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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Sep 23. 2022

4차 십자군의 점령, 니케아의 영웅

(2)시대적 배경: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동로마)

지난 편

영웅의 손자, 반항의 씨앗


2-3일에 한편씩 연재하겠습니다.

총 11편을 계획했으니...3주면 다 연재하겠네요.




1204년 비잔티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같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서, '인간세계의 눈', '지구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불을 지르며 시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1187년의 살라딘이 덜 잔인했다고, 이교도가 차라리 나았다고 지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가 태어나기 17년(또는 18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테오도로스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지만, 그가 이 사건을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사건을 '침략(halosis)'이라 부르며 훗날 콘스탄티노플 수복 전쟁을 치를 때, 라틴인을 향한 복수심을 불태웠지요.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by 외젠 들라크루아)(출처: 위키백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십자군과 그들을 막후에서 조종한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플 지대에 라틴 제국을 세웠습니다. 엔리코는 보두앵을 얼굴마담 격으로 라틴 제국의 황제로 만든 뒤, '로마 제국의 8분의 3을 소유한 영주'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었죠. 고압적인 라틴인들은 비잔티움 시민들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모조리 라틴 식으로 바꾸어버렸고, 시민들은 이러한 굴욕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비잔티움 귀족들은 망명 제국을 세웠는데, 그중 가장 크고 정통성이 있는 곳은 니케아 제국이었습니다. 니케아 제국의 지도자는 테오도로스 1세로, 테오도로스 2세의 외할아버지가 될 사람이었지요(아직 황제가 되지 않았지만, 구분 짓기 위해 '테오도로스 1세', '테오도로스 2세'로 표기하겠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하자 비잔티움 귀족들은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에피로스 공국을 세웠습니다(트레비존드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이사키오스 앙겔로스에 의해 축출당하자 안드로니코스의 손자들이 세운 국가이기에, 십자군 때보다 더 일찍 세우긴 했습니다). 이 중 가장 정통성이 있는 국가(그러니까 가장 '로마'다운 국가?)는 니케아 제국으로, 위치가 콘스탄티노플과 가까웠고 총대주교를 보유하고 있었을뿐더러 테오도로스 1세는 비잔티움의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였기 때문입니다. 테오도로스 1세는 난민들을 끌어들이면서 니케아를 저항의 거점지로 삼았습니다. 훗날 테오도로스 2세는 니케아의 건국의 아버지였던 외할아버지를 '위대한 마음씨, 독수리 같은 위대한 황제'라고 칭송했습니다. 


니케아의 영웅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출처: 위키백과)



테오도로스 1세는 라스카리스 가문 출신으로, 그의 선조가 콤니노스 왕조와 연을 맺었기 때문에 테오도로스 1세는 궁에서 일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자세한 가문 설명은 다음 편에서 하겠습니다). 그는 군인이자 행정관으로 일했는데,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가 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측합니다. 만일 4차 십자군이 원래 목적지였던 이집트로 향했다면, 테오도로스 1세는 황제의 흔한(?) 사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네치아 도제의 농간과 알렉시오스 4세의 뻘짓(?) 덕에 전대미문의 사건을 만들어냈고, 테오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명한 재건자가 되기 위한 도전을 하게 됩니다. 4차 십자군이 수송 문제로 난항을 겪자 이들의 수송을 담당한 베네치아 도제가 도항비를 면제해 주는 조건으로 같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차라를 공격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차라가 원래 베네치아의 땅이었다고 하면서요. 십자군이 차라를 공격하자 화가 난 교황은 십자군과 도제를 파문했고, 십자군 내에는 분열이 생겼습니다.


이때, 비잔티움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눈을 형 알렉시오스 3세가 뽑고, 자신이 황제가 됐습니다. 이사키오스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끌어들였습니다. 내 소원을 들어주면 이집트 정복 비용을 지원하고 자비로 병사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성지 예루살렘에 주둔할 뿐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 교회의 관할로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죠. 알렉시오스 3세는 십자군의 침공에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않았기에, 1203년 알렉시오스 4세의 군대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콘스탄티노플이 코앞에 있는 금각만을 손쉽게 점령했습니다. 알렉시오스 3세는 금과 보석을 챙긴 뒤 몰래 도시를 빠져나갔고, 알렉시오스 4세는 아버지를 복위시킨 뒤 공동황제가 됐습니다. 그런데 비잔티움 역사를 아시는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알렉시오스의 제안은 터무니없었습니다. 큰아버지가 막대한 보물을 챙긴 뒤 떠나버렸기에 국고는 텅 비어버렸죠. 알렉시오스 4세는 빚(?)을 갚기 위해 시민들에게 새로 세금을 부과했고 교회의 금을 녹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교회와 시민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로마 교회에 콘스탄티노플을 바친다는 제안은 아버지 이사키오스마저 경악하게 했죠.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출처: 위키백과). 모든 게 이 인간의 뻘짓으로 시작됐습니다



알렉시오스 4세를 향한 콘스탄티노플의 여론이 악화되자 알렉시오스 무르주풀로스는 이틈에 알렉시오스 4세를 폐위시키고 살해한 뒤 황제가 됐습니다(이사키오스 역시 또 다시 폐위된 뒤 살해당했죠). 알렉시오스 5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과 망루를 보강하면서, 전임 황제의 빚을 갚지 않겠다는 의지를 선보였습니다.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무력으로 정복할 명분을 찾았습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의 약점이 망루가 있는 해안 쪽인 것을 알고 망루를 집중 공격했습니다. 결국 망루가 무너졌고 알렉시오스 5세는 도망을 쳤죠. 두려울 게 없는 십자군은 사흘간 약탈, 학살, 강간을 저질렀습니다. 테오도로스 1세는 알렉시오스 3세가 도망친 뒤 감옥에 갇혀있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하고, 소아시아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테오도로스 1세는 장인이 도망치면서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테오도로스 2세는 훗날 스승에게서 4차 십자군의 내막을 들었습니다. 스승이 앙겔로스 황제들의 궁정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지요. 테오도로스 2세는 변함없는 충성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도자들의 무능이 어떻게 도시를 파탄으로 이끌었는지 명심했습니다(군주가 계속 바뀐다는 건 시민들의 충성심이 오락가락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테오도로스 1세는 미리 소아시아로 탈출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도시를 버리고 도망친 장인을 불신한 그는 장인이 향한 아드리아노플이 아니라, 비티니아의 니케아로 향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사람들에게 비잔티움 후계국의 지도자로 추대됐습니다. 하지만 아직 황제를 칭하지 못했는데, 아직 장인어른이 살아있었고 총대주교를 초청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테오도로스 1세는 소아시아를 횡단하며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갈 곳 없는 난민들을 수용한 뒤 "낙후된 로마의 정신"을 드높여 저항하자고 연설했죠. 그는 자신의 기억력으로 비잔티움의 관직, 정치. 조세, 행정 제도를 모두 복구하고 군대를 재건했습니다(테오도로스 당신의 능력은 대체..). 그리고 1206년에 총대주교를 초청하고 2년 뒤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사실 테오도로스가 니케아의 초대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니케아 주위로 트레비존드, 에피로스 같은 또 다른 비잔티움계 망명 제국들이 기승을 부렸고 라틴 기사들과 한차례 전투를 치렀는데, 군대의 기강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라 니케아측이 대패했거든요. 다행히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이 라틴 제국의 황제 보두앵을 사로잡았고, 보두앵이 불가리아의 수도에서 머지 않아 죽자 테오도로스는 간신히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 덕에 테오도로스는 황제가 될 수 있었죠. 


테오도로스 1세는 총대주교를 선출하고 대관식을 치른 뒤, 세금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전을 새로 발행해 토지세와 부가세를 징수했는데, 추수 직전에 세금 징수관이 농민의 돈을 강탈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금지했습니다. 그는 엘리트 가문들에 세금 징수권과 자원 분배권을 부여하는 대신, 이전 지주들과 교회에게서 경제적 희생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형제들에게 관직을 부여하는 등 족벌 정치를 펼쳤는데, 이는 예전 콤니노스 왕조의 알렉시오스 1세의 정치 방식을 본떠서 가문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니케아 제국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보두앵이 죽은 뒤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된 앙리는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코스루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카이코스루는 니케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고요. 다시 전쟁에 대비하던 테오도로스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자 당황했습니다. 바로 장인어른이자 전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3세였죠. 알렉시오스는 사위에게 날 황제로 대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거부했습니다. 알렉시오스를 황제로 인정하면 테오도로스는 황위를 찬탈한 셈이 되니까요. 그러자 알렉시오스는 술탄 카이코스루의 원정에 합류해 사위를 공격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직접 참전해 술탄의 군대와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술탄과 단독으로 칼싸움을 벌였고, 술탄은 말에 떨어져 죽었습니다(테오도로스 당신의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입니까;;;;). 알렉시오스는 수감되어 사위에 의해 눈이 뽑힌 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테오도로스 1세의 장인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출처: 위키백과)



테오도로스는 쉴 틈이 없었습니다. 술탄을 물리치자 라틴 제국의 앙리가 또다시 쳐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테오도로스의 군대는 이미 힘을 뺀 상태라, 앙리의 군대에게 참패를 당했습니다. 이때 앙리는 트레비존드, 룸 술탄국과 미리 휴전을 맺었기에 니케아 제국은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불가르 군대가 라틴 제국의 후방을 압박하자 앙리의 군대는 더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테오도로스와 앙리는 휴전 조약을 맺고, 앙리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테오도로스는 라틴 제국의 새로운 황제와 협상한 뒤, 앙리의 조카 마리아와 재혼했습니다. 


테오도로스 1세에게 후계자를 정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아들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그는 장녀 이리니 라스카리나의 남편 요안니스 바타치스를 후계자로 선정했습니다. 바타치스는 인품이 좋고 라틴 제국과의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선보였던 인물이었습니다. 1221년 테오도로스 1세가 세상을 떠난 뒤 머지않아 바타치스와 이리니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이번 편의 주인공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입니다. 이렇게 바타치스는 아들을 낳고 후계 구도를 공고히 했지만, 테오도로스 1세의 형제들이 반기를 들면서 바타치스 가족에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죠(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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