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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텐츠아트 진 Oct 13. 2024

뉴욕 맨해튼 일년, 영어! 작지만 일상이 되다

a blessing in disguise!


뉴욕 맨해튼의 크리스마스가 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될 수도 있는 뉴욕 맨해튼의 크리스마스였다. 한국친구들 몇몇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캐나다에서 유학하는 후배까지 합세하였다. 남들 다 하듯 유명한 락크펠라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러 갔다. 미니카메라(그때는 이것이 최신기기)로 한 컷에 잡기에는 어림도 없는 나무였다. 너무 키가 크고 거대했다. 그냥 나무 밑에서 사진 찍고 놀았다.


뉴욕이 한낮의 차가운 햇빛을 거두고 있었다. 한밤의 유흥으로 지친 듯 시멘트의 연한 회색이 감돌던 도시가 다시 화려한 변신을 한다. 뉴욕의 밤은 야한 화장을 하고, 짙은 향수를 뿌리고, 타이트한 검은 숏 드레스를 입고, 관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젊은 여인 같다.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 가는 중이었다.


그 당시 콜롬비아 대학 종교학과 티베트종교 교수로 유명한 로버트 설먼분이 계셨다. 그는 맨해튼의 차도녀 같은 배우 우마설먼의 아버지다. 본인이 보살이라고 주장하는 신비주의자이다! 티베트, 불교, 보살, 종교, 배우 딸 -- 이 정도면 뉴욕에 있는 대학의 종교학과 교수에 어울리는 것 같았다. 온갖 것이 다 가능한 도시였으니까. 그날따라 밤의 브루클린 다리 야경이 더욱 빛나는 추운 밤이었다.


The Southern tip of Mahattan nightview at NY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내가 뉴욕으로 들어온 날도 눈이 많이 왔다. 그때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봤던 중년 백인 남자들의 수다로 무너진 내 영어를 보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과연 이루어낼 수 있을까? 그런데 다행히 과감한 결정으로 내 길을 찾아갔다. 온전히 내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운 좋게 적중을 했다. 무엇보다도 밖에서 헤매지 않고 나 자신과 먼저 씨름을 한 것이 가장 큰 득이 되었다.


어학원에 기대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한국어와 밀당에서 이기고, 맨해튼을 돌아다니며 그냥 듣기를 하고, Oops Moments을 체험하고, 거기에서 생긴 알량한 자신감에 힘입어 제프의 톡쇼에 도전했다. 그러고 보니 외부정보에 의존해서 결정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노력들이 귀가 뚫릴 조건이 되고, 귀 뚫린 것이 영어자아가 생기는 조건이 되고, 입 트이는 조건이 되고, 나아가 읽기가 고쳐지는 조건이 되었으니 내가 나한테 감사할 따름이다.


전체적으로  내 마음에 영어의 길을 내는데 집중했던 모양새가 된 것이다. 사실 이것 이외에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일단 길을 내놓고 나니까 영어가 급속도로 늘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영어로 채울 내용이 이미 다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 전공 관련 영어용어, 단어, 문법, 문장, 표현 등등은 독해를 하면서 차곡차곡 쌓아 둔 것이 있었다. 영어로 입력하고 한국어로 출력했던 반쪽영어였다. 그러나 한국어의 개입을 제지시켜 놓은 것이 효과가 있었다. 영어만 남아 천천히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한 번에 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살아나 주었다.


비유를 들자면, 이것들이 그동안 펌프우물에 채워 둔 마중물, 차고 넘쳤던 마중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귀 뚫리고 입 트이면서 펌프질이 시작이 되자마자 무의식 지하수를 끌어올린 셈이다. 중국집 여자와 한판 싸우고 나서부터 교수들과 인터뷰도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만 접했던 전공영어들을 살살 사용해 보기 시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교수들에게 듣는 말에서 얻은 정보는 물론 배운 영어도 상당했다. 이렇게 인터뷰를 몇 번 하고 나니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다.


토플준비도 정말 수월했다. 그때 토플시험 유형은 Pencil & Paper based test였다. 시험 보기 한 일주일 전부터 시험시간에 맞추어 매일 기출문제 하나를 집중적으로 풀었다. 토플 지문의 내용은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이미 익숙한 상태였고, 가장 어려웠던 듣기도 문제유형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PPB 듣기는 지문에 나온 한 문장에 콘텍스트 하나 없이 딱 한 번만 읽어 주기 때문에 사실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귀가 뚫린 이후 4~5번 정도 본 기억이 있다. 다행히도 응시료가 지금에 비하여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샀다. 결국 대부분의 미국대학원에서 요구했던 최저점수 600 (700 정도가 만점)을 받았다. 뉴욕에서는 못했지만.


영어와 한국어 감정온도 차이, created by Al


그리고 영어와 감정공감대를 빨리 형성하였다.

언어의 기본적인 온도를 빨리 파악했기 때문이다. 영어의 감정온도는 한국어의 감정온도와 차이가 있었다. 영어가 10도라면, 한국어는 20도 혹은 그 이상이다. 영어가 훨씬 더 cool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실제 상황에서 영어 원어민들이 '자신'에 대해서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처음에는 공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영어온도의 톤으로 한국말을 하면, 싸움이 나거나 빈정을 살 수도 있다. 요새말로 하면 T성향과 F성향의 차이라고나 할까!


처음 뉴욕에 도착한 날, 기숙사 방을 잡는 과정에서 이것이 파악되었다. 비행기 연착으로 좀 늦었다. 이것을 두고 기숙사 관리인과 경비원이 내 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명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를 하는 낯선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다소 겁이 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들에게 '나'는 어떤 '대상'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래서 거리감이 한껏 느껴지는 그런 대상이다. 특히 'she'라는 단어가 들릴 때마다 더 그러했다.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깝게 느껴져야 하는 사이도 아닌데 뭐랄까? 서운함이나 섭섭함이라기보다는 '각각'이라고 밀어내고 거기에 딱 세워 둔 느낌! 선듯 받아들이기엔 좀 먹먹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영어를 들을 때마다 기본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의 온도였다. 이 온도가 영어 원어민들 사이에서는 가장 일상적인 정상적인 상태였다. 이것을 기준으로 영어 원어민인 상대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이다. 영어를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그것이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를 감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사부님들의 조언이었다: 들리면 말한다. 이것으로 요샛말로 내가 출발부터 마인드셋이 된 것이다. 이것으로 내 직관이 제대로 작용했다고 본다. 방향을 잡고 길을 잡는데 키가 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아니었으면 나는 뉴욕 한 복판에서 영락없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어학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자각한 순간부터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낭비하고 처절한 심정으로 귀국길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들리면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나에게  불교의 화두 같은 것이 되었다. 화두란 불교명상 수련에 쓰이는 방편(도구)으로서 수행을 시작할 때 맨 처음 떠올리는 말이다. 이 말 자체보다도 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마음을 수련해야 진리에 다다른다. 사부님들은 학생들에게 이런 화두같은 말만 던져주고, 방법은 안 가르쳐 주었다. 화두가 길을 내줄 것이라고 믿으셨을 것이다. 나의 경우, 그들이 믿은 대로, 화두가 길을 낸 셈이다.


- "사부님,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습니까?"

-- "들리면 말한다."

- "--"

- (After one year) "Oh, Boy! What a year in New York!"



뉴욕에 새해가 왔다. 맨해튼 그리드에는 12개 세로선 아베뉴 Avenues와 155개 가로선 스트리트 Streets가 만나는 수많은 교차점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서쪽 어느 구석 한 교차점 코너에 내 기숙사가 있었다. 그곳 3층 방 창틀에 앉아 있으면 길거리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듯이 건너편 건물에 있는 타인의 방들도 훤히 다 드려다 보였다.


다운타운과 다르게 화려하지 않은 뉴욕의 일상이 느껴지는 곳이다. 거기에서는 늘 특유의 공허감이 풍겨 나왔다. 허허로운 공허감은 아니었다. 뉴욕만의 생기가 가시지 않은 공허함이었다. 아마도 아직 발현되지 않는 밑도 끝도 없어 허허롭게 느껴지는 창조적 기운일 수도 있다. 이런 묘한 기운을 느끼며 나만의 뿌듯한 새해를 맞이했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내 일상에 들어와 자연스러워진 영어와 함께!


이제 이 영어를 데리고 다음여정을 가야했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이 맞다. 인생은 느리게 간다.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절대 다음 한 발을 내디딜 수 없다. 이것이 삶의 본 모습이었다. 어학원용 딱 일 년짜리 비자가 끝을 달리고 있었다. A blessing in disguise! 뜻하지 않은 성과를 낸 뉴욕에서의 일 년도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살짝후기

쓰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영작하지 않고 직접 영어로 쓰기까지는 6개월 이상 걸렸다. 일상적 내용은 쉬웠다. 그러나 한국에서 쓴 논문의 10페이지 요약은 수정이 많이 필요했다. 언젠가 사부님들의 영문논문이 씨뻘건 마크로 가득했던 것을 흘낏 본 적이 있었다. 이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 뒤로 나는 내가 원하는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콘텐츠아트 진에게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제 영어는 디즈니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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