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사물들이 놓였던 자리를 지나왔다. 이제 그것들은 사라지거나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이 지난 탓이다. 가끔 그것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 실수로 깊은 우물 속에 빠뜨린 심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옛 거리를 배회하는지도 모른다.
대여섯 살부터 열 살 무렵까지 우리 삼 남매는 종종 외갓집에 맡겨졌다. 대가족에 둘러싸여 자란 엄마는 집안 어른들이 손을 보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시집살이에 두 살 터울로 연이어 태어난 아이 셋을 돌보는 일이 고되기도 했을 것이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다른 집에 보내지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재밌는 일이 따글따글 하다느니, 다섯이나 되는 외사촌 오빠들이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느니, 엄마 말에 매번 넘어가 순순히 시외버스에 올랐다.
서울에서 유학 중인 친척 오빠를 따라 버스를 몇 차례 갈아탄 후에야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멀미에 시달리느라 셋 다 기진맥진한 채였다. 양쪽으로 미루나무가 까마득히 솟은 하얀 신작로를 따라 걷다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였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아이들이 막 도착한 서울내기들을 내려다봤다.
느티나무를 지나 왼쪽 길로 접어들면 안채와 사랑채, 뒤채에 널찍한 텃밭까지 딸린 기와집이 나왔다. 외갓집이었다. 외갓집 마당은 풀포기 하나 없이 한 방향으로 말끔히 비질돼 있었다. 싸리빗자루 지난 자리가 소낙비 그은 것처럼 남았다. 외할아버지 솜씨였다. 외할아버지는 농한기에도 집 안팎을 부지런히 건사했다.
정갈한 마당 가운데 수동펌프가 있었다. 무쇠로 된 둥근 몸체와 긴 손잡이, 기역자로 꺾인 토출구가 달린 수동펌프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펌프 옆 놋대야엔 으레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준비돼 있었다. 물종지에 마중물을 붓고 빠르게 펌프질 하면 크륵크륵 공기압 차는 소리가 들리고 곧 지하수가 쏟아졌다.
외발로 늠름하게 선 수동 펌프를 마주하면 그제야 나는 지루하고 고단한 여정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야만 한다는 막막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다섯 오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과는 달리 우리를 맞아 주는 사람은 막내 오빠뿐이었다. 첫째 오빠는 서울로 유학 가 아예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고등학생인 둘째 오빠는 동이 트자마자 깔끔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셋째 오빠와 넷째 오빠는 한창 친구들과 쏘다닐 나이였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외숙모, 막내 외삼촌은 농사일과 집안일에 바빴으니 우리와 놀아줄 사람은 막내 오빠뿐이었다.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막내 오빠는 불쏘시개를 들고 신발에 불을 붙인다며 부러 우리를 쫓아다녔다. 애들 땅따먹기 놀이에 애써 우리를 끼워주기도 했다. 간혹 외할아버지가 쌈짓돈을 내주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구멍가게로 데려간 것도 막내 오빠였다.
낮 동안 그렇게 쏘다니고도 새벽녘이면 나는 어김없이 눈을 떴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누군가 놋대야로 맹렬하게 쏟아지는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둘째 오빠였다. 방학 중에도 오빠는 동트기 전 집을 나섰다.
나는 언젠가 둘째 오빠가 큰 오빠를 따라 도시로 갈 것이라 여겼다. 늘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셋째와 넷째, 막내 오빠들과는 달랐다. 어딘가 날이 서 있고 홀로 몰입해 파고드는 데가 있었다. 집안의 기대를 안고 어릴 적 집을 떠난 장남과는 달리 둘째 오빠는 고등학생이 되도록 아직 집을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 오빠는 새벽마다 악착같이 집을 나서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은 쿠르륵 푸, 쿠르륵 푸푸... 공기가 맥없이 빠지는 소리가 계속됐다. 겨울이었다. 파이프가 얼어 제대로 펌프질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이 나오지 않으면 다른 수가 없는지 오빠는 펌프 손잡이를 쉬지 않고 콱콱 눌러댔다. 잠은 이미 달아나버렸다. 저러다 언제 지하수가 솟구칠지 몰라 괜스레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오빠는 부엌을 몇 번이나 오가며 마중물을 붓고 작두처럼 생긴 손잡이를 허공에 저었다. 어두컴컴한 마당에서 손잡이에 무게 중심을 얹고 널을 뛰듯 사뿐사뿐 두 발로 땅을 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꽝꽝 언 파이프를 뚫고 물은 좀처럼 터져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잠을 깼을 땐 해는 중천에 떴고 그날도 집에는 막내 오빠뿐이었다. 막내 오빠는 썰매를 들고 우릴 강으로 데려갔다. 썰매는 우리에게 넘겨주고 오빠는 스케이트를 신었다. 그리곤 순식간에 강 하구 쪽으로 사라졌다.
언니와 남동생은 썰매를 제법 잘 지쳤지만 나는 뒤뚱거리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다 살얼음이 껴있는 강 한복판까지 갔다. 하필 그때 왜 그게 궁금했는지 모를 일이다.
살얼음 위에 한 발만 살짝 올려놓으면 어떻게 될까.
얼음이 꺼지고 나는 뿌그르르 강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물풀들이 머리 위로 산발처럼 흩어졌다. 강바닥에서 뿌연 진흙이 피어올랐다. 어푸, 어푸, 몇 차롄가 물 위로 솟아올랐다. 얼음장 위로 혼비백산한 막내 오빠가 바람처럼 날아오는 게 보였다.
밤새 고열에 시달렸다. 화장실에 갈 수 없어 방에 요강을 갖다 놓았지만 거기까지 기어갈 힘도 없었다. 막내 오빠가 요강까지 업어다 줬다. 온돌방엔 군불을 사정없이 때서 뜨끈하다 못해 뜨거웠다. 무거운 솜이불까지 덮고 나는 땀을 뻘뻘 흘렸다.
그날 밤 꿈속을 휘저은 것은 수동 펌프에서 얼음 알갱이처럼 쏟아져 나오는 물보라였다. 펄펄 끓는 이마 위로 차디 찬 물줄기가 흠뻑 쏟아지길 꿈에서도 간절히 바랐다.
이튿날 엄마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혼곤한 잠에서 빠져나오듯 나는 막내 오빠에게 업혀 외갓집을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외갓집을 찾았을 땐 결혼하고 아이도 낳은 후였다. 반질반질 윤나던 대청마루는 거친 결을 드러냈고 사랑채와 뒤채는 쓰는 사람이 없어 괴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담장을 따라 다복이 올라왔던 쑥이며 달래며 갖가지 나물들은 흔적도 없었다. 외숙모도 돌아가시고 외삼촌 혼자 남아 계셨다. 오빠들도 하나 둘 집을 떠난 지 오래였다.
마당의 수동펌프는 그대로였다. 붉은 녹을 뒤집어쓴 채 무쇠 팔을 잔뜩 움츠리고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늘 마중물을 담아 놓던 놋대야는 사라지고 없었다.
* <사물이 있던 자리>에 연재된 글은 2014년 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대한 지적공사(현. 한국국토정보공사) <땅과 사람들>에 연재했던 칼럼을 바탕으로 덧붙이거나 수정한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