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초라한 나그네 (중략) ...넘어서야 내가 산데, 10년 전 전설이 나의 첫 상대
-『P-TYPE, 돈키호테 Ⅱ 中』
A도로의 답보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6개월 전 군 입대 1년을 목도하는 시점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어디로 떠나면 좋을 것 같냐는 질문을 나는 올린 적이 있었다. 지금도 내면은 부인하고 있지만, 아마 심연은 그것을 보고 위선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그전부터 그에 대한 답을 도출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단지 그 대답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고 있을 뿐.
Isle of Islay, 생명의 물을 간직한 성지.
아일라 섬. 서울과 면적이 비슷한 곳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중간한 섬이다. 한국으로 따진다면 충청도 태안반도 아래에 서울 땅만 한 섬이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인데, 솔직히 섬 자체만을 놓고 따져본다면 구태여 찾아갈 만한 곳은 아니다. 인구도 3천 명 정도밖에 없어 인프라가 매우 부족한 데다 춥고 외지며, 하루에 춘하추동이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여행지라고는 결코 부르기 힘든 기후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런 격오지를 구태여 가는 사람이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일라 섬은 매년 전 세계 사람들이 기꺼이 찾아오게 되는 장소이다. 다름 아닌 위스키, 그것도 조금 더 독특한 특징을 가진 위스키 때문이다.
위스키의 원료인 몰트를 가공하는 데 있어서 아예 피트를 안 쓰는 경우는 드물 정도로 피트는 위스키 생산 시 필수적인 원료 중 하나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일라의 것은 꽤나 유별나긴 하다. 저녁 무렵 비박할 때 장작가지에서 피어오르는 진한 그을음 내나 차를 타고 내렸을 때 부둣가에서 느껴지는 짭짤한 해초향, 아니면 병원 구석에 있는 수술실에서나 맡을 법한 요오드 냄새, 간혹 땡볕 아래 타이어에서 맡을 수 있는 타르까지. 마실 것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괴이쩍게 들릴 만한 아로마들이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이 기묘한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소수의 사람들은 금쪽이와 같은 녀석을 거의 신앙과 같이 추앙한다. 피트 위스키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형용모순적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아일라 위스키의 유별난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두터운 레이어. 어렸을 때는 앞서 나열한 것과 같이 날카롭고 야성적인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춘기 청소년과 같은 모습을 띄는 요소들이 여러 종류의 매개체에서 재워지어, 인고의 시간을 가지고 원숙해짐에 따라 다양한 면모를 비추는 성숙한 어른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아일라 위스키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애를 잘 묘사해 주는 피사체인 것이다. 이번 순례의 목적은 이러한 변천사와 그 원동력을 느껴보고 직접 이해하기 위함이리라.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아일라가 만드는 스타일의 위스키, 즉 피트 위스키는 사실 순전히 내 취향은 아니다. 철저히 내 개인의 취향이나 예상을 전제로 순례를 기획했다면 일본이나 프랑스의 꼬냑 지방으로 떠나는 것이 훨씬 더 합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협상을 통해 아일라를 택한 것은 내 유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일라 섬의 풍토가 곧 나라는 존재의 기질과 퍽이나 닮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자진해서 읽는 사람이라면 필자가 누군지를 알면서 읽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가정 하에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고자 한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서문교라는 존재는 기인에 가까운 유형이다. 나도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으로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스스로도 알고 싶은 오래된 난제이다. 다만 내 소신 하나만큼은 독야청정 지키겠다는 신념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거나, 아니면 몰고 오게 된 것 같다. 마치 저숙성 피트 위스키와 같이 말이다. 분명히, 나와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 중에서는 한 번의 만남만으로도 나를 만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거나 아니면 아예 상종하기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Love or Hate", 증류소로 따져보았을 때는 라프로익과 같은 가치관으로 인생을 살아왔지 않나 자평하고 싶다.
사랑하거나 혐오하거나. 중용은 결코 존재치 아니한다.
그런 상태에서 18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스스로 판단하더라도 그 시간 동안 내가 원숙해지거나 비범하게 발전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인에서 괴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 담장 안팎 시간의 상대성, 군 내부의 여러 악질적 폐단,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정신 · 육체적 변화. 그것에서 배운 부정적인 요소들이 계속해서 나를 좀먹는 듯하였다. 나라는 존재는 결국 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토하는 꼴을 자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었다. 쇄신이 필요하였다. 티끌만큼이라도.
아일라는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저력이 있는 곳이다.
아일라는 나에게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시 돋친 저숙성 피트 위스키를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진 고숙성으로 만드는 이 좁은 섬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힘이 내가 걸어온 길을 다시 톺아보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째서 그 가시 돋친 녀석마저도 사람들은 사랑해마지 않는지 그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와 같이 성지를 방문하러 온 순례객들이나 순례객들의 우상을 계속해서 지켜나가고 있는 수도자들, 그리고 이들의 근간이 되는 일리악(ileach, 게일어로 아일라 섬의 토박이를 의미한다)들과 말이다. 그렇게 논의를 나누다 보면 나라는 저숙성 존재는 어떠한 부분이 모자랐는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아니, 찾아야만 한다. 전역 이후 부여된 삶, 두 번째 소포모어를 위해서라도.
이번 순례를 준비하는 데 있어 많은 시행착오가 존재하였었고, 이 글을 여러분들께 선보이기까지도 많은 도움이 존재하였다.
먼저 군대. 마주치면 다시는 인사도 하고 싶지 않지만, 이따금씩 생각이 나는 전 여자친구와도 같은 존재. 내 청춘의 일부를 갈취한 괘씸한 집단이지만 내가 지금 목표로 하는 공간으로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동기와 지원을 제공해 주었으니 감사인사를 표하지 않을 수는 없다.
여러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계획 공정표를 수립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검토와 수정을 조언해 주거나 도움을 준 지인들. 그리고 특히 앞서 고행길을 떠난 선배로서 아일라 현지 이동수단과 관세 문제에 있어 직접 전화를 걸어주어 조언을 세심하게 건네준 분들께 특히 감사를 표하고 싶다.
아일라 순레를 앞서 조승원 기자의 <스카치가 있어 즐거운 세상>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에서도 많은 정보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첫 번째 책과 같은 경우에는 나에게 양립된 감정이 공존된 책이다. 조 기자의 책은 내가 증류소 투어를 준비하는 데 있어 크나큰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이 책이 아니었더라면 일정을 계획하는데 여러 애로사항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반대로 내게 질투감을 일으키기도 하는 책이기도 하다.
솔직히 내가 아일라 순례를 기획할 때만 하더라도 국내에 위스키 관련 서적은 많았으나 최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문체가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내가 기행문을 쓰면 나름 수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다소 발칙한 생각도 해보았었지만, 얍삽하게도 조 기자가 굴지의 서적을 내버렸으니 뭐 어쩌겠는가. 기왕 이리된 거 하이랜드하고 로우랜드도 마저 책으로 출간해 주길 애독자로서 바랄 뿐이다.
조승원 저 <스카치가 있어 즐거운 세상>, 700쪽이나 되지만 술술 읽힌다.
하루키의 책은 참 심플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유려하고 간결한 문체로 풀어나가는 아일라 여행 에세이는 처음 한 번 읽고 나면 고개가 한 번 갸웃거려질 것이다. 생각보다 내용에 알맹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행기가 주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스키가 주된 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소가 뇌 속을 한 번 혀로 날-름 핥은 듯한 감상을 받았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그 내용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맛이 다셔지고, 아일라를 거쳐왔다는 인상을 받는다. 미묘한 듯하면서도 여운을 길게 남겨주는 문장들. 마치 평양냉면을 에세이로 빚어내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저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구판 <위스키 성지 여행>이 좀 더 잘 알려져 있긴 하다
나는 동토(凍土)에서 동토(東土)로 향하고 있다. 영국은 서쪽에 있는 나란데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고 묻겠지만 어쨌든 나는 동토(東土)로 가고 있다. 얼마 전 뉴스 기사에서 이러한 댓글을 본 적이 있다. 현재 MZ세대들에게 위스키가 인기를 끄는 것은 일시적 반짝 유행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나는 단순히 시대적 유행에 영합되어 끌려다니는 사람은 아니라고 자부한다. 시대가 닦아놓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닌, 미답봉을 개척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누구나 바라보는 관점이 아닌, 세계지도를 반대로 뒤집어놓고 드넓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동남풍을 타고 스코틀랜드 땅을 향해 나아간다는 정도로 관념이 뒤바뀌어져야 한다. 2020년 영원한 가황 나훈아는 자신의 첫 비대면 콘서트인 '비긴 어게인'에서 우리가 세월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월을 모가지를 탁 붙들어 잡고 이끌어가야 하는 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세태에 영합되는 것에서 벗어나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나만의 확고한 주체적 방향성을 구축하는 것이 이번 순례의 당위성이다. 단지 구형일수록, 단지 숙성 연수가 높은 것이라고 다 맛있는 법은 아니다. 개중에서는 맛없는 것들도 존재하며 맛보지도 않고 그저 앵무새처럼 맛있다고 확성시키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10일 후 귀국한 내가 얻을 제1전리품은 이 생명의 물이 가득한 정보의 바닷속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코와 혀를 얻는 것이다.
나는 앞서 언급했던 두 작가들과 비교하면 견식도 딸리고, 문장력도 한참 뒤떨어진다. 뭐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나은 점이 있다면 젊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막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왔다는 점에서 개똥철학이 아주 무궁무진하다는 점이다. 때문에 나도 한국을 떠나 아일라 섬에 체류하는 이 9일간 동안 겪은 경험들을 필자 특유의 비정상적인 관점에 투영하여 기록하고자 한다. 어차피 볼 것도 없고 내용도 많이 뒤떨어지지만, 나처럼 혼자 이 험지를 순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비교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되고 싶었다. 혹시 알겠는가. 나의 이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작일지.
피타입의 첫 상대는 10년 전의 전설, 나에게 있어 처음 맞설 상대는 18개월 전의 짬찌.
참 비교하기 뭣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나지만 공통점은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새로운 시작을 외친다는 것이다. 나도 솔직히 이번 여정의 교훈이 나에게 어떠한 자양분으로 만들어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술만 퍼마시고 꽐라가 돼서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오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20대 중반을 시작하는 이 시점에 인생의 변곡선을 지탱하는 반석 하나 정도는 가져와야 정상이다. 속물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의 자금, 그만큼의 노력을 쏟아부었으니깐 말이다.여하튼 나는 이제 순례길에 모른 행자다.
내가 성찰하기 위해서 쓰는 졸작이지만, 혹여나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신다면 부디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