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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로빈 Jan 12. 2021

1개월, 이별

반려견을 떠나보낸 사람의 어떤 한 달

  반려견 삼순을 떠나보낸 한 사람으로서의 한 달을 이야기해보자면, 나의 한 달은 정말이지 양가적이었다. 삼순이 떠난 사실을 열심히 잊고 또 극복하려고 함과 동시에, 그의 자취가 나의 머릿속으로부터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로웠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섰을 때 슬그머니 나를 보러 마중 나오던 발소리, 쿰쿰한 체취, 축축한 코의 촉감, 킁킁거리는 소리와 파르르, 몸을 털어 털을 한껏 날려대는 소리.. 그 덩치를 품에 안아 올렸을 때 내 팔에 들어가는 힘과 그 무게감, 겁이 어찌나 많은지 어딘가 안고서 이동할 때면 달달달 떨었던 그 몸의 진동과 눈가에 촉촉하게 고인 눈물..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다 못해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실제로 손에 닿을 듯하게 익숙한데. 그 모든 존재감을, 그 모든 실존의 흔적들을 나의 모든 감각들이 '아직 있다'라고 하는데 나는 애써서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나도 알고 있다. 삼순은 스스로의 죽음을 인지하지조차 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고 해서 그가 나의 마음을 인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가 간 곳은 사후세계 따위가 아니라 정말 영영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영역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사실이 어떤 것인지, 나는 정말 정말 잘 안다. 하지만 욕망이란 것이 다 그런 게 아니던가.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을 갈망하고 원하는 감정. 상실한 것에 대한 회복을 원하는 감정.. 나는 지난 한 달 사이에 내 곁에서 갑자기 구멍이 뚫리듯 사라져 버린 삼순이라는 파편을 계속 욕망하고, 그 욕망을 자제하는 것을 반복했을 따름이었다.



   한 달 사이에 내가 확신한 것이 하나 있다. 삼순은 결코 잊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공백은 다른 것으로 잠시 가려지거나, 덮이거나, 또는 일부가 채워지는 식으로 보완이 될 수는 있을 것이나, 그 흔적이 완전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확신은 제시할 수 있는 근거랄 것은 없었지만 말 그래도 '확실함에 가까운 감정적인 판단'으로서의 확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삼순은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실존한다면 나의 기억도 실존하는 것이고, 나의 기억 속에서는 삼순의 실존은 사라지지 않고 나와 함께 실존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희미해지거나 일부분은 부정확해질 수 있어도 그럼에도 삼순이라는 거대한 실존의 흔적은 영원하다. 따라서 죽음은 기억을 통해 일정 부분 무효화될 수 있다. '그댄 나를 떠났지만 난 그댈 보낸 적 없죠'라는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또 한 가지. 나라는 사람은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쌓아온 텍스트성-기억, 지인들로부터의 영향, 학습된 정보, 가치관, 윤리의식-의 총체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텍스트성 속에도 삼순과 삼순으로부터의 영향력이 있었다. 삼순의 본체는 죽어 없어졌지만, 그가 나와 살아온 세월은 텍스트가 되어 나의 안에 쌓였고, 결국 내가 되었다. 그의 죽음마저도 나에게는 텍스트가 되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삼순은 내가 되었다. 내 안에서 계속 나로서 살아가는 데에, 지층의 밑 면처럼 삼순은 계속 나의 일부로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솔직히 아직 괴롭다. 아직도 삼순과 관련된 악몽을 꾸고 일어나서도, 그저 삼순이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에 감사해서 눈물을 흘린다. 아직도 일을 하다 종종 하늘을 보며 삼순에게 내가 그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직도 삼순이 잠을 자던 엄마 방을 들어서지 못한다. 아직도 화장실 문을 빼꼼 열어두고 나온다. 아직도 눈 두 덩이에 갈색 얼룩이 있는 강아지를 보면 정신이 흐려지게 슬퍼진다. 방치했던 필름 카메라에 담긴 필름 속에 혹시나 아직 삼순의 사진이 있을까 싶어서 미친 듯이 추운 겨울 거리를 아무렇게나 찍기도 했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을 멋대로 동정하기도 했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찰나 같은 한 때인지에 대해서 어쩐지 냉소적인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시간에 삼순이 나의 곁에 없었다. 그 한 달 내내 말이다. 



  여전히 보고 싶다. '보고 싶다'라는 말이 지닌 무기력함에 치가 떨릴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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