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늦은 시간.
영업 마감을 앞두고 직장 상사와 직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들어왔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잔 더 마시자는 상사의 제안으로 들어온 듯 보였다.
“자네는 MZ 세대라고 하면서 사고방식은 완전 아날로그인 것 같은데…껄껄껄. “
”MZ라고 다 똑같지는 않죠. 저는 오히려 아날로그 스타일이 제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헤헤헤. “
”아날로그의 어떤 점이 자네를 사로잡았을까? “
주문한 생맥주를 한 번에 마시더니 추가로 주문을 한 후 말을 이어나갔다.
“글쎄요. 아날로그 방식이라는 말이 조금 과거의 이미지가 있긴 한데… 저는 정리되지 않은 순수한 느낌이 들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
“정리되지 않은 순수함?”
“지금은 디지털이니 AI니 하면서 걸러지는 것이 많은데 아날로그는 직접 찾아보며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자네를 MZ가 아니라 꼰대라 불러도 되겠는 걸.”
“네? 그래도 꼰대는 아니죠. 생각은 아날로그인 것 같지만 행동은 MZ 세대 이니까요. 하하하.”
“오랜만에 나랑 코드가 맞는 친구가 있어서 기분이 좋네. MZ 세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는 젊은 친구들이 없거든. 하하하.”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디지털과 AI에 밀려 이제는 카페나 식당의 인테리어 콘셉트를 얘기할 때 쓰는 단어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아마도 아날로그 감성의 노포를 소개하는 티브 정보 프로그램의 영향일 수도 있다.
아날로그라는 말은 수학적인 용어 외에도 디지털 기술의 편리함 대신 느린 처리나 수동적인 작업을 감수하며 더 많은 정성과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을 말할 때 사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낡은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표현할 때 쓰기도 한다.
지금은 디지털 기술을 넘어 AI 기술이 대세가 될 시대를 준비해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다.
어린 시절 나의 아날로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모든 정보는 기억력에 의지하였고 암기력이 출중하여 일가친척들의 집 전화번호는 물론 주민등록 번호를 줄줄 외우고 있어서 동사무소라 불리던 곳에서 증명이 필요할 때는 나를 데리고 방문을 하시던 아버지와의 기억이 떠오른다.
“막내야. 작은 아버지 주민등록번호가 어떻게 되지?”
“네. 123456-7890123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말한 번호를 주사라 불리던 담당자에게 알려주고 필요한 업무를 시작하였고 끝날 때까지 난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드님이 머리가 총명하네요. 대부분 주민등록증을 가져오거나 번호를 적어서 가져오는 게 대부분인데.”
“얘가 생활에 필요한 정보는 줄줄 외고 있어서 관공서 갈 때는 항상 데리고 다니죠. 아주 쓸모가 많은 비서인 셈이지요. 하하하.”
주변인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고 나면 아버지는 항상 환하게 웃으며 보상으로 자장면을 사주시곤 했었고 그 맛을 잊지 못해 생활에 필요한 다른 정보도 줄줄 외웠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지금처럼 일상이 빠르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날로그 시절의 감성은 아직도 정감 어린 많은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메모 전용으로 사용하던 손바닥만 한 수첩은 누구에게나 하나씩 다 있었고 전화번호를 포함하여 중요한 제사 날짜나 각종 기념일도 적어서 아주 소중하게 관리를 했었던 기억도 난다.
혹시라도 잃어버리는 경우를 대비해 다른 수첩에 똑같은 메모를 해놓기도 했는데 지금의 백업 개념이기도 했다.
그 시절 특별한 증명서를 보여주지 않아도 나를 대신해 주던 특별한 번호가 있었는데 유독 잊히지 않고 지금도 기억나는 번호가 딱 세 가지가 있다.
주민등록번호, 학번, 그리고 군번 이 세 가지이다.
주민등록번호는 출생과 관련이 있으니 당연히 외워야 했고 학번은 집단에 속한 첫 번호라 의미가 있었던 것 같고 군번은 복명복창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기억된 번호가 아닐까 싶다.
특히 군번은 군번의 종류에 따라 현역 출신인지 방위 출신인지를 나눌 때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은근히 자기 과시형 번호라 할 수 있겠다.
아날로그 시절의 끝과 디지털 시대의 서막을 알리던 때가 아마도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자동차에 설치된 카폰과 벽돌 사이즈 만한 휴대폰은 디지털 시대를 알리는 상징물 같은 것이었는데 워낙 고가의 제품들이어서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고 일반인들은 보유하기 쉽지 않은 첨단 제품이었다.
사실 일반인들은 디지털 기술이 접목된 첨단 제품이 필요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거리마다 넘쳐나는 공중전화로 얼마든지 연락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걸어 다니거나 이동을 하면서 통화를 해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래서 늘 공중전화 앞에는 작은 수첩을 뒤적이며 앞사람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일반적이었고 의도치 않게 개인의 통화 내역을 다 알 수 있었지만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했었다.
하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첨단 디지털 제품이 소형화되면서 소지하고 다니던 작은 수첩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작은 크기의 휴대폰이 출시되면서 머리와 수첩에 보관되어 있던 정보를 저장해 두었고 단축번호만 누르면 통화가 가능해졌으니 일부러 외우거나 메모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도 항상 소지하던 작은 수첩을 버린 건 3년 약정의 휴대폰을 전자상가에서 사면서 비롯되었다.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과 이동하며 연락할 수 있다는 장점이 결합되면서 휴대폰의 기술과 기능은 점점 발전하여 현재의 휴대폰으로 진화되었고 모든 정보를 휴대폰을 이용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궁금한 내용도 알아보기 쉽게 검색할 수 있고 여기저기 맛집도 알려주는 등의 편리함은 휴대폰을 눈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중독자들을 양산하였지만 우리의 뇌 기능을 약화시키는데 한몫을 단단히 차지한 것 같다.
지금처럼 목적지를 안내해 주는 내비가 없었을 때에 난 운전병 출신이어서 목적지를 정확하게 찾아가는 인간 내비게이터라 불렸고 지도 한 장만 차에 있으면 전국 어디를 가든 헤매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비가 없으면 찾아갈 수 없으니 기억하고 저장하는 뇌 기능은 점점 약해진 것이 분명해졌고 세상이 그만큼 더 복잡하게 변한 것이라는 방증이 되기도 한 것이다.
내 번호와 집사람 전화번호는 기억하지만 나머지 번호들은 저장된 번호를 검색해야만 알 수 있으니 편리함과 뇌를 사용하는 기능을 서로 바꾼 셈이 되어 버렸다.
아날로그라는 감성으로 의기투합이 된 두 사람은 문 닫을 때까지 연신 생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더니 결국 상사로 보이는 사람이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직원을 부축하며 걸어 나갔다.
예전 직장을 다닐 때 많이 보았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시절엔 택시를 태워서 보내며 차번호를 메모하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 짓게 만드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