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밑줄 긋기 1
마침내 자기 삶의 중심에서 주인으로 우뚝 선 이들, 결국 자신의 운명을 비범하게 바꿔 낸 이들의 삶의 궤적. 거기엔 늘 우리의 두 가지 시선이 공존한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와 <그와 나는 달라>. 이 이중적인 시선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시도가 바로 이 책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평범과 비범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어떤 변화>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책은 그 변화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탐사한다.
삶의 객체에서 <주체>로 전환한 많은 인물이 보여 주는 진실은 전환점이 아닌 전환기에 있다. 계기는 한순간의 사건에 의해 촉발되지만 실제로 삶을 이륙시키는 것은 오랜 기간 진행되는 <자기 다운 삶을 발견하기 위한 실험>이다.
세계적인 컨설턴트 윌리엄 브리지스는 변화는 외부적, 환경적인 데 비해 전환은 내면적, 심리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전환은 외적인 변화를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겪어야 하는 내적인 과정이다. 내면의 깊숙한 전환을 무시한 채 외적인 변화에만 신경 쓰면 본질적인 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전환기의 실험은 <아주 많은 우연한 사건들> 속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크고 작은 사건들로 촘촘히 짜여 있다. 계획대로 되어 기쁜 일도 있고, 오래 준비하고 바라던 일이 무산되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결과가 어떻든 삶을 바꾸는 것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후회 속에서,
닫힌 문을 바라보며 아쉬워한다.
우리 앞에 또 하나의 문이 열려 있는 것도 알지 못한 채.
- 헬렌 켈러
사람들을 통해 영감을 얻고, 정보를 통해 아이디어를 구하며, 연습을 통해 실력이 향상된다. 하지만 현 상황을 파악하고 새로운 발견을 이끌어 내며 자신만의 고유한 해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 에스터 부흐홀츠(임상심리학자)
좋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게 한다는 점에서 책이 우리의 사고를 훈련하는 좋은 도구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자칫 우리가 책에서 <완벽한 답>을 찾으려 하거나, 책이 그런 답을 제공하려고 할 때 생각은 제한된 채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된다. 이렇게 되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되려 책에 읽히게 된다. 조지프 캠벨이 좋은 책으로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어떤 결론을 내려 주지 않는 책>을 꼽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의 기능은 결론이나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사유의 재료를 제공하고 영감을 점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어려운 용어 뒤에 숨지 않는다. 심입천출, 깊이 들어가서 얕게 나올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전문가다. 배울 때는 깊이 들어가되, 설명할 때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깊이 이해한 사람의 특징이다.
혹시 이런 경험을 한 적 없는가? 내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내 나름의 <인생의 메시지>를 종종 사람들에게 충고처럼 전하곤 했는데, 어느 날 예전에 읽은 책을 뒤적이다가 그 메시지와 꼭 같은 표현 아래에 밑줄이 죽 쳐져 있는 경험 말이다. 내가 생각해 낸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말이 사실은 책의 문장을 고스란히 옮겨 오기만 했던 것임을 확인한 순간 잠시의 부끄러움과, 거의 동시에 독서가 가진 <보이지 않은 힘>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책을 읽을 때의 <충격>이 우리의 영혼에 흔적을 남기고, 이것이 알게 모르게 삶에 심오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외부의 익숙하지 않은 것들과 부딪힘으로써 낯선 것에 반응하는 내면의 새로운 <나>와 마주하게 된다. 새로운 환경이 새로운 나를 소환하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모습은 전에 없던 모습이 아니다. 때때로 빛을 발하다가도 이내 사회적 가면(역할) 뒤로 숨어 버려 알지 못했던 내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행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아 있던 나의 여러 모습을 수면 위로 떠올리는 과정인 것이다. 여행은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찾는 과정이다.
큰 바다를 건너자면 폭풍에 휩싸이고 풍랑에 시달리고 암초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두려워 배를 띄우지 않으면 진정한 인생을 시작할 수 없다.
소셜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풍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고 말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떠나기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여정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돌아온 자는 익숙한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사유한다. 말과 행동도 달라진다. 커진 마음만큼 삶도 깊어진다. 여행과 삶은 이렇게 연결된다.
취미에 몰입할 때는 마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건 자체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몰입해 있을 때 생각과 걱정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은 텅 비게 되며, 이런 <심리적 여백>이 문제를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장기를 둘 때 선수보다 관전자의 눈에 효과적인 수가 잘 들어오듯, 문제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때 잘 풀리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휴식의 질과 관련이 깊다. 즉, 휴식을 통해 얻는 이익이 일하며 돈을 버는 것보다 훗날의 삶에 더 가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쉬는 동안 몰두할 <진정으로 가치 있는 활동>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쉬는 기간이 길수록 몰입할 활동이 더욱 분명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과감히 휴식에 돌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10년 후에 죽는다면 무엇을 하며 여생을 보낼 것인가? 10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다. 마냥 쉬기만 할 수도, 그렇다고 여행만 하며 돌아다닐 수도 없다. 오히려 매일매일 그대에게 기쁨을 주는 일상적인 활동이 중요하다. 큰 결과를 얻었을 때의 성취감이 아닌, 하루하루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그대가 순수하게 희열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성소는 종교적인 공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자신과 가장 잘 공명하는 공간이 성소다. 성소는 <마음의 고향>이다. 왜냐하면 참된 나를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재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기와 간격의 문제일 뿐 결국 비는 오게 되어 있다. 관건은 <공동체의 일상과 사람들의 심신이 그때까지 견딜 수 있는가>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우제는 비가 내릴 때까지 사람들이 버틸 수 있도록 해준다. 기우제와 같은 의례의 기본 기능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을 직시하고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서로 마음을 북돋을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바꿀 뿐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철학자)
종교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막스 뮐러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좋고 나쁘다는 것은 다른 것과의 비교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인데, 하나만 알고서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어찌 알겠냐는 것이다.
최고의 자리에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 훌륭한 스승이다.
구성원 모두가 같은 의견이라면, 굳이 모여서 토론할 이유가 없다. 각기 다른 의견 속에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종합해 입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동체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공동체를 선택할 때, 또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구성원을 모을 때 중요한 기준은 <다양성>, 그리고 그 다양성을 해치지 않는 <건설적인 토론 능력>이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확보한 공동체는 친목을 넘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건강한 공동체는 개인의 고유한 역량과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 모두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구성원을 가려 받으며, 일단 뽑고 나면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다. 반대로 한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되거나 조직의 목표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개성을 짓누르는 집단은 건강한 공동체일 확률이 낮다.
나는 천 번을 실패한 게 아니라 전구를 발명할 수 없는 천 가지 방법을 배웠다.
- 토머스 에디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