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전쟁이 끝나면 동생이 있는 테헤란에 가서 독일 식당을 운영하고 싶어 하는 독일군 코흐 대위에게 페르시아어를 익히겠다는 꿈은 참혹한 현재를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살의 가해자 쪽에 속해 있는 그는 가짜 페르시아어를 배우면서 잠시나마 인간적인 꿈을 꾼다.
생존을 위해 순간적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유대인 질은 코흐 대위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쳐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가 만든 가짜 페르시아어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는 유일한 생존의 성벽이 되고 만다. 실존하지 않는 언어를 매일 4 단어씩 만들어 내고, 그것을 누적하여 모조리 암기까지 해내는 과정은 극한의 공포 속에서 인간의 뇌가 발휘하는 경이로운 생존 의지를 보여준다.
6일간 하루 4개씩 24개, 4주간 96개, 12개월간 1152개, 2년간 총 2304개의 페르시아어를 익히겠다며 희망을 쌓아가는 대위와 가짜 언어를 만들어가며 불안을 쌓고 있는 질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위는 질을 점점 친구처럼 동료처럼 믿음으로 대해주었고, 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짓말과 불안과 함께 대위를 통해 살아남아야 했다.
놀라운 것은 질이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유대인들의 이름을 변형하여 가짜 페르시아 단어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대위는 그 단어들을 페르시아어라고 철석같이 믿고 성실하게 외우면서 수용소에서 죽어 나간 유대인들의 이름을 매일 죽음의 송가처럼 읊조리게 된다. 단어가 축적되고 문장이 만들어지면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둘만이 통하는 언어를 구축해 나간다. 하나의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목도하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악에 속해 있는 믿음과 선에 속해 있는 거짓을 보며 장자의 '도추(道樞)'를 떠올린다. 장자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경계하며, 도의 지도리인 '도추'에 서라고 말한다. 악의 시스템 안에서 선량한 척하는 믿음은 '거짓(위, 僞)'이다. 죽어가는 이들의 이름을 빌려 만든 질의 거짓은 역설적으로 '참됨(진, 眞)'에 가깝다. 이름을 기억하며 존재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악의 시스템 안에서의 믿음은 허상이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피워낸 거짓은 오히려 진실의 꽃이 된다. 영화의 결말이 이것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수행은 나를 닦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선 자리가 타인의 고통 위에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살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안위를 지키느라 애쓰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쓸모없어 보였던 가짜 페르시아어가 영화의 종반부에서 해내는 일을 보며,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음의 쓸모를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는 인간의 얄팍한 시시비비를 비웃는 거대한 우화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