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사물들이 놓였던 자리를 지나왔다. 이제 그것들은 사라지거나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이 지난 탓이다. 가끔 그것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 실수로 깊은 우물 속에 빠뜨린 심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옛 거리를 배회하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재봉틀은 의자에 앉아 발판을 젓는 발틀 재봉틀이었다. 검은 몸체를 휘감은 황금 문양, 발판을 향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철제 다리, 부라더미싱은 뒤늦게 장만한 엄마의 혼수였다. 살뜰히 살림살이를 챙겨줄 친정어머니도 안 계셨지만 그럴 경황도 없었다. 혼담이 오가고 날이 잡히기까지 엄마는 울렁이는 가슴을 몇 번 부여잡은 게 전부였다. 꼭 멀미를 하는 것 같았다.
엄마의 핸드백에서 연애편지가 발각되자 오라비는 마을에 소문이라도 퍼질까 서둘러 남자 집에 먼저 혼담을 넣었다.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지만…'으로 시작되는 편지를 몰래 넣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지만 오라비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엄마도 몰랐으니까. 친구들이 모인 밤, 거므스레하고 두툼한 입술로 ‘솔 솔 솔 오솔길에 빨간 구두 아가씨’를 부르던 청년을 떠올릴 새도 없었다. 그가 가까스로 음정을 찾아가는 동안 엄마는 자신의 검은 구두를 떠올렸을 뿐이다. 발등에 끈이 있고 코가 둥근 여학생 구두를 신은 것이 왠지 촌스럽게 느껴졌다.
혼담이 아버지에게 간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엄마에게 반한 아버지가 친척 아주머니를 졸라댔던 것이다. 친척 아주머니는 연애편지 사달이 나자 오라비 귀에 슬쩍 아버지의 이름을 흘린 게 전부였다.
오라비의 여동생 사랑은 유난했다.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고 새어머니 아래서 자랐던 남매였다. 오라비는 쌀 두 섬을 지고 재를 두 개나 넘어 장터에 가서 원피스를 사다 입혔다. 버선도 못 신는 아이들이 흔했던 시절, 원피스를 입고 다녔던 엄마는 인근에서 단연 돋보였다. 애지중지 돌봤던 동생을 반 강제로 보내다시피 했으니, 오라비 마음도 오죽했겠나 싶다.
엄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면사포를 썼다. 화장대도 없이 장롱 한 짝에 이부자리만 겨우 갖춰 서울에 있다는 시집으로 들어갔다. 며느리의 단출한 혼수를 맞은 시어머니나, 시어머니의 빈한한 살림살이를 마주한 며느리나 서로 민망한 대면이었다. 중매쟁이가 장차 사돈 될 이가 소문난 알부자라고 양쪽 집을 오가며 바람을 넣은 건 나중에야 알았다. 얼마 뒤 엄마는 가지고 있던 돈을 헐어 부라더미싱을 월부로 들였다. 그제야 조금은 떳떳할 수 있었다.
엄마가 결혼한 1960년대 후반은 무려 20여 종류의 국산 재봉틀이 생산되던 시절이었다. 일제 부품을 조립해 ‘드레스 미싱’과 ‘다이얼 미싱’ 등을 만들었다. 재봉틀 수리비용이 1만 원가량, 섬유공장 직원 월급이 2만 원이었으니 재봉틀은 큰 맘먹지 않으면 마련하기 어려운 살림살이였다. 일제 부라더미싱은 국산 재봉틀보다 훨씬 더 비쌌다.
할머니는 부라더미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의 친할머니는 아들 둘을 홀로 키워낸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한국 전쟁 일어나기 한참 전 돌아가셨다. 이웃 잔치에 불려 갔다 토끼 고기를 대접받고는 급체해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홀로 남은 할머니는 전쟁 통에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한강 다리를 건넜고, 전쟁이 끝난 후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살림살이가 변변할 리 없었다. 식구 수대로 밥그릇 국그릇, 냄비 하나, 솥 하나가 전부였다.
며느리가 들여온 재봉틀은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라더미싱은 어울리지 않은 자리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낡은 한옥 마루에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부라더미싱이 어머니의 시집살이까지 순탄하게 만들어주진 않았다. 매운 시어머니 아래서 내리 아이 셋을 낳고 시동생까지 장가를 보냈다. 그러느라고, 실만 꿸 줄 알면 반은 다 된 거라는 재봉질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재봉틀 앞에 제대로 앉아보지 못한 것은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들 둘이 장성했는데도 할머니는 평생을 그랬던 것처럼 집안일, 바깥일 할 것 없이 한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의 재봉틀이 마루 한구석에서 조용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동안 아버지의 불도저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를 닦았다. 건설경기에 한창 불이 붙던 때였다. 청계천 작업장에서 해를 못 본 청춘들의 얼굴이 파리하게 바래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어린 시다들이 일하던 좁은 작업장에서 미싱은 잘도 돌았다.
낡은 한옥에서 말끔한 양옥으로 이사 간 날, 엄마는 제일 먼저 거실 한가운데 재봉틀 자리를 마련했다. 이제야말로 재봉틀 앞에 앉아 우아하게 발판을 저으며 앞치마나 식탁보를 만들어볼 차례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유지인이나 정윤희가 재봉틀 앞에 앉아 한가로이 발판을 젓는 모습은 강물에 노를 저어 가는 뱃놀이와 다르지 않게 보였다. 드디어 널찍한 거실이 생겼으니 이제 재봉틀 앞에 앉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엄마는 마른 수건에 낙화생 기름을 발라 정성껏 재봉틀에 윤을 냈다. 윗실 조절기와 실채기를 거쳐 어찌어찌 바늘까지 실을 꿰긴 했지만 발틀을 움직이는 순간 번번이 실이 끊겼다. 그러기를 수십 번, 엄마는 한 땀도 박지 못한 채 재봉틀에서 손을 뗐다. 다음번엔 기어이 해내리라, 다짐하면서. 하지만 그 재봉틀은 끝내 엄마의 강가로 노 저어 가지 못했다. 이사 간 지 삼일 만에 불이 난 것이다. 엄마와 할머니는 충격에서 기어 나와 재만 남은 집터를 뒤졌다. 간신히 건져낸 살림살이 중엔 부라더미싱도 있었다.
불은 세를 준 문간방에서 시작됐지만 보상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새 집을 짓느라 불도저를 팔았다. 그리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작은 슈퍼를 인수해 부부가 함께 매달렸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엄마가 다시 재봉틀 앞에 앉게 된 것은 십여 년 뒤였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랐고 집안 살림에도 여유가 생겨 더 이상 슈퍼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 엄마는 이번에도 실을 제대로 꿰지 못했다. 고장난 게 아닌가 싶어 수리점에 가져다줬지만 멀쩡하다는 소리만 들었다. 수리 기사는 엉뚱하게도 재봉틀의 발판을 떼고 손잡이를 돌리는 손재봉틀로 개조하라고 권했다. 신형 재봉틀은 전부 그렇게 나온다는 거였다. 엄마는 뭐라도 바꿔야 했다. 한 땀이라도 제대로 박고 싶었으니까.
재봉틀은 말쑥한 상자에 담겨 집으로 배달됐다.설레는 마음으로 수리점에서 배운 대로 재봉틀에 실을 꿰었다. 이번에도 실은 맥없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실을 거는 방향이나 순서를 잘 못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뭔가 잘 못 됐는데, 어디서부터 뭐가 잘 못 된 것인지를 모르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재봉틀 앞에서 몇 번 더 서성였을 뿐인데 시간은 훌쩍 지났다.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몇 해 지나지 않아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자식들도 모두 분가하고 어머니는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여전히, 거실 한쪽에는 미련처럼 부라더미싱이 놓여있다.
엄마가 그 세월을 살아내는 동안 청계천의 미싱 시다들도 하나 둘 사라졌다. 지금은 창신동으로 들어가 그 골목의 주인이 됐다고들 한다. 동대문에서 팔리는 옷 대부분이 창신동에서 만들어진다. 그곳에는 아직도 재봉틀이 돈다. 엄마가 한 땀도 제대로 박지 못하는 동안 청계천의 미싱도, 엄마의 세월도 잘도 돌아간 것이다.
* <사물이 있던 자리>에 연재된 글은 2014년 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대한 지적공사(현. 한국국토정보공사) <땅과 사람들>에 연재했던 칼럼을 바탕으로 덧붙이거나 수정한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