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인지도 몰랐다!
"I'll leave one dollare here."
Jeff put one dollar bill in my candy jar.
I felt a bit embarrassed. "Why? Jeff?"
"Well. I have been taking your candies all the time", Jeff said, grinning as he walked away.
I had nothing to say, and neither did my friend that had just come in.
"일 달러 여기 놓고 간다"
제프가 사탕바구니에 일 달러를 넣는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제프, 왜 그러니?"
"근까. 내가 늘 네 사탕을 먹었잖아, "라고 말하며, 제프가 씩 웃으면서 떠났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마침내 방에 온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내 기숙사 방문을 열면, 문 바로 옆에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거기에 사탕 단지 하나를 가져다 놓았다. 내 방에 들어오는 누구에게든 주는 작은 배려였다. 또한 나에게도 주는 작은 배려였다. 단지가 비면 채워 놓곤 채워 놓곤 했다. 제프도 오면 꼭 하나씩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사탕 바구니 하나 가져다 놓은 일이 대단한 일은 아니다.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다. 내 방에 오는 사람들이 하나씩 먹는 거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었는데. 제프가 그러니까 그 기분이 싹 날아가버렸다.
굳이 일 달러를 바구니에 두고 갈 건 뭘까? 그날따라 제프 같지 않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준 건데. 그걸 꼭 보상을 했었어야 했을까? 그것도 꼬깃꼬깃한 현금으로. 직접. 이상하게 기분이 상했다.
제프의 사탕값 일 달러 일화가 재해석된 것은 약 6~7년이 지난 후이다. 그때와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내내 한참 작품을 하던 중이었다. 학교 작업실에서 이미 몇 시간째 있었다. 드디어 탈진 일초 전이었다. 배도 고팠고, 근육도 쉬고, 숨도 쉬어야 할 것 같아서 작업실에서 나왔다. 작업실을 나오면 바로 평상과 나무 의자가 놓인 쉼터가 있었다. 삼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광도 꽤 괜찮은 곳이라서 습관처럼 오는 곳이었다.
그날따라 아무도 없었다. 아까 학교 들어올 때 사 가지고 온 스시를 들고 나왔다. 10조각짜리 스시가 투명 플라스틱 용기에 나란히 늘어져있었다. 학생들에게 적절한 가격이라 늘 애용했던 점심이다. 그것을 한 조각씩 입에 넣고 한숨을 돌리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작업 후라 꿀맛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한 명 왔다. 흑인친구였다. 몸집만 왕만두만했지 결혼하고 첫아들을 본 착한 친구이다. 육아하랴 학교 다니랴 힘들겠지. 나는 왠지 혼자 먹는 것이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음식 나누는 한국인의 자아는 어딜 가도 못 버리지는 지라 두 조각을 권했다. 나도 배가 많이 고파서 많이는 못주었다. 다행히 다 먹지 않았던 터라!
Hey, you want some? Take them! They are pretty good!
좀 줄까? 이거 먹어볼래! 아주 괜찮더라고!
이 친구는 처음에는 상당히 꺼려하더니만 얼른 받아 두 조각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친구 큰 손을 거쳐 입으로 들어간 스시가 고목나무에 붙어있는 매미 같았다. 안 주느니만 못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스시가 너무 약소해 보였다. 그래도 끝에 친구와 함께 스시를 끝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잠시 후 교내알바를 하러 갔다. 건물 반대편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업 중인 강의실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 아까 그 친구가 누드모델을 서고 있었다. 저 알바였구나. 따는 나도 요새 이 친구를 그렸으니까.
미대 라이프드로잉 수업 Life Drawing class에는 늘 누드모델이 필요했다. 누드모델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다. 나의 첫 누드모델은 60세가 넘으신 예술가 백인 할머님이셨다. 세 쌍둥이를 임신했던 미대 대학원생이 올라가 있기도 했다. 모델이 약속을 깨는 날이면, 교수 부인이라도 단위로 올라가셨다. 정말 아무나 깨벗고 올라가 서면 누드모델이 된다. 다양한 몸의 형태를 가진 실제 라이프 Life 드로잉 drawing 수업이었다.
교내 누드모델 알바비가 그 당시 시간당 10불 (약 만 얼마)이었다. 미대 수업 하나는 3시간이 기준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 라이프드로잉 수업이 있었고 한 모델을 일주일 혹은 이주일은 그린다. 운이 좋으면 200~300불도 벌 수 있다. 그때만 해도 이만한 돈이면 가계에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생긴 그 친구에게는 정말 고마운 알바였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작품 피드백 주고받는 시간이 왔다. 작품 피드백받는 날이면, 각자 약간씩은 감상적이 된다 (이 말 정말 오랜만에 쓴다). 작품에 투사된 감정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제법 자기 고백 시간을 갖는다. 그 흑인친구의 차례가 왔다. 좀 힘든 이야기를 했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생겼고, 갑자기 아비가 되었지만, 책임을 질만큼 경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스시 준 일을 언급하였다.
When she (=I) offered me sushi, my mom was right here, (he pointed right behind his ear) and she said, "Don't ever take other people's food. It's theirs. Keep it in mind." But I was hungry. So I took it. I really thank you!"
저 친구가 스시를 줬을 때, 울 엄마가 바로 여기 있었어 (내 귀 바로 뒤에서) 이렇게 말을 하셨지, "절대 남의 음식을 받지 말아라. 그것은 그들의 것이야. 명심해." 근데 배가 고팠어. 그래서 먹었지. 정말 고마워.
이런 말을 거의 울먹이면서 했다. 나는 정말 놀랐다. 아마도 내가 스시를 주었을 때 몇 끼를 굶었던 것 같다. 친구가 하도 건장하게 생겨서 얼굴에서 힘든 기색을 못 느꼈는데 그렇게 힘들었구나. 나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애써 웃어주었다.
그런데 나를 정작 때린 것은 그의 어머니의 말이었다. 이것은 문화차이에서 온 놀라움이었다. 타인의 소유물에 대한 존중에 먼저 가치를 둔다는 것이었다. 내 것을 남에게 내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 이들의 문화였다. 그것이 '나'라는 개인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 소유물이 개인에게 갖는 의미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시같은 음식은 내가 배가 고파서 먹어야 할 소유물이다. 설사 내 호의였어도 호의보다 중요한 것이 내 생존이었다. 이것이 그들이 가치롭게 여기는 개인주의였다.
그리고 제프의 사탕값 일 달러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아, 그래서 제프가 사탕값을 놓고 갔구나! 그에게는 사탕이 사탕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군. 그에게는 그것은 나의 소유물이었다. 그것도 먹을 것이었다. 아마 사탕을 꺼내 먹을 때마다 내 것을 빼앗는다는 느낌도 들었을 것 같다. 그만큼 내가 먹을 사탕이 줄어드는 것겠지. 어쩌면 집안이 어려웠던 그에게 사탕 한알도 가치가 컸을 거란 생각을 했다. 더욱이 목사지망생인 그에게는 살짝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따라서 사탕값 일달러는 내 소유물에 대한 제프식 존중법이었다. 그날따라 제프답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가장 제프다웠던 것이다. 내 개인의 영역이 이렇게도 배려를 받았던 거구나! 문화차이로 인한 나의 큰 오해였다.
갑자기 많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예를 들어 [뷰티풀 마인드 Beautiful Mind]의 한 장면에 보면, 죤 내쉬의 아내가 남편의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현관 발코니에 앉아있던 남편에게 데려다주고,
"Can I bring you something?"
"I am ok."
직역하면, "내가 너에게 뭔가를 가져다줘도 되겠니?" "난 괜찮아." 뭔가를 줄 때 줘도 되겠냐고 상대방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상대방이 괜찮다고 하면 안 준다. 이것이 이들의 문화였다. '주는 것'조차도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물 한잔이라도. 주스 한 잔이라도. 누군가의 소유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하는 말과 행동이다. 미처 깨닫지 못한 문화였다.
제프의 문화에 따르면, 나는 제프가 올 때마다 이렇게 물었어야 했던 것 같다.
"Jeff, do you want some candies?"
"Jeff, you can take some candies anytime you want."
그러면 아마도 제프는 "Yes!" 할 수도 있지만, "No, I am fine."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뭐라 하든 나는 그의 의사를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약혼자가 한인교포였던 제프는 어설프게나마 한국문화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남의 집에 방문을 할 때 미국과 정반대의 문화가 있다는 것을. 집주인이 마실 것이나 다과를 내오는 일이나 그것을 다 먹어주어야 하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누군가 뭔가 먹을 것을 주거나 나누었을 때 일단 받아주는 것이 예의인 나라인 것을. 하지만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남의 호의를 현금으로 갚는 일은 많이 삼가한다는 것은 몰랐던 것 같다.
한국도 많이 변했다. 뭔가 있으면 잘 나누는 나의 습관적인 행동이 많이 제어를 받는다. 물론 그것이 남의 소유물에 대한 존중감에서 나오는 제어는 아니다. 그것을 받음으로 해서 엮일 수 있는 여러 가지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슬픈 일이긴 하다.
언젠가 같이 작품을 했던 백인친구가 있었다. 늘 음식을 싸들고 다녔던 나는 혼자 먹기가 어색해서 연실 음식을 권했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연실 거절을 당했다. 나는 그것이 그들의 문화인 것을 알았지만, 너무 자주 거절을 당하니까 나의 한국인 자아가 섭섭해했다. 그래서 조용히 말했다:
You know, in Korea, when you are offered food, rejecting it too many times is a bad etiquette.
있잖아. 한국에서는 남이 음식을 권할 때 너무 많이 거절하면, 예의에 벗어난단다.
그랬더니 눈이 똥그래지면서, 받아먹었다. 받아먹어 주었다! ^^ 이렇게 순진한 미국친구들이 그립다.
영어가 내 일상으로 들어오며 생긴 일이다. 소소한 문화차이로 오해가 빚어지면, 별거 아닌데도 관계가 소원해진다. 영어 귀를 뚫고 입을 틔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동서양 문화의 근간과 차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해도 구체적인 상황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안된다. 이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것같았다. 부딪혀가면서 문제를 다루는 법을 배워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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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