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ina Ka Sep 26. 2022

"아버지께서 물고기 대신 뱀을 줄 일이 없을 것이다."

(3)가문, 부모, 유년 시절: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지난 편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135




테오도로스 2세의 외가인 라스카리스 가문이 본격적으로 부각하기 시작한 시대는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1편의 테오도로스 1세 맞습니다)와 그의 형 콘스탄티노스가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두 사람의 아버지는 마누일 라스카리스, 어머니는 요안나 포카이나 카라차이나였고, 조부모, 증조부모 등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라스카리스 가문, 어머니가 콤니노스 방계 가문에 속했고 테오도로스 포함 8형제를 낳았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졌습니다. '라스카리스' 가문의 기원은 단어의 어원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라스카리스'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인 '라슈카리(lashkarī)'나 아랍어인 '알라스카(alašqar)'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059년 이베리아 테마로 추방된 에우스타시오스 부리아스가 '라스카리스'라는 노예를 해방하고 땅을 물려주었다는 기록에서 '라스카리스'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11세기 아르메니아 일부 지역을 다스린 샤다드 왕조라는 이슬람 왕국에서도 등장했습니다. 샤다드 왕조에서 '라슈카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흔했는데, 11세기 중반에 라슈카리 이븐 무사의 아들 아르타시르는 콘스탄티노플의 인질로 보내졌습니다. 아르타시르는 인장을 받았는데, 인장에 '라스카리스의 아들 아르타시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인장을 받았다는 뜻은 관직을 받았다는 것이고, 관직을 이교도에게 주지는 않았기에 아르타시르는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외국인이 가문의 시조였던 경우는 동로마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흔했기에(우리나라에도 있죠. 인씨, 선씨, 서씨 등), 확실한 증거가 없지만 아르타시르를 라스카리스 가문의 시조로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테오도로스 2세의 친가인 바타치스 가문 역시 11세기부터 부각되며 알렉시오스 1세의 콤니노스 가문과 연관이 있습니다.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체스의 기록에 따르면, 1000년 경 바타치스란 인물(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이 가족들과 함께 아드리아노플에서 불가리아 황제에게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 후 몇 세기 동안 바타치스 가문은 아드리아노플과 주변 지역과 연계되어서 산 것으로 보아, '바타치스'를 바타치스 가문의 시조라고 추정합니다. 미하일 프셀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스 9세의 친척인 요안니스 바타치스가 레오 토르니키오스의 반란에 가담했는데, 요안니스 바타치스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바타치스 가문의 일원일 것입니다. 


바타치스 가문은 12세기 콤니노스 왕조의 족벌 정치의 득을 보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테오도로스 바타치스가 황제 마누일 1세 콤니노스의 누이와 결혼했고, 테오도로스 바타치스의 아들들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바실리오스 바타치스가 앙겔로스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면서,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가문의 일원이 됐는데, 바실리오스 바타치스가 바로 요안니스 3세 바타치스의 아버지입니다. 테오도로스 2세의 친할아버지인 셈이죠. 게다가 바실리오스의 아내는 알렉시오스 1세의 증손녀이니, 바타치스는 두 황가인 콤니노스와 앙겔로스의 핏줄을 모두 물려받았습니다. 1192년에 태어난 요안니스 바타치스는 테오도로스 1세의 딸 이리니 라스카리나와 결혼하여 라스카리스 가문의 일원이 됐습니다. 이미 군사적 능력과 인품을 입증받은 그는 장인에게서 황위를 물려받았죠.


테오도로스 2세의 아버지 요안니스 3세 바타치스(출처: 위키백과)



1221년 11월, 니케아 제국의 창건자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도원에서 추도식을 거행한 뒤 사위 바타치스가 황위에 올랐고, 1221년 말(또는 1222년 초)에 바타치스와 이리니는 니케아의 황궁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장인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로스라고 지어주었죠. 훗날 테오도로스 2세는 니케아를 "내가 사랑하는 곳이자 어머니의 품에서 땅으로 떨어지게 한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테오도로스 1세의 형제들은 바타치스가 황제가 되도록 순순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테오도로스의 형제들은 새파랗게 젊은 바타치스가 황제가 된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라틴 제국 황제 로베르에게 도움을 청한 뒤, 그리스인과 라틴인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바타치스는 벌벌 떨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라틴인이 장악한 영토를 기습 진입했고, 1223년 겨울 포이마네논에서 라틴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장인 테오도로스 1세가 라틴 제국 황제 앙리에게 패배했던 장소였지요. 로베르는 충격에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1228년에 죽었고, 반란을 일으킨 형제들은 니케아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리고 바타치스는 소아시아의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1225년 바타치스의 외가쪽 사촌인 네스톤고스 형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한 뒤, 한 명의 손을 절단하고 실명형을 선고했고 한 명은 감금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훗날 감금당한 친척은 탈출해서 룸 술탄국으로 피신합니다. 바타치스가 이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아마 친척들과 온전히 척을 질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바타치스는 조카들을 결혼시켜 반란을 일으킨 친척들의 공백을 메웠습니다. 그리고 포이마네논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용해 라틴 제국의 소아시아 영토들을 점령한 뒤, 라틴 황제에게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또한 에피로스와 전쟁을 벌여 아드리아노플을 탈환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아버지 바타치스가 전쟁에서 승승장구할 때, 황후가 된 어머니 이리니는 말에서 떨어져 아이를 더 이상 낳을 수 없게 됐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슬픔 때문일까요. 이리니는 아들이 13살이 되었는데도 계속 양육에 관여했습니다. 콤니노스, 라스카리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황후로서 그녀는 수도원의 세금 면제를 허용하고 독자적으로 도장을 찍을 수 있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또한 막대한 영지를 상속받았기에 수도원에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 기부를 할 수도 있었죠. 훗날 테오도로스는 시녀, 환관들이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던 안채를 기억했지만, 어머니에 대해 언급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테오도로스가 문학적인 표현을 구사했을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입니다(이리니는 1240년에 죽는데, 이때 테오도로스는 10대 후반이었죠).


이리니 라스카리나의 직인(출처: 위키백과)



아무튼, 황제와 황후의 외동아들이었던 테오도로스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니케아에서 보냈는데, 훗날 그는 부모님이 '모성적인 방식으로 날 키웠다'라고 언급했죠. 대표적으로 테오도로스의 10대 시절, 지도교사가 부모에게 경범죄를 고발했지만, 부모가 눈감아줬다고 테오도로스가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인용하며 "아버지께서는 물고기 대신 뱀을, 달걀 대신 전갈을 줄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만들어졌을 당시 물고기와 달걀이 귀해서 비슷하게 생긴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뱀과 전갈을 주는 일이 있었는데, 테오도로스의 아버지는 자식을 워낙 사랑하니 '진짜 물고기와 달걀을 줄 것이다'라는 뜻이었죠.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후계자를 공동황제로 임명했습니다. 조선 왕조에서 적장자에게 세자 책봉했던 것과 비슷했지요. 1240년 초, 성인이 된 테오도로스는 "나는 왕실의 자식으로서 평범하게 자랐다"라고 말했습니다. 얼핏 보면 겸손한 말 같은데, 10년 후에 "나는 대낮의 빛과 세속적인 계곡에서 태어났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것은 운명이다'라는 식으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사춘기 시절에 공식적인 식전에 참석하고, 아버지를 "주군"이라 부르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심을 드러냈습니다. 테오도로스가 공동황제가 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테오도로스의 인식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공동황제가 되어서 아버지와 같이 나라를 통치했다고 추측합니다. 


테오도로스는 1228년, 즉 6살 무렵부터 초등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초등교사의 가르침 아래, 성경의 본문을 외우고 하루에 세 번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으로 자랐고, 훗날 논문을 집필하거나 과거를 회상할 때 성경의 구절과 예수의 말을 종종 인용하는 것도 이러한 가르침 때문일 듯합니다. 자신의 어머니인 그리스도에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됐다고 할 정도였지요. 또한 어릴 때부터 그리스 신화나 철학에 심취해 그리스의 전쟁의 신 아레스의 존재에도 익숙했다고 합니다. 그는 총대주교의 연설에도 종종 참석했는데, 총대주교는 로마에 대한 애국심을 설파하면서 라틴인에 대한 증오심을 비추기도 했습니다. 테오도로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주위에서 라틴인과 협정을 맺으라고 유혹했는데도 뿌리치고, 콘스탄티노플의 회복에 집착했던 이유도 어린 시절에 받은 교육과 연설 덕택일 것입니다. 


그 외 테오도로스는 어렸을 때(1230-32년) 문법, 시, 수사, 논리, 4중주(초급 수학, 천문학, 기하학, 음악) 등 다방면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이때, 그리스어를 읽고 쓰는 방법도 배웠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대한 일화(대표적으로 트로이 목마)를 편지에서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자부심 강한 '로마 황제'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 그리스 학자이기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테오도로스는 공동황제였습니다. 조만간, 콘스탄티노플 탈환을 위해 아버지처럼 전쟁을 치러야 할 몸이었지요. 주위에는 라틴 제국뿐 아니라 에피로스, 불가리아 등 콘스탄티노플을 호시탐탐 노리는 제국들이 많았습니다. 바타치스가 외교전에 뛰어들기 위해 불가리아와 동맹을 꾀하니, 조만간 테오도로스의 신붓감이 구할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4편에서 계속).


이전 02화 4차 십자군의 점령, 니케아의 영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