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도 눈이 펑펑 올까요? 왔다!

매거진/ 강원도에 산다는 건

by 곰돌진우

5월에도 눈이 펑펑 올까요?

브런치 첫 글을 준비하며 쓴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리고 발행을 미루고 있는 사이 마법처럼 5월 첫날 눈이 내렸다. 펑펑.


서울 토박이였다가 강원도에 살게 되면서 봄이 되면 눈을 기다린다. 강원도의 봄은 수시로 겨울로 돌아가고 5월까지도 어딘가에서는 눈이 내린다. 내리자마자 봄기운에 금세 사라지는 봄눈, 얇게 쌓였다가 햇살에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봄눈. 그러다 가끔은 몇 년에 한 번씩 기록을 경신하는 함박눈이 펑펑 내려 쌓인다. 새싹이 움틀 무렵 눈사람을 만들고, 벚꽃구경을 하고 함박눈도 맞고, 며칠 전 5월의 문턱에서는 벚꽃마저 다 져버린 계절에 폭설이 내렸다. 순식간에 봄에서 겨울로 거꾸로 시간과 공간이 돌아갔다. 봄이었다가, 겨울이었다가.


<3월의 눈사람>

3월에는 내가 사는 도시에 눈사람이 찾아왔다. 봄의 문턱 첫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나 쉬지 않고 내려 도시 여기저기 많은 눈사람이 생겨났다. 이번 겨울에도 보지 못했는데 반갑다, 눈사람. 이 눈사람은 동해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왔다. '봄이 되면 북동쪽에서 찬 공기가 내려오다가 동해 하늘에서 따뜻해진 공기와 수증기를 만나게 된다. 차고 따뜻한 두 성질이 만나 불안정한 상태의 공기층이 동풍을 타고 육지로 밀려오며 눈구름이 만들어진다. 태백산맥에 부딪혀 넘어가기 위해 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눈구름이 급격하게 발달해 눈이 쏟아져 내린다' 삼월의 폭설은 기압, 동해, 태백산맥의 합작품이다. 수증기를 잔뜩 품은 눈은 잘 뭉쳐져서 눈사람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 공원은 눈에 파묻혀 잔디밭과 달리기 트랙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얀 눈 평원이 되었다. 눈이 그치자 아이들이 눈을 파고 들어가 앉아 소꿉놀이를 하고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가게 앞은 눈도 치울 겸 만들어 놓은 개성 있는 눈사람들이 등장했다. 3월의 도시는 드넓은 눈사람 전시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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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습기가 많은 눈을 '습설'이라 한다. 매서운 추위에서는 주로 습기가 적은 '건설'이 내리고 봄눈은 '습설'이 대부분이다. 가로수 위에 쌓였던 눈덩이가 우산 위로 떨어지는데 두두둑 두두둑 묵직한 게 소리가 요란했다. 눈이 많이도 왔다 했는데 습설이라 무게가 보통 눈의 두배 세배가 된다고 한다. 습설이 무섭게 내려 쌓이니 다음날 뉴스를 보니 비닐하우스도 축사도 무너지고 대포항에 정박해둔 소형어선까지 가라앉았다. '눈이 무거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서울 사람일 때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이런 피해가 있어 걱정이고 또 한편으로는 가뭄이 해소돼서 산불을 예방할 수 있고 제한급수까지 가는 물 부족 걱정도 해결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서울 사람일 때는 오직 교통이 불편하다는 생각만 했는데 강원도 사람이 되니 '강원도의 눈'은 여러 가지로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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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여전히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제설작업이 시작되어 도시가 분주해졌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북유럽 도시 같았던 풍경은 하루뿐이었다. 이미 전날부터 차도는 제설차량이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지만, 나머지 길들은 발목 위로 한참 위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눈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아파트 주변과 도시 작은 길들은 눈삽을 단 중장비가 들어와 눈을 치우고 인도는 공무원들과 군인들이 직접 눈삽을 들고 작업해 토끼길이 났다. 치워져 산처럼 쌓인 눈더미들은 포클레인이 덤프트럭에 옮겨 담아 지정장소에 버려졌다. 3월의 눈이지만 대설경보가 내려 대부분의 학교가 입학식을 연기할 정도였으니 한겨울의 제설작업 수준이었다. 도시는 눈삽과 제설차량 소리로 며칠 내내 시끄러웠다. 드륵드륵 드르륵. 도시는 봄볕에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눈으로 며칠을 훌쩍였다. 지붕마다 쌓아놓은 눈마다 주르륵 주룩.


<4월의 벚꽃, 눈꽃>

"지금 벚꽃 보고 대관령 넘어가는데 눈이 와요"

"하루에 벚꽃 보고 눈 보고 역시 강원도"


이 년 전 벚꽃 피기 시작할 무렵 그냥 틀어놓고 있던 강원도 지역 라디오 사연들이었다. 강원도에 살면서도 지금처럼 강원도의 봄눈을 알지 못할 때였다. 벚꽃과 눈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늦었다. 벌써 오후였고 도착하면 해가 질 것이고 내일이며 눈이 녹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봄눈을 놓치고는 미련인지 집착인지 혹시나 하며 일기예보를 들여다봤다. 눈이 온다면 카메라 들고 즉각 출동이다 하고서. 그래도 '설마'했다. 이미 '벚꽃도 활짝 피었는데 뭔 눈이 오겠어'라며. 그런데 거짓말처럼 눈이 왔다. 펑펑펑 쏟아졌다.


내가 사는 도시는 산간지역에만 대설주의보, 평창으로 가면 대설경보였다. 더 좋은 설경을 찍기 위해 아침 일찍 평창 방향으로 이동했다. 도시는 멀쩡했는데 멀리 보이는 설악산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활짝 핀 벚꽃을 보면서 강릉을 지나 영서지역으로 넘어가니 점점 눈밭으로 변하고 횡계와 진부로 들어서니 동네 전체가 겨울왕국이 되었다. 벚꽃 대신 눈꽃이 활짝 폈다. 오대산 상원사에 도착하니 눈이 내렸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할 사찰 마당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갔다. 눈 쏟아지는 봄날의 산사에서 보낸 고요한 그 시간은 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계절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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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에 녹는다 해도 워낙 많이 쌓여서 다음날도 여전하겠다 싶어 다음날은 사진 출사로 유명한 대관령 양 떼 목장으로 갔다. 그 어느 날 겨울 풍경 그대로였다. 신발에 아이젠을 채우고 발목 위로 한참 올라와 푹푹 빠져가는 눈 속을 헤쳐 언덕 정상에 올랐다. 태백산맥 하나 넘어왔을 뿐인데 한 시간만 나가도 꽃들이 만발한데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서울 사람일 때는 강원도는 다 같은 강원도였는데 강원도 사람이 되니 영동과 영서가 다르고, 곳곳이 너무나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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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벚꽃 질 무렵 남아있는 꽃 사진을 찍다 보니 아직도 산봉우리에 잔설이 남아있었다. 아차, 싶었다. 4월의 눈이라면 꽃과 함께 눈을 찍었어야 했는데 너무 눈이 많이 와서 눈으로 다 덮인 곳에서 사진을 찍었으니 겨울 풍경과 다를 게 없었다. 뒤늦은 후회와 미련, 집착으로 그날은 남아있는 벚꽃과 산봉우리 잔설을 찾아 도시를 헤맸다. 눈은 녹고 꽃은 지고.

그 봄 이후에 벚꽃 필 무렵엔 눈을 기다린다. 이제는 벚꽃과 설산을 함께 찍을 수 있는 곳도 잘 알고 있는데

지난해도 그냥 가고 올해도 그냥 가버렸다.


<5월의 눈>

브런치 첫 글 발행을 준비할 때 3월의 눈이 펑펑 내렸다. 쓰던 글 대신에 강원도의 봄눈, 3월에 대해 쓰고 싶어 졌다. 그러다 3월이 가고 너무 늦었나 싶어 4월의 눈에 대해 썼다. 미뤄두고 있다가 또 4월이 갔다. 더 늦으면 안 되지 싶어 '5월에 눈이 올까요?'라는 말을 덧붙여 수정했다. 눈이 오는지도 모르고 원고와 씨름하던 그 시간에 강원도 산지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질 만큼 밤새 눈이 쏟아졌고 운 좋게도 그 근처에 놀러 갔던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 5월의 눈 풍경을 보면서 깨어났다. 발왕산 케이블카는 정상의 엄청난 눈 풍경을 보려는 사람들로 줄을 길게 섰고 설악산 입구는 봄철 입산금지 구역이었던 눈 쌓인 대청봉을 멀리서나마 보려던 차량들로 정체되었다고 했다. 가장 많이 내린 구룡령 옛길은 적설량 18.5 센티미터를 기록했다. 이번 눈은 이십이 년 만에 내린 5월의 대설특보였다. 대관령에는 삼십사 년 만에 5월의 눈이 내렸다. 대관령에 사는 스무 살의 썸 타던 남자와 여자가 '우리 다시 5월의 눈 올 때 만나자' 했다면 오십사 세의 중년이 되어 만났을 것이다.


4월의 마지막 날에 대청봉에 이미 눈이 쌓였다는 기사를 봤는데 설마 5월에 눈이 올까? 싶어 계속 챙겨보지 않았다. 다음날 종일 비가 내려 다 녹았겠지 했는데 날씨가 쌀쌀하여 산 정상에서는 눈이 또다시 내렸던 것이다. 눈이 그친 아침부터는 햇살이 강하고 기온이 빠르게 올라가 눈이 금세 녹기 시작했다. 5월의 눈은 진득하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운 좋게도 그때 그 장소에게 있게 된 사람들과 일찍 그곳을 찾아가는 아주 많이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5월의 눈을 놓쳤다. 골든타임을 놓치고 그날 밤이 되어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


5월이 가기 전에 또 한 번 눈이 올까? 오월의 가장 늦은 눈은 사십 년 전인 1981년 5월 17일이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강원도의 봄눈은 늘 내 고정관념을 깨 줬으니 이제는 설마, 설마 하지 않고 혹시나 하면서 기다릴 것이다.


이 봄 5월에 또 눈이 펑펑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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