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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내리는 눈에 근심을 담아

by 우인

가끔은 별 것도 아닌 일에 불꽃 튀듯 마음의 동기가 튀어 오르는 때가 있다. 잠시 볼일이 있어 서울 모처에 들렀던 건물에서 나오며, 나는 무수한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을 보았다. 도시는 이미 눈에 뒤덮여 있었다. 회색 아스팔트는 하얗게 지워져 있었고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마저 눈이 내뿜는 백색의 빛에 가려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추워서 그런 것인지 신나서 그런 것인지 저마다 한껏 소리를 지르며 눈밭을 활보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도시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눈 속에 잠겨버린 것이 언제였는지 떠올리는 것조차 까마득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러 가기 위해 두껍게 쌓인 눈을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나는 가슴이 무언가 찌릿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을 관통하는 찌릿함, 마치 조명탄 하나가 가슴속 깊고 어두운 어딘가에서 튀어 올라 불을 밝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끼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 앞이 갑자기 넓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이상한 기분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나의 감정의 불을 밝히는 스위치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우울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어둡고 쌀쌀한 방에서 미역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 나의 감정이다. 하지만 정말 의도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은 곳에서 불쑥 스위치가 나타나 켜질 때가 있다. 스위치가 켜지면 감정의 방이 갑자기 환해지고, 나는 광합성을 하듯 그 빛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활력을 얻는다. 오늘 같은 경우에는 바로 그 눈이 그랬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대설이 이유도 없이 나의 마음을 밝혔다. 쌓인 눈을 밟으며 뽀드득 거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세상을 달리 보았다. 모든 것이 선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볼을 때리는 찬 바람도, 눈에 들어간 눈꽃도, 질척거리는 횡단보도도, 모든 것이 반가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유도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반가워했고, 눈덩이를 잔뜩 머금은 나뭇가지를 귀여워했으며, 녹아버린 눈에 미끄러지는 것마저 신이 났다. 그리고 가장 무엇보다 내가 좋아졌다.



모든 것은 원하는 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가려는 길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날카로운 가시들이 수도 없이 솟아있다. 사람들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었으며, 사랑은 단 한 번도 나의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에 시달린 나는 요즘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던 수준의 권태에 짓눌려 앓아누워있었다. 강력한 무기력감이 만들어낸 사슬은 나의 온몸을 겹겹이 옭아매었고, 나는 그 사슬에 몸부림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눈으로 뒤덮인 길을 오랫동안 밟으며 나는 사슬에서 해방된듯한 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감정의 이유는 굳이 찾으려 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감정을 굳이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의 그 감정을 즐겼다. 집으로 가는 내내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밝게만 보였다. 그것은 흰 눈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눈 앞에 보이는 세상과 동시에 나의 마음도 밝아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쑥 찾아와 나를 밝힌 이 기분이 얼마나 오래 남아있을지는 모른다. 이 기분은 아마 내일 아침을, 혹은 잠자리에 드는 새벽을 넘기지 못하고 꺼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와 다시 우중충한 하루하루를 이어나가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글 이후의 쓰는 글도 원래처럼 다시 눅눅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분이, 혜성 같은 그 기분이 아주 가끔씩 짧고 빠르게 스치는 때마다 나도 아직은 살아있구나 라는 일종의 생기를 느낀다. 언제 어떻게 다시 찾아올지 모르지만 나를 다시 찾아올 때를 기약하며 하루하루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내리는 눈을 보며 생각하였다. 그리고 매 순간 행복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하루하루 찾아오는 아침에 감사하기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오늘 하루만큼은 모두가 내리는 눈에 근심을 담아 같이 내려둘 수 있었던 하루이었기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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