해놓고 못 보니 늘 속상하잖니… 오늘은 즐겁게 술 한잔하자고…”
오늘은 나의 재취업을 축하하러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사이판에서 날아온 잠수부 영길이, 엘리베이터 수리공 창용이, 학원선생 성수, 과일장수 준호, 짬뽕 아저씨 동직이, 일본 전문가 현철이, 그리고 섬나라 전문 여행사 사장인 병찬이…
나를 포함하여 8명이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대화를 듣던 옆 테이블 손님들은 북한 억양이 섞인 속초 사투리에 다들 웃느라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선훈아…재취업 축하한다 야… 어떤 회사니?”
“어. 내가 늘 여행 다니고 그런 거 좋아했었자니. 그래서 대학 선배가 운영하는 회사에 취업을 했어. 이제 한 달 넘었다 야…”
“회사 이름은 뭐니?”
섬나라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는 병찬이가 묻는다.
“어… 가가 여행사라고… 작지만 나름 튼실한 회사야. 대학 선배가 사장이니까 맘도 편하고 좋지 뭐…”
“처음 들어보는 회사인데?”
“생긴 지는 얼마 안 되었는데… 여행객 송출 실적도 상위권에 있는 회사더라고. 집 앞에서 사무실로 바로 가는 버스도 있고… 좋더라고… 하하하.”
“잘됐다 야… 맨날 걸레장사 하느라 고생하더니… 축하한다… 다 같이 술 한잔하자”
걸레장사는 흔히 섬유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칭하던 말이었는데 내리막을 걷는 대표적인 3D 업종이어서 빠르면 빠를수록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는 속설이 있었다.
그런 3D 업종에서 일하다 세계를 다니며 여행을 할 수 있는 여행사에 근무하게 된 것은 아주 적절한 판단이었고 최상의 선택을 한 것 같아서 늘 기분 좋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동창들과 마음껏 속초 사투리를 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은 늘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묘한 매력이 있지만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얻어낼 수 있기에 결정을 하기가 참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가보지 않은 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여행사에서의 근무는 나름 매력이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포에 사무실이 있는 가가 여행사는 실 장사를 하고 있는 최 장근 선배가 근무하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자주 만남을 가지곤 했다.
어차피 가가 여행사의 사장도 대학 선배인지라 우리는 자주 만나서 당구를 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물론 두 사람은 워낙 당구를 잘 쳐서 맨날 내가 돈을 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늘 맘 편히 상대할 수 있는 선배들이어서 좋았다.
“오늘도 새가 된 건가?”
“오늘은 이상하게 당구가 안되네요. 하하하.”
“언제 잘 된 적이 있었나? 하하하.”
“앞으로 너의 별명은 버드라고 하자… 맨날 털려서 새가 돼 버리니까…”
“언젠가는 복수할 날이 오겠죠. 하하하.”
두 명의 선배는 매번 당구를 치면서 올인당하는 나를 놀리느라 바빴지만 그래도 늘 마무리를 시원한 생맥주 한잔으로 끝내며 선후배의 정을 이어 나갔다.
“전 과장… 여행사 업무가 아직은 서툴 테니 나랑 함께 거래처를 다니면서 인사도 하고 나의 영업 노하우를 잘 배우도록 해.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대학 졸업 후 대야 여행사에서 근무를 하던 박 준상 사장은 3년 정도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가가 여행사를 차린 지 5년 정도가 된 회사이지만 나름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작지만 강한 여행사로 알려져 있었다.
항공 티켓 발권을 대행하기도 하고 단체 손님을 모아 패키지여행을 직접 만들어 손님을 해외로 보내느라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였다.
“전 과장… 오늘은 수원하고 병천에 투어 설명회가 있으니까 나와 함께 가세. 수원은 상가 연합회 소속 상인들이고 병천은 농협 조합원들 대상이니까 내가 하는 거 잘 보고 앞으로는 전 과장이 직접 다니면서 해.”
“알겠습니다. 내용을 잘 숙지하여 앞으로는 내가 직접 해볼 수 있도록 할게요.”
아침부터 회사의 직원들은 자료를 출력하고 작은 책으로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 수고들 해… 나와 전 과장은 수원하고 병천에 좀 다녀올게.”
“네. 사장님. 잘 다녀오세요,”
여직원 3명에 사장과 나를 포함해 5명인 회사이지만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한 명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인당 생산성은 가히 업계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사장과 함께 도착한 수원역은 이른 시간이지만 유동인구가 넘치며 늘 혼잡한 곳이어서 주차를 할 장소를 찾기가 어려운데 오늘 만나려는 모임의 회장이 운영하는 곳이 주차장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오… 박 사장… 어서 와요. 우리야 늘 그렇지… 장사하는 사람들이 별 일이 있겠어. 같이 온 사람은 누구야?”
“전 과장… 인사드려. 연합회 회장님이셔.”
“안녕하세요. 가가 여행사에 새로 입사한 전 선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가워요. 아주 잘 생기셨네. 똘똘해 보이시고 인상도 좋으시네…호호호.”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니 회원들이 하나 둘 주차장 사무실로 모였고 사장은 이번 여행 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였다.
언변이 뛰어난 사장은 회원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해주며 브리핑을 잘 마쳤으나 회원들은 우리가 준비한 상품이 조금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사장은 당황하지 않고 회원들의 요구 사항을 바로 수정하여 다음날 다시 오겠다며 발 빠르게 대처를 하였다.
수원의 상가 연합회 회원들 대부분은 중년의 여성에 경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인들이 대부분이어서 비용이 조금 비싸도 무조건 최고급으로 진행을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고 우리가 준비한 프로그램을 다시 수정하여 추가 미팅을 하는 걸로 마무리를 했다.
“보기보다 회원들이 좀 까다로운데요? 요구 사항이 대부분 최고급 일정으로 해달라고 하는 걸 보니…”
“돈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일반 패키지여행을 좋아하지 않아. 오늘 준비한 프로그램도 꽤 고급 일정인데… 이것보다 더 최고급을 원하니 새로 수정해서 와야지. 쉽지 않은 일이야… 패키지 상품 계약 하나 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야.”
“그런 것 같네요. 추가로 상품 개발하는 것도 일이겠는데요?”
“복잡하지… 현지 여행사에게 다시 견적을 요청해야 하니까… 들어가서 다시 요청하면 되니까 병천으로 바로 가자. 점심은 병천에서 먹는 걸로 하고… 오케이?”
“네. 좋습니다.”
수원을 빠져나와 병천으로 차를 몰았고 도착할 즈음에 국도 주변의 허름한 순댓국 식당 앞에서 차를 멈추라고 하였다.
“전 과장…이 집이 밖은 허름해 보여도 이번 농협 조합원 여행을 주최하는 회장님 식당이야. 매년 우리 여행사를 통해서 행사를 하는데… 여장부야. 패키지 가격보다 여행의 질을 따지는 분이라 상품 개발도 차별화해야 하는 아주 까다로운 고객이지. 시골에 산다고 대충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돈에 구애 안 받는 사람들은 시골에 훨씬 많아.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겉만 화려하고 실속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그런 느낌이 드네요. 지방 고객들이 최고급 상품을 요구하는 것 보고 놀랐어요.”
실제로 시골에 있는 고객들이 요구하는 여행 상품은 대부분 돈과 관계없이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상품을 원했고 그런 고객들에게 혹시라도 현지에서 옵션 행사라도 넣으면 바로 취소되는 사유가 되기도 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가가 여행사 박 준상입니다. 점심 먹으려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습니다.”
“어머… 박 사장님… 잘 오셨네요. 그런데 함께 온 사람은 누구?”
“요번에 새로 입사한 전 선훈 과장 이에요. 아주 유능한 친구입니다. 전 과장… 회장님께 인사드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가가 여행사 전 선훈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젊은 친구가 패기가 넘치네. 반가워요. 호호호.”
회장님으로 불리는 식당 주인은 순댓국 두 그릇을 아주 먹음직스럽게 말아서 우리 앞에 놓아두고는 휴대전화로 회원들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순댓국을 먹는 중간에 회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그랜저를 타고 오거나 간혹 외제차를 타고 오는 회원들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의 얘기대로 시골 가서 돈 자랑 잘못하면 망신당하기 쉽다는 얘기가 빈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준비한 자료를 회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이번 투어의 콘셉트는 “Relax”이며 현지에서 최상급 서비스를 받는 상품이라고 설명을 마쳤다.
상품 가격이 꽤 비싼 프로그램이었지만 회원들은 안내 자료에 나와있는 호텔과 상품 내역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회장이 사장에게 한마디 하였다.
“매년 가는 여행인데 박사장네 상품은 항상 우리를 만족시켜 주는 것 같아. 너무 좋네요. 호호호.”
긴장하고 있던 사장도 회장의 한마디에 긴장이 풀리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회원들에게 한마디 하였다.
“앞으로도 다양하면서도 최상급 프로그램으로 편히 쉬다 올 수 있는 상품을 계속 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저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회원들은 사장의 얘기를 듣고 모두 만족스러운 듯 만장일치로 이번 여행 상품을 결정해 주었다.
회원들의 편한 시간에 맞춰 최종 미팅을 정하기로 하고 마포로 다시 차를 몰았다.
“전 과장… 걸레장수 할 때와 비교하면 오늘 미팅 느낌은 어때?
“흥미로운데요… 걸레장사와는 완전히 다르네요. 상품도 창의적으로 만들 수 있고…”
“일 하다 보면 앞으로 재밌는 일도 많이 생길 거야. 잘해봐… 하하하.”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동안 여행업을 하면서 있었던 일들에 관한 얘기를 들으니 걸레장사를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여 조건을 맞춰가며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나의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때 이른 저녁 무렵 사무실에 도착한 우리는 첫 미팅을 기념하기 위해 장근 선배의 퇴근시간에 맞춰 늘 만나던 당구장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주문한 음식으로 저녁을 먹으며 새가 되지 않기 위해 전투적으로 당구를 치며 하루를 마감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필 그 무렵 가수 PSY의 '새'라는 노래가 히트하였고 '나 완전히 새됐어'라는 후렴은 나를 만날 때마다 흥얼거리던 선배들의 전매특허 노래였다.
이제는 환갑이 코 앞인 촌놈의 청년 시절이 떠오르는 걸 보면 나도 늙어가는 중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