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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전사 Nov 03. 2023

화가의 뒷모습

뒷모습의 역설(Paradox)

화가들은 뒷모습을 그림의 한 표현양식으로 즐겨 그렸다.  서양 미술사에서 네덜란드의 17세기 미술은 종교의 신화에서 일상과 도덕적 경고, 교훈을 담는 방향으로 발전된다. 하지만 일부 화가들은 메시지를 불명확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헤라르트 테르보른호(Gerard ter Borch, 1617-1681)가 대표적이다.  ‘아버지의 충고’라는 제목이 붙은 아래 그림은 잘 차려입은 뒷모습의 여성과 손을 들어 설명하는 남성, 이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술을 마시는 여성이 앉아있다.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는 남성은 다소 격앙된 표정이고 이를 듣는 뒷모습에는 당연히 표정이 없다. 뒷모습이 앞모습을 아주 궁금하게 한다. 뒷모습의 역설(Paradox)이다.


아버지의 충고 (헤라르트 테르보른호(Gerard ter Borch, 1654)

독일 낭만주의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는 뒷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이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떠오르는 태양 앞의 여인(1818)’, ‘창가의 여인(1822)’ 등이 대표적이다. 위의 그림 ‘떠오르는 태양 앞의 여인’은 자신의 나이보다 스무 살 어린 아내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사랑스러운 대상에 대한 화가의 심정이 붓 끝에 실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이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태양빛을 받은 화폭의 뒷모습이 당당함과 자신감을 발산한다. 외롭고 쓸쓸함과는 거리가 멀다. 신 앞에 엎드려 등을 보이며 권력에 복종하는 숭배자들 뒷모습과 대조적이면서도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나이 든 화가가 어린 아내에게 바치는 숭배의 순화된 색채의 선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뒷모습은 보이는 인물의 포즈와 자세, 복장, 주위 배경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보는 이의 심상과 생각공간에 투영된다.

아내의 뒷모습(빌헬름 함메르쇠이)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Vilhelm Hammershøi, 1864~1927)는 아내의 뒷모습을 많이 그렸다. 그는 1864년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1885년에 열린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자신의 여동생을 소재로 한 인물화인 ‘소녀의 초상화’를 출품했다. 1898년부터 1909년까지는 코펜하겐에 작업실을 차리면서 실내 풍경을 소재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실내에 서 있거나 의자에 앉아 짧은 머리에 하얀 목덜미를 드러낸 화가 아내의 뒷모습은 순수함을 보여준다. 화가는 애정을 담아 순도 100%의 아내 그림을 그렸다. 아내는 사진의 대상이 아닌 그림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오랜 시간 같은 자세를 유지해야 했을 것이다. 아내의 인내와 순종을 말한다. 빌헬름 함메르쇠이 뒷모습 그림은 화가의 사랑과 아내의 순종이 만들어 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뒷모습에는 복종, 숭배, 사랑, 순종, 순도 100%의 아름다움, 쓸쓸함, 외로움, 고독 등 셀 수 없는 언어들이 존재한다. 뒷모습에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 보는 사람, 모두를 자극하는 무한 상상의 날개가 있다.

누드모델과 함께 있는 자화상(로라 나이트, 1923)

영국의 인상주의 화가 로라 나이트(Laura Knight, 1877-1970)의 누드모델과 함께 있는 자화상은 숭배, 순종, 복종과는 거리가 있다. 뒷모습을 드러낸 2명의 누드모델과 함께 화폭에 담긴 화가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상반신 뒷모습으로 작품 속에 들어가 있다. 옷을 입은 채 기꺼이 모델과 하나로 묶인 화가는 자신의 뒤쪽을 의식하며 남성들이 자신을 보며 옷 안쪽을 상상할 거라는 걸 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자의 권력을 내려놓고 대상이 되고 있는 모델과 함께한다는 것은 자신을 뽐내려는 것이 아니라 누드의 여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방해하면서 새로운 상상을 추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평면에 대한 상상을 3차원의 상상으로 확장하고 있다.

여인(이중섭, 1942)

화가 이중섭(1916-1956, 평안남도 평원)은 소, 어린이, 가족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중 위 그림은 1942년 연필로 그린 여인 뒷모습이다. 일본인 아내 이남덕(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을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둘의 첫 만남은 여느 청춘 남녀처럼 풋풋했다. 원산에서 일본에 유학 간 부잣집 아들 이중섭은 학교 후배 마사코에게 첫눈에 반했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결혼하지만 1952년 아내 이남덕이 친정아버지 사망을 계기로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그녀와의 이별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이중섭은 헤어지기 10년 전 아내의 뒷모습을 그렸다. 제목도 아내가 아닌 여인으로 한 것도 흥미롭다.

배웅(이이수, 2022)

뒷모습에 대한 화가들의 관심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화가 이이수는 뒷모습만 그린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꾸미거나 연출할 수 없는 뒷모습을 통해 ‘편집 없는 대화’를 나누는 그러한 사람들의 만남,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다.”라고 말한다.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딸로 보이는 여성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고 있다. 저런 포즈는 딸과 무언가 대화와 감정을 나누고 있다는 느낌과 감정을 준다. 실제 말이 오가지 않더라도 딸에게 걸쳐진 어깨가 소통의 통로가 되어 감정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림의 제목이 ‘배웅’이라는 단서에서 떠나는 이를 보내는 아쉬움을 표현하고 그것을 서로 위로하는 감정의 교류를 읽을 수 있다. 만일 저 그림의 앞모습을 그렸다면 관찰자들은 걸쳐진 어깨보다 두 사람의 표정을 읽으려 할 것이다. 그러면 어깨와 팔은 부차적 요소가 되고 만다. 앞모습이 생략된 뒷모습이 오히려 더 이들의 관계와 떠나는 이와의 감정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뒷모습의 놀라운 역설(Paradox)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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