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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Nov 08. 2021

타이밍


부모가 자식에게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것들이 있다. 공부에는 시기가 있다거나 삼시 세 끼를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것들. 지금까지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지만 나름의 의미는 알 수 있게 됐다. 바로 모든 일에는 그에 걸맞은 가 있다는 것.


나는 사랑을 말할 때 표현을 달리 한다. 사랑에서 만큼은 앞서 말한 ‘때’보다는 조금 더 짧은,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지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다기보다는 조금 더 무형적인 것. 출근길 혼잡한 시간대의 지하철 문이 닫히고 있는 그때, 가까스로 지하철 안으로 몸을 던지는 그 정도의 짧은 시간. 아니 순간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만약 그 짧은 시간을 놓쳐서 지하철에 오르지 못한다면 지각은 정해진 사실이 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해봐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각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어쩔 수 있겠는가,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을. 마음과 몸의 괴리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느릿한 편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외출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도,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시간도, 밥을 먹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과연 얼마나 느릴까 궁금해할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하자면, 여기 가족과 함께 외출을 하기로 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와 같이 집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제외하고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이미 문 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정도로 느린 사람이다. 가족들에게는 너무 느려서 답답하다는 소리도 종종 듣는다.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급하지도 않은데 왜 서두르냐'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급한 일이 별로 없다. 늦잠을 자서 지각할 때 정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런 성향을 갖고 있는 나이다 보니, 나의 시간을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것보다는 혼자서 생활하는 게 편해졌다.


당연히 불편한 순간들이 있다. 바로 단체생활. 군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한 번은 전시회에서 2주 정도 장기근무를 한 적이 있다. 서른 명도 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아침이면 숙소에서 화장실 전쟁을 하고, 함께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하고, 다 함께 숙소로 돌아오는 그런 근무환경이었다. 대부분 아침식사로는 간단함과 배부름, 이 두 가지를 만족시켜주는 김밥이 준비됐는데, 나에게는 달갑지 않은 음식이었다. 분명 평소에는 부족하다 느껴질 정도로 짧게만 보이는 김밥 한 줄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주했던 김밥 한 줄은 어찌나 길게만 느껴졌었는지 모른다. 밥도 꼭꼭 씹어 삼키는 편인 내가 김밥을 절반쯤 해치웠을 때, 고개를 들어보면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일어나 담배를 피우고 화장실도 다녀온다. 그럴 때마다 짧은 한숨이 내온다. 남은 김밥을 급하게 먹어치워 오전 시간 배고픔을 채울까, 쓰레기통과 내 마음의 여유를 채울까. 나의 선택은 늘 후자였다. 사극 드라마를 보면 왕은 절대 뛰지 않는다고 하던데, 아마 나는 전생에 왕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뛰는 것도 싫어한다. 그렇다고 게으르다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여유를 갖는 마음과 생활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의 빨리빨리 문화와는 상당히 맞지 않기 때문에 불편을 겪어야 하는 상황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나도 빨라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아주 느린 속도로 상대방을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가면서 시작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나의 사랑은 어느새 시작돼 있는 것이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한번 빠지면 지독하리 만큼 저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가 나온다. 학창 시절에는 이런 사랑의 방식이 연예인에게도 향했었는데, 고등학교에 다닐 땐 전교생이 나를 누군가의 팬으로 알 정도로 열렬했었다. 짧지만 아주 깊은 나의 사랑방식은 기억을 조금 더 넘어 나의 첫사랑에서도 그랬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던 과거의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고백 같은 건 할 생각도 엄두도 못 냈다. 그런 나에게 지금은 첫사랑이 된 예쁘고 인기 있던 아이가 먼저 다가와주었다. 그때의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물론,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는 미숙한 때였다. 당시 반에서는 나름 인기 있던 남자아이가 나의 첫사랑에게 공개적으로 구애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한없이 작아졌었다. 첫사랑의 고백에 응해 사귄다고 한들 부끄러워서 친구들에게 말도 못 하는 건 당연지사였고 인기 있던 남자아이보다 더 잘난 사랑을 할 자신도 없었다. 이 정도로 작은 나를 이끌어줬던 건 첫사랑이었다. 그렇게 반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하는 조용한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봤다. 세상이 핑크빛이고 두근거리고 떨림에 손도 잡을 수 없던 순수함의 시절. 그다지 길게 가지 못했던 시간이었지만 그 추억들로 오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사랑을 위해서는 나를 조금 더 드러내야 한다는 것. 나를 숨기고서는 그 무엇도 시작할 수 없다. 사랑은 들켜야 시작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것이다. 그 시작의 순간은 세상에 있는 어떤 단어를 가져다 붙여놓아도 표현하기 어려운, 두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특별한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달큼한 공기가 내 주변을 감싸는 순간, 그때가 바로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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