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밑줄 긋기 1
“당신이 이런 증상들을 계속 갖고 있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증상들이 연막 구실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강박 관념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원인이 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습니다. 당신이 이 연막을 거두지 않으려 하고, 당신의 왜곡된 결혼 생활과 얼룩진 어린 시절에 맞서 해결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 증상들로 인한 고문과도 같은 삶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괴로운 생각에 부딪히게 되면 당신은 거기서도 도망칩니다. 그것에 맞서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피할 수 없는 것들을 피하려 드니까 그것들은 강박 관념이라는 증상의 옷을 입고 당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강박 신경증의 원인은 어린 시절의 부적절한 배변 훈련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악이란 인간의 안 또는 밖에 존재하는 생명이나 생명성을 죽이고자 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은 그 반대다. 선은 생명과 생명성을 늘어나게 하는 것이다.
사춘기 아이들은 이제 막 감정에 눈을 뜨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이 강할수록 거기에 놀라 그 감정이 어떤 것이라고 이름 붙일 힘을 잃고 만다.
사실 그 문제에 제대로 파고들어 가 보면 문제의 진짜 원인은 자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 가정, 학교, 사회에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픈 아이 뒤에는 아픈 부모가 있다는 것이다. 부모 생각에는 아이들을 고쳐야 한다고 판단할지 몰라도 대개 서둘러 고쳐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는 부모 자신들이다. 진짜 환자는 부모들인 것이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에 결손이 있게 되면 아이는 십중팔구 그 결함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그로 말미암아 비현실적인 부정적 자아상을 갖게 된다.
악과 너무 오래 마주하게 되면 그 악은 반드시 사람을 오염시키거나 파괴시키게 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악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상황에서 특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그저 다른 길로 내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악한 사람들의 핵심적인 결함은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에 있다.
“자신을 거스르는 수고를 묵묵히 감내하려는 자만이 예수님께서 기쁘게 거하시는 처소가 될 수 있다.”
- 성 테레사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정신적 성장에는 자신이 성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불완전함의 증거를 없애 버리려 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악의 본질적 구성 요소는 자신의 죄나 불완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드는 점이다.
악의 피해자로서 가장 전형적인 사람은 어린 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구성원들이다. 뿐만 아니라 부모들에게는 자녀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이 주어져 있는 까닭에서다.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지배는 노예들에 대한 주인의 지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의 미성숙과 그로 인한 의존성은 부모가 거대한 능력을 장악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권력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권력 역시 다양한 모습으로 악하게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악이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 데 힘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악한 사람들에게는 외견상 이렇다 할 고통이 없어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과 불완전함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아 당연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언제나 최고의 위치, 명령자의 위치에 있는 자로서 자신을 내보여야만 한다. 그들의 나르시시즘이 그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들이 최고의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모든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빌리도 자기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며,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괜찮은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믿기 우해서는 어머니의 악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와 혐오감을 없애 버릴 수 있는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녀는 그 공포와 혐오감의 대상을 거미로 바꿈으로써 그 길을 찾게 되었다. 악한 존재는 어머니지 거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미 공포증은 어머니의 악을 부정하는 데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악을 부정하는 데에도 거미 공포증을 사용해 왔던 것이다.
깊은 치유가 진행될 수 있으려면 환자는 일정 단계부터는 어느 정도 퇴행을 해야만 한다. 적어도 정신 분석적 치료 장면에서는 그렇다. 그것은 어렵고도 두려운 작업이다. 심리적인 성숙과 독립의 부속물들에 익숙해 있던 성인이 다시 스스로를 의존적이고 유약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기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의 본질은 바로 인정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어머니라면 그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아기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자신의 아기를 사랑한다. 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아무런 조건도 없다.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엄마는 아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이 사랑은 바로 인정의 표시다. 마치 아기에게 이렇게 말해 주는 셈이다.
“너는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놀라운 가치가 있단다.”
심리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얘기는 곧 사랑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야만 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터득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치료 과정의 가장 위대한 발자국은 대개 환자가 정신 치료자를 찾아가기로 처음 결정을 내리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 그 순간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아울러 자신의 병과 싸울 것과 그 싸움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얻기로 이미 결정한 것이다.
우리에겐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게 된다. 어떻게 5백여 명의 사람들이, 그것도 개인들로 보면 대부분 조금도 악한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밀라이의 악과 같은 그런 끔찍스러운 악의 행위에 가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집단 내 개인들의 역할이 전문화될수록 개인이 도덕적 책임을 집단의 다른 부분에 전가시키는 일은 가능하며 쉬워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버리는 것은 물론 집단 전체의 양심도 너무 분해되고 희석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자신의 고통에 둔감해지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도 둔감해지는 성향을 갖게 된다.
품위란 삶의 하강기가 찾아와도 퇴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고통에 직면하면서도 무뎌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극심한 고뇌를 겪으면서도 제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역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태도에는 일종의 관성이 있다. 한 번 움직임이 시작되면 반증이 눈앞에 있어도 계속 고수하려는 성질이다.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꽤 많은 수고와 작업이 요구된다. 그 과정은 끊임없이 자기 회의와 자기비판의 자세를 힘써 지키려는 것으로 시작할 수도 있고, 내가 지금껏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모조리 그릇된 것일 수도 있다는 뼈아픈 인정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처음 한동안은 혼돈의 상태가 이어진다. 이 상태는 퍽 불편한 상태다. 그러나 그것은 개방의 상태이며, 따라서 배움과 성장의 상태다. 우리가 새롭고 좀 더 나은 비전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혼돈의 상태를 거치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궁극적으로 자유롭다. 우리에겐 심지어 배운 것이나 사회가 정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거부할 자유도 있다. 우리는 인간의 몇몇 본능마저도 거부할 자유가 있다. 예컨대 일부러 독신을 선택한다든지, 순교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든지 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자유의지야말로 인간의 궁극적인 실존 요소다.
나는 영리라는 동기가 추구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진실과 사랑이라는 더 높은 가치에 귀속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만약 우리가 어떻게든 그 귀속을 꾀하여 자본주의를 ‘기독교 정신에 맞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운명적으로 자본주의자 사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어떤 집단이나 기업체나 사회도 그 귀속을 하지 못하게 되면 언제나 악해지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