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콘텐츠아트 진 Sep 29. 2024

백인쌤이 전해준
일상에 대한 영어감성

읽기도 변했다. 아직도 그려지는 영어 단편소설!


맨해튼의 가을은 길지 않다. 가을이 금방 깊어진다. 추위가 금방 찾아오는 것이다. 어학원 가을학기는 도움이 되는 점이 있었다. 귀가 뚫리고 난 직후였기 때문이다. 영어로 들을 수 있는 것이 많았졌다. 들리는 내용은 여전히 미국일색의 내용이었지만, 내용보다도 들린다는 것 자체와 거기에 대한 나의 반응을 보는 것이 중요했다. 거기에 학기 중간에 입까지 틔였으니 가속도가 붙었다. 이젠 내가 상황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어학원도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귀가 뚫리고 입이 트인 상태로 참여해야 효과적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동양인인 경우는 그렇다. 나와 같이 어학원에 다닌 동양인은 대부분 일본인과 한국인이다. 그때 미국에 온 일본인들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미스 비지 회사 젊은 남성 직원이 있다. 처음에 자기를 소개하는데, He said, "Mitsubish is my identity." 미스비 찌는 나의 정체성입니다. 이런 무서운 말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I have one wife." 나는 아내가 한 명뿐입니다. 진한 일본어 어투로 이런 말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꼬, 우야꼬, 미찌꼬 (이 셋 중 하나일 것이다)의 얼굴도 뚜렷이 기억난다. 얼굴은 곱고 예뻤는데 전형적인 일본아이의 뻐드렁 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 친구는 로맨티시스트다. 자기가 사모하는 남자를 뒤를 쫓아 온 것이다. 미국에서 변호사가 된 일본 재벌가의 아들이었다. 고민을 끙끙하더니만 결국 결혼했다. 이들 동양인 중에 어학원 일 년 다니면서 귀 뚫리고 입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외가 있었다. 성악하는 친구들은 거의 다 뚫리고 트였다. 그것도 일 학기 초에. 


반면 유럽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주로 프랑인과 이탈리아인이 많았다. 기숙사 내 옆방에 전형적으로 키가 크고 건강한 유럽여자 애들이 두 명 들어왔다. 도착한 바로 그날 저녁 내 방에 뛰어들어와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는 연실 손으로 전화기를 흉내 냈고, 대담하게 생긴 다른 여자애는 허공에 옷걸이를 그려댔다. 영어 한마디도 못한 것이다. 말하는 것이 블어같았는데 알고 보니 이탈리아어였다. 두 아가씨는 거의 기숙사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이미 아메리칸 보이프렌드를 사귀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영어를 술술 하더라! 


프랑인들은 특유의 문화적 자존심이 있었다. 동양애들, 특히 동양남자들을 깔보는 경향이 컸다. 가끔씩 나한테도 비아냥거려서 비위가 상하긴 했다. 속으로 '뭐가 저리 잘란 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감성이 콩 볶는 듯하여 재밌는 애들이었다. 덕분에 다양한 엑센트에는 익숙해졌다. 또한 각기 다른 문화적인 분위기도 적응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학원은 아쉬운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어학원에는 원어민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나의 지론이다. 한 반 학생이 15명이면 적어도 7~8명은 돼야 한다고 본다. 현실은 강사와 직원을 제외하고는 영어 원어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동양인이나 유럽인들과 옥신각신 하다 보면 늘 거기가 거기다.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어민과 부딪히는 것이 더 효과가 크다. 단 동양인의 경우, 귀가 뚫리고 입이 트인 상태는 되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뉴욕의 한 구석



이런 와중에 강사 한분이 바뀌었다. 한분은 전형적인 백인 미국인이 있었다. 일 학기 때 만났던 세 분의 여선생님과는 전혀 달랐다. 이 세분에게서는 각기 다른 민족의 배경색이 강한 이민자로 느껴졌었다: 스페인, 독일, 그리고 남미 어느 국가 (잊어버렸네요)! 세분은 열정이 넘치는 분들이었다. 


반면, 새로 오신 백인 강사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젊잖은 할아버지셨다. 다소 보수적인 느낌도 있었다. 미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침착한 백인의 이미지가 풍기는 분이셨다. 이분 수업을 무리 없이 좋아했던 이유는 수업자료 때문이었다. 단편 소설을 읽었다. 


그때 내 읽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가장 큰 변화는 영어를 읽으면서 한국말로 분석하거나 번역을 안 하는 것이었다. 영어로 입력하고 한국말로 출력하는 버릇도 없어졌다. 영어로 인풋하고 영어로 출력된다. 인풋과 아웃풋 사이에 영어로 느낀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조용히 진행되었다.

 

유학을 계획했을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전공원서 읽기 과제를 한국식으로 독해하고 해석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랬다간 죽을 것 같았다. 양이 상당히 많을 거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말 개입 없이, 그것도 영어의 감성을 느끼며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진일보가 진백 보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읽기에 변화를 느끼고 나서야 유학을 할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특히 단어는 신기했다. 일부러 뜻을 찾지 않아도 된다. 같은 단어를 다른 맥락에서 7~8번 정도 체험하면 그 단어가 가진 기본적인 의미나 뉘앙스가 잡힌다. '잡힌다'라는 표현이 맞다. 사실 한국인들이 모르는 한국어 단어가 나왔을 때 사전을 찾아서 뜻을 파악하지는 않는다. 우연히 혹은 계속 사용하면서 익히게 되고 자연스럽게 기억저장소에 묻힌 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어단어도 그랬다. 단어가 문장이나 표현과 함께 들어온다. 영어는 같은 단어도 다른 문장이나 표현에 따라서 다르게 사용이 되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따라서 뭐랄까 단어 익히는 기분이 짭짤하다고나 할까? 먼저 많이 읽고 나중에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도 단어는 이렇게 익힌다. 진심 영어를 배운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좋은 것은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절약되는 것이다. 반 이상이 절약이 되었다. 이렇게 수월했던 것이다. 워드 파우어 Word Power, 2만 2천, 3만 3천을 외우느라 고생했던 일이 가끔 믿기지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내용에 충실할 수 있었다. 발음이니, 문법이니, 단어니 하는 것들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던 탓이다. 이런 외형적인 것들 보다도 이 외형에 담긴 감정이나 생각에 몰입하기가 편했다. 그때 읽은 단편 중에서 지금도 기억이 나는 단편 소설이 하나 있다.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몇몇 부분이 그림으로 머릿속에 심어져 있다.



short story collections



이 소설은 20대 중반인가 30초 초반인 (아직 40은 안 넘어간) 한 미국여자(이하 가명: 애니)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다가 헤어졌다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 애니는 삶의 기반을 잃은 듯한 위기를 맞았다. 애니는 남자에게 매달리는 대신 다른 삶을 선택한다. 다른 주 state로 가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애니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것 같고, 일이 끝나면 새로운 취미활동을 하러 갔다. 다이빙수업이다. 그녀는 이렇게 하루일상에 루틴을 만들어갔다. 그녀는 자기 루틴에 따라서 하루일과를 잔잔히 수행해 간다. 그러던 어느 햇살 좋은 여름날? 그녀는 다이빙을 한번 성공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아마 이것이 이야기 끝인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이 소설을 아시는 분은 고쳐주세요!^^)


이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는 특별한 것이 없다. 남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삶의 위기를 느꼈을 때도, 다른 주로 가기로 선택을 했을 때도, 마치 하루 일과를 수행해 가듯 일을 진행해 나갔다. 다른 주에 가서 정착할 때도 우울증 같은 감정의 굴곡이 전혀 없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루틴을 정하고, 거기에 따라서 살고, 그 소박한 일상이 주는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형적인 이야기의 서사구조가 거의 없어 보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야기의 흐름에 굴곡을 주기 위해 특별하게 만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골격은 있지만 전체 이야기에 극적인 감정개입이 없다. 발단이라든가 반전 혹은 갈등 전개나 위기, 절정의 지점을 강조하는 감정적 표현이나 사건이 없다. 예를 들어 다시 전 남자 친구에게로 돌아갔다든지, 다른 남자 친구를 만났다든지, 아니면 다이빙에 상당한 능력이 있어서 대회에 나가 우승을 한다는지 하는 이야기가 없다.


문학치고 지나칠 정도로 지루할 수 있는 일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고나 할까?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것을 감정의 미니멀니즘 dirty realism or minimalism이고 했다. 1990년 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소설의 유형 중 하나란다. '일상과 그것이 주는 안정감"에 대한 미국적 가치가 여실히 들어있던 소설이었다. 삶이란 대단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작은 갈등의 연속이고, 거기서 나오는 작은 목소리에서 오히려 진정한 성숙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 읽었을 때 백인 할아버지 강사가 한 말이 기억에 있다.


It is not really bad to have a routine, is it?


나는 문학은 잘 모르지만, 이 단편소설에서 '일상'에 대한 미국적 감성이 내 안에 인쳐진 것 같았다. 한국의 소행성 같은 것인데 좀 다른 색깔이다. 둘 다 소박한 느낌인데, 한국의 소행성은 따땃해지고, 미국적 일상은 선선해진다. 아마도 미국같이 땅덩어리가 큰 곳에서 느껴지는 '일상'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개인사에 위기가 왔을 때 다른 주로 가서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신선했다. 거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말 그대로 '새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은 부럽기까지 했다. 


넓은 땅에서 '일상'이 가치를 갖는 이유는 미국처럼 다양한 인종이 얽혀사는 곳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공통분모가 아닐까? 인종을 넘어서 서로의 일상을 지켜주는 것도 여전히 지켜지는 가치로 보인다. 내가 맨해튼 그리드에서 보았던 개인주의적 가치이다. 이것은 한국인에게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미국문화를 공감하는데 큰 열쇠가 된 것 같다.  그 뒤로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의 일상감성이 문화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 감지된다. 나는 그것이 좋다.



American TV Drama FRIENDS



영어 귀가 뚫리고 입이 트일 때까지는 혼자 난리를 치면서 드라마를 썼다. 그런데 듣기와 말하기의 순환고리가 한번 클릭되고 나니까 그다음은 조용히 안에서 심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듣기와 말하기 순환고리에 읽기가 합세를 했다고나 할까. 이제 영어로 인풋 되는 통로가 듣기하고 읽기가 된 것이다. 영어로 사고하고 느끼는 과정이 더 복합해지고 무의식적이 되어 인지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내가 겉에서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을 계속 영어에 노출시키는 일밖에 없어 보였다. 속에서 작동이 끊기지 않게 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때즈음에는 정말 영어환경이 필요할 수 있겠다 싶었다.




zen art from Japan



백인할아버지 강사는 일본 젠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때 뉴욕에 마침 젠분위기 나는 일본 예술가의 전시가 있었다. 거기로 현장학습까지 갔었다. 미국의 일상감정이 동양의 마음 챙김 mindfulness에도 투사가 되어 들어온 것 같다. 또 한편으로 미국 내에서는 재밌게 보았던 '사인필드 Seinfield'나 '프렌즈 Friends'이란 대중적인 TV드라마에도 적용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 TV드라마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일상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니까!



 


감사합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콘텐츠아트 진에게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