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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킹 Jan 01. 2021

되찾고 싶은 대밭

  ※창간 13주년 알림방 신문사 주최 " 제10회 여성 백일장 공모" 입선작 - 2003년 6월 27일 시상함


  키 재기라도 하듯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쭉쭉 뻗은 대나무가 즐비한 곳, 사방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 죽세공품으로 유명한 전라남도 담양이 내 고향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사회 시간에 지방 특산물을 외워야 했는데 내 고향은 죽세공품이라서 굳이 외우지 않아도 되었지만 지금은 대나무 고장으로 유명무실하다. 죽녹원, 대나무박물관, 대나무축제 등 관광지로 개발하거나 대통밥 또는 댓잎술로 다른 변모를 꾀해 대나무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니 그나마 반갑다.

 대나무는 곧게 자란다는 특징으로 조선시대에는 지조 있는 선비를 상징했고 대쪽 같은 기질로 정절이나 절개를 상징하기도 했다 한다. 중국의 소동파가 고기가 없는 식사는 할 수 있지만 대나무가 없는 생활은 할 수 없으며 고기를 안 먹으면 몸이 수척하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이 저속해진다고 한 것을 보면 우리 인간 생활에서 대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어렸을 때만 해도 나와 대나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실과 바늘 사이였다. 과일이나 곡식을 담는 소쿠리, 쌀을 씻어 이룰 때 쓰는 조리, 지짐이를 담는 채반, 키질할 때 쓰는 키, 갈퀴, 어레미, 다래끼, 대자리, 죽부인 등 농촌에서 생활할 때 필요한 많은 물건의 재료가 거의 대나무였다. 또한 가난한 집안 경제에 대나무가 일정 부분 효자노릇을 했다. 대나무를 베어 팔 경우 얼마의 돈을 손에 쥘 수 있었고 대나무 제품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면 그 또한 꽤 목돈이 되었던 것이다.

 저녁이면 동네 처녀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엄청 가느다랗게 쪼갠 대나무로 호롱불이나 남폿불 아래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바구니를 짰다. 씨실과 날실로 짜듯 대나무로 고르고 섬세하게. 그렇게 해서 조금이나마 돈을 벌어 가정 경제에 보탬을 주었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모든 작업을 했다. 어린 나는 언니들 옆에서 잔심부름을 해줘야만 했고 일의 고통을 수다로 풀며 하하호호 웃을 때 그 사이에서 나 역시 힘든 줄 모르고 지냈다.

 70년대 이후 새마을 운동과 함께 플라스틱 보급으로 죽세공품이 빛을 잃어가더니 요즘은 그나마 남은 몇 가지 제품도 싼 중국산에 밀려 고향의 대나무 제품이 거의 사라질 위기라니 몹시 안타깝다.

 대나무를 떠올리면 어린 날의 참담했던 기억이 눈에 보이는 듯 떠오른다. 아마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눈만 뜨면 점심 도시락을 챙겨 들고 아버지와 함께 동네 끄트머리 부분에 있는 대밭으로 삽과 톱, 곡괭이를 들고 집을 나섰다. 얼키설키 대나무 뿌리가 얽혀있는 밭에서 온종일 대나무 뿌리를 파내었다.  

  “대꽃 피면 대밭은 망한 거여!”

 동네 어르신들이 한 말을 아버지는 곧이곧대로 믿고 대밭을 파서 밤나무 밭으로 용도 변경을 하기 위해서 새로 계획한 일이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대밭은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저절로 곧게 자라 장에 내다 팔면 제법 목돈이 되었다. 갑자기 잎마름병처럼 붉은 대꽃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하더니 온 대밭을 붉게 물들어 놓았다. 대나무는 나무가 아닌 식물로 땅속줄기로 번식을 하는데 뿌리에서 죽순이 나오는 초본식물임을 몰랐던 탓이다.   

  ‘제발 눈이나 펑펑 내려 마당 가뜩 쌓여부러라.’

  ‘죽죽 비나 내려 꽁꽁 얼어부러라.’

  대나무 뿌리를 파내는 일이 고통인 나는 하기 싫어서 늘 기도하며 아침에 일어나 창호지 바른 방문 너머 마당을 바라보곤 했다. 내 바람과는 달리 ‘쨍’ 하니 아침 해가 밝게 솟아오르면 ‘에이’를 내뱉고 무척 속상해했다.

  ‘그놈의 대꽃만 피지 않았어도 일을 허지 않았을 턴디…….’

  100년에 한 번 핀다던 대꽃이 온 동네 대나무 밭을 붉게 잠식시켰을 때 대꽃이 피면 대밭은 모두 망해 다시 푸름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을 한 아버지께서 대나무 뿌리를 파내고 밤나무를 심기로 하셨던 것이다. 말이 대나무 뿌리를 파내고 구덩이를 만드는 것이지 초등생이었던 여린 나로서는 중노동이었다. 윗부분의 언 땅을 괭이로 걷어내고, 삽질을 하다 보면 짧은 매듭과 매듭이 얽혀서 삽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톱으로 뿌리를 자르고 곡괭이를 이용하여 다시 흙을 파내었다. 옆에서 지켜보다 삽으로 또 흙을 퍼내고 그런 작업을 무한 반복하려니 짜증이 밀려왔다. 대나무 뿌리가 끝 가는 줄 모르고 뻗어있는 것을 보고 촌아이인 나도 그 끈질긴 생명력에 혀를 내둘렀다.

 구덩이가 차츰 늘어나서 깊이 파일수록 내 한숨도, 절망도 더 깊어갔다.

  ‘언제 다 한당가?’

  ‘언제 해가 져서 집에 간당가?’

빨리 집에 가서 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겨울은 유난히 더디 갔다.

 따스한 봄날, 아버지께서는 5일장에 가셔서 제법 큰 밤나무를 여러 그루 사 오셨다. 공들여 파놓은 구덩이에 밤나무를 심자 하루빨리 굵은 알밤을 먹고 싶다는 욕심에 물도 주고, 풀도 뽑아주며 정성으로 보살폈다.

 한 해가 가고, 다시 두 해가 갔을 때 밤나무는 제법 많이 컸고, 대나무는 봄이 오는가 싶더니 죽죽 죽순이 뻗어 나왔다. 꺾어다 나물을 해 먹었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어찌나 쭉쭉 자라던지 결국 밤나무를 심었던 곳은 대나무 밭으로 다시 변해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대나무의 번식력을 모르셨던 탓에 애써 밤나무 밭으로 변경하려 한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밤나무는 해를 거듭할수록 대나무에 치여 시들어갔다. 간혹 살아남은 밤나무에서 알밤의 맛을 보긴 했지만 대나무 뿌리의 얽히고설키는 속성에 결국 밤나무는 몇 해 못 버티고 다 죽어 나갔다.

 짙은 녹색의 대나무로 변해가는 대밭을 보고 있자니 기쁘면서도 그 겨울날 힘들여 팠던 밤나무 구덩이 생각에 화가 치밀기도 했다. 또한 탱글탱글한 알밤의 맛이 더 좋았던 나로서는 대나무보다는 밤나무에 힘을 더 실어줬지만 내 바람과는 무관하게 대나무는 폭풍 성장해서 결국 밤나무를 이기는 승부로 끝났다.  

 세월이 흘러 나도 결혼을 하고 그 대나무 밭은 차츰 내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된 친정의 토담집을 허물고 양옥을 짓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플라스틱 제품으로 자리를 잃어가는 대나무 밭은 이제는 쓸모없게 되어 집을 짓는데 그 밭을 팔아 보탠다는 것이었다.

  “엄니, 누구 맘대로 그 대밭을 팔아요잉?  절대 팔지 마라께요!”

  “야, 그럼 집 짓는데 네가 한 푼 보태 줄껴?  죽기 전에 이 에미도 새 집에서 한 번 살아 보고 싶당께.”

하시던 친정어머니 말씀에 화를 내며

  “흐미. 대밭 팔지 마라께. 내가 어렸을 때 고생해서 밤나무 구덩이도 팠는디……. 그냥 헌 집에서 살면 안 되까요잉?”

 간절한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밭은 팔렸다고 했다. 혹여 시집간 딸이 친정 재산에 눈독이나 들인다 싶어 할까 봐 속으로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다. 경제적인 여유만 있었다면 친정집 짓는데 얼마의 돈을 보태어 주고 그 대밭을 지키고 싶었는데 멀리 인천에서 발만 동동거렸다.

 광주 시내의 모 대학 교수가 그 대밭을 사서 유명한 찻집으로 만들고 뒷배경으로 개조해서 짙은 녹색의 매끈한 대나무를 한껏 보여주며 예술이 어떠니 하며 가끔 언론에 나올 때 속으로 많이 울었다.

 내 어린 날의 고생과 애증이 담겨있던 대나무 밭을 내 손으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한참을 슬퍼했다. 지금도 친정에 가면 꼭 그 대나무 밭에 가본다. 이미 남의 땅이지만 어린 날, 내 숨결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 그 대나무 밭을 되찾아 오고 싶다. 아버지와 내가 정성과 땀을 쏟았던 곳. 내 소녀시절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라서. 주인이 바뀌었어도 대나무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내가 팠던 구덩이는 흔적도 없이. 짙푸른 녹색의 키다리 대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서 서로 키재기를 하며 뽐내고 있다.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아무리 큰 불도저가 와서 땅을 뒤엎는다 해도 다시 대 뿌리는 뻗고 뻗어 봄이면 훌쩍 자라서 죽순으로 돋아날 것이다. 성긴 마디마디 만들어 매일매일 성장하여 대쪽 같은 성품으로 커 나갈 것이다.

 아직도 내 고향 담양에는 휘어질망정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가 쭉쭉 뻗어 고향 하늘을 지키고 있다. 이제 내 나이 오십을 넘기고 보니 그 지긋지긋하던 농촌 생활이 다시 그리워진다. 대나무 밭, 구덩이 파는 일도 쉬엄쉬엄 즐겁게 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남편의 정년이 얼마 안 남았으니 퇴직하면 내 고향으로 돌아가 대나무를 키우며 살고 싶다. 소동파가 말한 것처럼 저속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뒤뜰 장독대 옆에서 기다란 대나무를 펼쳐놓고 잘디 잘게 대를 쪼개던 아버지 모습이 간헐적으로 떠오른다. 그곳에 내 남편의 모습을 오버랩시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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