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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문교 Feb 21. 2024

아일라를 여행하는 군필술쟁이를 위한 안내서

1일 차. 732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모든 국군 장병들에게 건투를 표한다.

전국에 힘들지 않은 부대에 있겠냐만은, 내가 복무했던 인제 구석에 위치한 모 부대 역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위치는 남루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외졌고 군인보다는 노가다꾼이라는 신분이 알맞은 삶을 살았으며, 윗사람들은 말을 들어먹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해체된 8군단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답이 없는 부대라고 표현을 했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점은 이 부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속출하는 것이다. 후임이 군 장비를 들고 가다 넘어져 4개월간 입원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우리 분기만 하더라도 10명이 전입 와서 5명이나 전출되었다. 이를 보고 부대원 모두 입을 모아 행정반 앞에서 굿을 해야 액운이 풀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해방되었고, 해방된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732라는 망령이.


원래 계획 되었던 아일라 계획 예정. 그러나 이것은 하나둘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출발하기 나흘 전, 나에게 기묘한 문자가 한 통 날아왔다.

Your booking at Ardnahoe on Thurs 22nd - cancellation (목요일 22일 Ardnahoe 예약 - 취소)

아드나호 증류소의 일방적인 증류소 투어였다. 방문자 센터 리뉴얼이 연기된 것이 그 이유란다. 솔직히 황당하였다. 워낙 벽지에 있어 일부러 택시도 잡았는데... 덕분에 일정이 상큼하게 꼬여버렸고 출발하기 전 급히 수정했어야 했다.


*막간을 이용해 하나의 팁을 첨언하면, 증류소 투어를 하기 전 미리 트래블로그나 트래블월렛을 만들어놓고 그 카드로 결제를 할 것을 추천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해외원화결제 차단을 하지도 않은 상태로 결제를 해서 수수료 + 환율로 인한 추가적인 비용으로 상당히 피해를 보았다.


사실 여기까지면 내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과거의 단편을 끄집어내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억까는 행하기 직전에 발행하는 법인 것이다.


5시쯤이었다. 알람이 울렸는데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하고 취침에 들었겠지만 그날따라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뭐지? 뭔가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Cancelation of your flight

루프트한자 측의 일방적인 비행 취소였다. 사실 증류소 투어쯤이야 아쉽게 되었다고 넘기면 될 일이었지만, 이건 상황이 다르다. 첫 시작이 아예 꼬여버리다니? 분명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급한 대로 챗봇을 통해 현재 상황과 대체안을 찾아보려 했지만, 꼴통 양철기계답게 자꾸 이상한 소리만 반복하였다. 덕분에 출발하기 전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루프트한자 노동자 측의 파업 선언

공항에 가서야 그 전말을 알게 되었는데, 루프트한자 지상직 노동자들이 20일 오전 4시부터  21일 오전 7시 10분까지 파업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정말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짜증 났다. 어렸을 때는 파업을 한다면 나와는 접점이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러려니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직접 상황을 마주하니 느낌이 달랐다. 자신의 권익을 위해 타인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이 과연 공익적으로 옳은 행위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서양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다. 여하튼 나는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탑승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초래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출발 시간 12시간 지연
2. 글라스고 숙박 취소(환불 불가 상품)
3. 예약한 아일라 행 비행기 탑승 불가(오후로 변경 시 20만 원 추가 소요)
4. 보모어 증류소 투어 취소

우선 루프트한자 측에 손해배상 청구는 신청해 둔 상태지만 글쎄다... 우선 내가 아일라에 체류하는 동안 문제를 해결해 줄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거부당할 것 같다. 과거 옥시 사태를 보면서 나는 외국계 기업에 대해  항상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별 수 있으랴?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항공사 측에서 제공해 준 호텔에서 대기를 한 후(이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한다), 12시간 만에 네덜란드항공의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해외여행이 재수하기 전 오사카로 갔을 때니, 5년 만이다.

구여권은 기품이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여권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구여권의 디자인을 매우 좋아한다. 로고와 색깔에서 주는 힘이 있다. 그에 비해 신여권은 깔끔해 보이는 인상을 주는지는 몰라도, 유약해 보인다는 느낌이 있다. 비단 여권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바꿔야 한다. 물론 그것이 우리 사회에 계속해서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는 호의적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득이 실보다 클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서울시청의 유리벽이나 지하철의 서체를 보면서 계속해서 쓰일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의고주의적으로 옛것만을 지키고 살자는 소리가 아니다. 적어도 지속성이 있을 만한 디자인을 고안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최근 도처를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뭐랄까... 점차 문화적으로 질적 저하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내가 틀딱이 되었거나. 뭐가 됐든 어디에 선가는 이 얘기를 꼭 한 번 하고 싶었다.


KLM 네덜란드 항공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 첫 유럽행 국제선이 된 네덜란드항공은 실로 만족스러웠다. 승무원들도 매우 친절하게 맞이해 주셨고 모니터 화면으로 게임이나 영화도 시청할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점은 와이파이가 제공되었다는 점이다. 문자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세기였으나, 그게 어딘가.


네덜란드항공에서 제공해주는 기내식

석식으로 제공되는 치킨파스타의 경우 솔직히 매우 맛이 없었다. 서양의 경우 심지가 느껴질 정도로만 익힌다는 것을 알긴 하나, 그걸 뛰어넘어 고무 씹는 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나마 네덜란드 공항답게 하이네켄이 제공되는 게 정말 좋았다. 현지 직송 맥주여서 그런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조식으로 제공되는 치즈오믈렛의 경우에는 그보다 나았다. 딸기펜케이크와 치즈오믈렛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말랑하고 고소하게 넘어가는 느낌이 매우 뛰어났다. 조식 때도 하이네켄을 주문하려고 했는데 낮술 하는 어글리 코리안으로 보일 것 같아서 그만뒀다.


수많은 인파의 행렬

또 억까가 시작되었다. 내가 수속을 마친 것은 대략 7시 20분. 글래스고로 가는 비행기가 8시에 떠나기 때문에 최대한 종종걸음으로 게이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웬걸. 게이트에 도착한 것은 7시 45분이었는데 이미 게이트가 닫혀서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것이다. 홀리몰리. 이역만리에서 당하는 첫 억까였지만 이제는 익숙하려니 생각한다. 어디 이게 한두 번이겠는가. 온 김에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의 면세점이나 둘러보기로 생각했다.

진의 국가 네덜란드답다

주류 면세점에서는 달리 괄목할만한 품목은 없었으나, 확실히 진의 모태인 제네바의 국가답게 다양한 제네바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 밖에도 보모어 2001 빈티지, 우드포드 바카라 에디션이 가장 눈에 띄었다. 물론 적금을 갖다 털어야만 살 수 있는 금액이긴 했다.

이역만리에서 조선 물품을 보니 정말 반가웠다. 가격은 반갑지 않았다.

6시간의 대기 이후 글래스고행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확실히 동양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글래스고행 비행기에서 나를 포함해 동양인은 두 명 밖에 없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 희한한 곳을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외국인들도 한국을 여행하러 서울을 가지, 누가 미쳤다고 인천공항을 경유해서 대구를 가겠는가?


두 번째는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물론 유창하게는 할 수 없다. 머리로는 작문이 만들어지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영단어를 조합해서 상황에 맞춰 구술 밖에 안 한 것 같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근 5년 동안 영어를 쓸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론 문법 몇 개를 틀려먹고는 심각하게 수치심을 느꼈다.

본래 글래스고행 비행기는 21시간 전에 탔어야 했다.

다행히도 글래스고행 비행기에서는 바깥 풍경이 보이는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꼭 바깥 상공을 찍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어 다행이었다.

확실히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확실히 상공에서 보는 구름은 남다르다. 해발 고도에 따라 뜯어진 이불솜 같기도 하고 머랭뿔 같기도 하고, 얌전한 치즈폼 같아 보이기도 하니깐 말이다. 햇살 때문에 눈이 부시긴 했지만 이 오묘한 자연현상을 정말 관측하고 싶었다.


특히 제일 재밌는 것은 구름층을 통과하자마자 날씨가 달라지는 점이다. 분명히 위는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날씨였다가 살짝 몸을 내려앉았을 뿐인데 어두워지더니 먹구름과 함께 비가 동반되는 게 아닌가? 어렸을 때도 보면서 신기하다고 느껴졌는데 나이를 먹어서도 그 느낌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변하지 않은 건 여전히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글래스고 공항 전경. 옛말에 영국 날씨와 여자 마음은 믿을 수 없다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글래스고에서 대기한 지 약 5시간 경과, 드디어 아일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야 했지만, 분노감보다는 흥미로운 감정이 더 크게 느껴졌다. 24년을 동아시아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금발벽안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주위에 넘쳐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일라행 비행기

최종목표인 아일라로 떠나는 비행기는 다른 여객기와 비교했을 때 작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게 다는 아니다. 이 비행기는 시골 정류소와 같은 인상을 풍긴다. 마치 김 씨 할머니와 이 씨 할머니가 만나서 안부 인사도 하고 먹을 것도 나누고 하는 모습 말이다. 실제로 내 앞뒤로 아는 사인지 서로 안부를 묻고 수다 떠는 걸 볼 수 있었다. 물론 나야 점점 쪼그라들었지만.


아일라 공항, 2000년대스러운 글씨체가 인상적이다.

한국에서까지의 거리 8980km, 소요 시간 36시간. 멀고 먼 여정을 돌아 드디어 아일라에 도착하였다. 딱 내리는 순간 정형돈이 생각났다. 무한도전 인생극장 특집을 보면 노홍철과 정형돈이 짜장면 하나를 먹으려면 1박 2일을 거쳐 마라도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딱 그 느낌이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먼 거리를 배회하여 왔단 말인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도 좋지 않았는데, 정류장 역시 매우 낙후되어 추위를 막아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버스가 제시간에 도착해 주었다는 점이다. 아일라 공항에서 보모어 시내까지는 3.10파운드가 들었다.


보모어에 내리는 순간 전율이 돋았다. 드디어 내가 이 땅에 당도한 것이다. 주둔지에서 구상하고 파견지에서 상상하고 염원하던 바로 그 땅에. 계속해서 머릿속으로만 연상해 왔던 곳에 직접 내 발을 딛게 된 것이다.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동일한 말만 내뱉었다.


내가 여기 진짜 온다고?

보모어의 야경

처음 보모어에 다다른 순간, 뭔가 색다른 냄새가 나를 감싼다. 타이어 냄새인 것 같기도 하고 군불 지피는 냄새인 것 같기도 하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누구에게나 정겨움으로 다가올만한 내음인 것이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정겨움이라는 표현이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은, 분명 시골 어귀에서 느껴지는 그런 묘한 느낌이 나를 훈훈하게 덥혀준다.


그리고 한 가지 재밌는 점을 덧붙이자면 바닷내가 매우 깨끗하다는 점이다. 동해안이든 서해안이든 포구 근처로 가면 코끝을 저릿하게 만드는 바닷내를 누구든 접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갯내는 다르다. 훨씬 더 깨끗하며 옅고 단아하다. 혹자는 사대주의적 생각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떡하랴. 실제로 그러한데.


Room 4, Harbour View

6일간 아일라에서 내가 지내게 될 숙소인 Bowmore Bed&Breakfast의 전경이다. 주인인 앤드류 씨는 이전에도 이메일의 통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니 정말 인품이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환영 인사와 더불어 필요한 정보와 물품들을 구비해 주었다. 거기다가 장기간 거주한다고 숙소 업그레이드까지. 만일 보모어에서 묵을 계획이라면 꼭 이곳에서 지내는 것을 추천한다.


아일라에서의 첫 식사

첫 식사에서부터 한식을 먹는 것은 기열찐빠스러운 행동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당장 지금 나가서 사 먹기엔 시간도 그렇고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혹시 몰라서 전투식량을 챙겨두었는데 이게 첫날부터 쓰이게 될 줄이야. 그래도 매콤하이 쳐죽이는게 맛있었다. 사실 배고프면 뭐라도 맛있지 않은가.


참고로 옆에 보이는 물통은 포트샬롯 병이다. 특이하게도 물 색깔이 흙같은 느낌인데 이 역시 조화일까? 이곳의 풍토는 물 또한 배여들게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제 취침에 들 시간이다.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먹구름은 걷히고 햇살이 돋을 때가 되었다. 부디 내일부터는 재밌는 일만 존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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