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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Aug 13. 2022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우아하게 스며드는 그 감정에 관하여.

박찬욱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

한국 영화감독 중 가장 좋아하는 감독을 뽑으라면 난 항상 주저 없이 박찬욱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선 같은 스릴러를 찍고, 같은 로맨스를 다뤄도 형용하기 힘든 품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2000)>에선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몰입감을 증명해냈고, <복수는 나의 것 (2002)>에서는 흠잡을 때 없는 각본의 탄탄함을 보여줬다. <올드보이 (2003)>에서는 장르 영화는 이렇게 다뤄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고, <친절한 금자씨 (2005)>와 <아가씨 (2016)>에서는 영화에서 미를 다루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그리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2006)>를 넘어 드디어 <박쥐 (2009)>가 이 모든 그의 영화적 장점을 모두 머금고 나타났다.


<박쥐>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2000)>과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 (2001)>와 함께 내가 생각하는 '한국 영화 베스트 3'에 꼭 넣어 말하곤 했다. 영상부터 대사 모든 것이 우아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7월 3일 영등포 CGV에서 <헤어질 결심 (2022)>을 본 뒤 생각했다. '이게 <박쥐>보다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라고. 내가 박찬욱 감독을 좋아하는 모든 이유가 이 영화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봤던 영화를 또 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헤어질 결심>은 내가 유일하게 영화관에서 4번 본 영화가 되었다. 이미 많은 해석이 있고 다양한 리뷰가 존재하는 작품이기에 나는 좀 더 감정에 초점을 맞춰 글을 써보고 싶었다.


<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유일한 데이트

이창동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문학 작품이 통째로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문학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생각하면, 항상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어떻게 표현할까?'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있다고 박찬욱은 이 영화에서 제대로 보여주었다. 옷을 화려하게 입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앞에 모이지만, 그 형형색색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건 칙칙한 색깔을 한 '모나리자'다. 또한, 마냥 무겁지만은 않게, 중간중간 수완과 해준이 이지구를 쫓아가는 추격 장면은 희화화해서, 왜인지 연극을 보는 것 같이 갑작스러운 비장함을, 순간순간 등장인물의 뜬금없는 반응과 박찬욱식 개그는 오히려 작품 수준을 더 높은 곳에 올려다 놓았다.


드러내지 않음의 힘, 과하지 않게 차곡차곡 쌓아둔 감정이 갖는 무게, 다채롭고 다양한 표현 대신 단일한 표현이 전하는 깊이, 수많은 단어 중 심사숙고해 고른 하나의 말은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우아한 품위와 깊이를 만들어냈다. 마침내.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전적이고 우아한.


마주 본 시간보다 서로를 옆에서 지켜본 시간이 더 많았을 해준과 서래

<헤어질 결심>은 어쩌면 매우 고전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결혼한 남성이 다른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임을 깨닫는 이야기는 수많은 고전 문학 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적이기 때문에 우아하다. 이는 소위 '막장'을 다루는 드라마는 금방 잊혀갔지만,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1857)>는 아직까지도 위대한 작품으로 회자되는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너무 탄탄해서 부가적인 요인 없이 스스로 빛나는 작품은 이러한 우아함을 뽐낸다. 자극적인 애정 행각도, 부풀릴 법한 극적인 사랑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는 <헤어질 결심>이기에 더욱 품위 있다. 영화에서 흘러간 한 마디처럼 현대에서 품위 있는 고전을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살다 보니까 도덕을 얘기하긴 쉬어요. 그런데 남한테 강요하거나 자기가 내세우는 도덕보다 좀 더 겸손한 의미에서, 교훈을 뺀, 누가 뭐래도 자기만의 기준이 있고 어떤 꼴을 당해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내 품위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박찬욱

서래의 언어: 우리의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중국인 여성, 서래

서래가 외국인이라는 점은 <헤어질 결심>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었다. 해준은 자신의 완벽했던 수사가 서래의 팜므파탈에 놀아났다 생각하고, 그녀를 멀리하기로 한다. 여기에 서래는 "우리의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라 답한다. 무언가 조금씩 이상한 말들이 계속된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단어의 선택이나 이를 이어주는 기능적인 용어들이 표준 한국어와는 이질적이기에 해준과 보는 이들은 오히려 그녀의 말에 더 귀 기울이게 된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는 평범한 말에 '우리의 일'이라는 말이 붙자 갑자기 이 둘의 관계가 더 깊어 보이는 것이다.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요." 서래는 왜 계속해서 폭력적인 남자를 만나냐는 해준의 말에 이렇게 답한다. '헤어질 결심'. 연인 사이에서 어쩌면 흔하게 쓰는 말인 '헤어짐'에 무언가 큰 결정을 내리는 듯한 '결심'이라는 말의 조합은 다시 한번 서래가 해준에 대해 느끼던 감정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를 색다르게 말해준다. 서래는 TV 속 사극 드라마를 통해 한국어를 공부해왔기 때문에 이러한 격조 있는 말들을 쓴다. '단일한' 혹은 '마침내'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습득한 단어들을 자신이 표현하고 설명하고 싶은 때에 사용하기 위해 머릿속에 열심히 저장해둔다. 해준이 떠난 후 사전에서 '[붕괴] 무너지고 깨어짐'을 찾아 기억하던 것처럼 말이다.


서래가 힘겹게 고르고 고른 그 단어들은 고요해 보이는 이 둘의 상황에 매번 큰 돌을 던진다. 그리고 돌을 맞은 해준 마음속의 물은 그 파장이 계속해서 울리고 또 울린다.


사랑이라는 말 없이도, 사랑. 더 깊고 무거운.


담담하기에 누구보다 컸던 둘의 사랑

해준은 서래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 적 없지만 그건 사랑한다고 한 거였다. 서래는 끝을 향해 갈 때 해준과의 통화에서 "당신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하는..."이라고 말하고, 해준은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답답해한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었다. 굳이 말로 내뱉지 않아도, 과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몸부림치지 않아도 둘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절제될 대로 절제된 감정이 오히려 진실된 마음과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둘은 이미 취조실에서 만난 순간부터 벗어나기 힘든 애정의 굴레로 들어가고 있었다. 초밥을 먹고 난 해준과 서래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부처럼 상을 닦았다. 해준의 아내 정안은 성관계가 사랑을 만들고, 이를 유지시켜준다고 말한다. 해준은 이런 정안과 함께 10년을 넘게 사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해준은 서래와는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둘의 감정선 사이에 이러한 육체적 관계는 끼어들 틈도 없었다. 확실한 건 해준과 서래의 사랑이 더 무겁고 깊은 사랑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준이 서래와의 사랑이 끝났을 때 '붕괴'된 감정을 처음 느끼기 때문이다.


해준과 서래는 왜 이토록 서로에게 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까? 서래는 해준에 관해 친절함과 깔끔함을 언급한다. 그리고 해준은 이 말을 그녀가 까마귀에게 말하던 때의 녹음에서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이 싫지 않았는지 나도 당신이 꼿꼿해서 좋다고 한다. 어떤 풍파에도 정갈함을 유지하는 그런 느낌 말이다. 반대로 서래가 해준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과 상황을 보면 '남자는 여자의 숭배를 원하고, 여자는 남자의 순교를 원한다'라고 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빠지게 된 이유와 순간은 결국 이들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깊이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서히 스며드는 사랑


이들의 품위와 꼿꼿함

해준은 버릇처럼 이 말을 한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눈앞의 마음 아픈 상처를 두고 왜 엉엉 울지 않느냐고 의구심을 갖는 수완에게 그가 했던 말이다. 이건 남편을 잃은 서래를 두고 한 말이었지만, 결국은 그와 서래의 관계를 설명할 말이 되기도 했다. 서래의 그 '꼿꼿함'에 해준은 서서히 서서히 물들어갔다. 흔들리는 자신에 늘 눈에 안약을 넣으며 눈앞의 모든 것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한 해준이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것이 감정과 마음의 힘이다.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지친 해준은 부산을 떠나 이포로 가지만, 그곳은 오히려 흐릿함이 가득한 곳이었다. 불면증까지 더해져 겨우 겨우 앞을 또렷하게 직시하는 해준에게 서래의 등장은 안식처였다. 그는 그녀와 있을 때만 편하게 잠들 수 있으니 말이다.


꼭대기에서 가장 아래로


오래도록 남을 서래의 마지막

해준은 서래에게 수사의 측면에서 끊임없이 이용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포에서의 살인은 서래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해준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래는 남성의 상징과 같이 우뚝 솟은 138층 높이의 사자바위 위에서 남편 기도수를 살해했고, 동시에 이를 수사하는 해준의 추리에 혼선을 가져온다. 또한, 서래는 해준을 높은 산 위로 불러 자신의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을 아래로 뿌려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해준은 이 절벽 끝에서 서래가 자신을 밀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녀의 선택을 가만히 기다리기도 한다. 서래는 고소공포증이 있긴 하지만, 왠지 높은 곳에서는 누구든 본인의 마음대로 그들의 상태를 좌우할 수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는 항상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그녀의 태도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해준의 눈빛과 마음에 무너지는 서래는 그 누구보다도 아래에서 마지막을 준비한다. 자신의 완벽함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 해준의 붕괴를 막아주기 위해서 서래는 자신보다 작은 존재인 동물들을 묻어주던 그 양동이로 자신의 공간을 판다. 자신 때문에 망가진 해준을 돌려놓기 위해 138층 위에 서있던 사람이 지하로 내려간 것이다. 오롯이 사랑만 받는 사람 '피의자'가 되고 싶었던 서래의 마지막은 그래서 더 강렬했다.


낮은 곳에 살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 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낮은 곳으로>

영원히 찾아 헤맬,


바다인 듯 산인 듯

<박쥐> 마지막은 이랬다.  이상 뱀파이어로서 평범한 사람들의 생명을 해칠  없다고 생각한 상현은 태주를 데리고 태양을 맞이함으로써 삶을 끝낸다. 태주는  번이고 저항하지만, 끝내 불가항력적인 끝의 부름에 묵묵히 상현을 따라간다. <헤어질 결심> 서래 또한 해준에게 저항할  없는 파도의 미궁 속으로 그를 끌고 간다. 실종 수배가 내려진 서래를 두고 해준은  한편에 붙은 서래의 사진을 평생 떼어내지도 못한  그녀를 미제 사건 속에서 마주해야  것이다. "오직  생각만 해요."라던 서래의 말은 해준의 안에서 계속해서 울려댈 것이다. 이렇듯 결국은 여운이다.


산에서 마주해 바다에서 끝난 이들의 사랑.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서래처럼, 물을 좋아하던 남겨진 해준은 지혜로운 방법으로 서래 없이 살아가는 것을 찾아낼 것이다. 이들의 사랑은 불륜이지만, 그저 짧고도 깊었던 이들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라는 듯 정안은 이주임과 함께 나타나 그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쥐어주는 듯하다.


그렇기에 서래를 찾으며 파도 사이를 헤매는 해준의 외침은 그간 그가 마음에 담아놓았던 울음을 토해내는 느낌이었다. 다시는 주어 담지 못할 그때의 말과 시간을 물에 흘려보내며 말이다.

이제 추억이 되어 나를 괴롭히는 그 시절은 어찌 그렇듯 행복에 넘쳤을까.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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