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4월 호 CJ <생활 속의 이야기>에 실린 글
저에게는 마음이 시린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마흔이 훌쩍 지나 검단산 입구에서 만난 그녀는 여리디 여린 가냘픈 몸에 잔주름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짙은 화장으로 그늘진 얼굴을 가리려고 했지만 다른 친구를 통해 그녀의 사정을 들은 터라 더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그 친구는 3년 전 암으로 남편을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보내고,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2학년인 아들들과 지하 셋방에서 사는, 그러나 열심히 사는 친구입니다. 그녀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녀의 밝은 모습은 참 보기 좋았습니다. 늘 헤헤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친구였죠. 고향이 시골이긴 했지만 그녀의 집은 대궐 같았고 넉넉한 살림살이 덕분에 남부러울 것 없었습니다.
그녀와 만나 산에 오르면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야, 너는 공부도 잘했고 집도 넉넉했는데 왜 인문계 안 가고 여상에 갔냐?"
"그게 내 인생을 바꿔버린 계기가 된 것인지도 몰라. 우리 때 반 1, 2등만 여상에 갈 수 있다고 했잖아, 나도 진짜 갈 수 있는지 도전해 보고 싶었어."
그녀가 쏟아내는 말에 저는 그저
"그랬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적성에 맞지 않은 여상에 가서 공부에 흥미를 잃고 전문대에 갔다고 했습니다. 그 후 여행사에 취직을 하고, 같은 직장에서 남편을 만나 사랑을 키우고, 결혼해 아들 둘을 낳고, 남편과 여행사업을 크게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 사태가 그녀를 비켜가지 않았답니다. 빚은 산더미처럼 늘어 작은아이를 등에 업고 광주에서 서울까지 새벽시장에 가서 옷을 떼다 팔았지만, 빚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는군요. 결국 친정집 재산까지 손을 대 말아먹고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다 합니다. 서울에서는 쥐가 나오는 셋방에서 살며 아이를 업고 남의 일을 도와 생계를 꾸렸지만 늘 빚 독촉에 시달려야 했고 남편마저 폐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중·고등학생인 아들들의 학비 마련도 쉽지 않다는군요. 그녀는 꽃집에서 열두 시간 이상 일하지만 수입이 월 백만 원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든든한 아들들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있어 다행입니다.
며칠 전 한파가 몰아친 날 그녀의 큰아들이 다 헤진 장갑을 끼고 학교에 가더랍니다.
"새로 사줄까?"
하며 안쓰러워하는 그녀에게 아들은
"괜찮아요. 안 낀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하며 학교로 향했는데 그 뒷모습에 눈물이 나더랍니다. 지하라서 더 난방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난방비가 무서워 아까다 보니 셋이 나란히 감기에 걸렸다고도 했습니다. 제가 난방비를 준다 해도 받지 않을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할까요? 지하 셋방에서도 세 모자가 힘차게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