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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a Ka Oct 01. 2022

나의 아내, 나의 스승, 소중했던 사람들

(4)결혼, 청년 시절: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동로마)

지난 편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136


블렘미디스도 엘레나도 이반 아센도...다들 삽화가 없네요...

그래서 오늘은 삽화 없이 글로만 진행합니다...ㅠㅠㅠ

(이번주에 일이 있어서 연재가 좀 늦었어요. 앞으로 2-3일 간격으로 올릴게요...ㅎ)




어느덧 테오도로스는 성년이 되었습니다. 1233년, 성년이 된 테오도로스는 두 가지 사건을 맞이하면서 삶이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첫 번째는 결혼 문제였고, 두 번째는 스승 블렘미디스와의 만남이었죠. 테오도로스는 부모님이 선택한 가정교사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가 "성년이 된 내게 열두 살 수준의 교육을 시킨다"라며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가정교사의 이름은 기록하지도 않았습니다. "물고기처럼 말이 없고, 개처럼 뻔뻔하고, 낙타처럼 성질이 나쁘다"라고 혹평을 했지요. 가정교사가 철학이 아닌 왕에게 필요한 "능력"을 가르쳤는데, 학자적인 자질을 갖춘 테오도로스에게 이 점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습니다. 청소년 시절 테오도로스는 수사학 공부를 지속했고, 이때 우화들을 접하면서 풍자 능력(?)을 배운 것으로 추측됩니다.


테오도로스가 싫어하는 가정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을 동안, 아버지 바타치스는 아들의 결혼 문제를 논하고 있었습니다. 라틴 제국은 보두앵이 죽은 뒤 콘스탄티노플만 붙잡고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고, 에피로스도 불가리아에 패배해 몰락했습니다. 마침 불가리아의 차르 이반 아센은 서유럽의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그리스 정교회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니케아의 바타치스는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과 동맹을 꾀했습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불가리아와 연합해,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할 계획이었지요. 동시에 니케아의 총대주교구의 위상도 높이려 했고요. 1232년 후반, 바타치스는 불가리아 측에 사절단을 보내서 아들 테오도로스와 차르의 딸을 약혼시켜 군사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습니다. 차르는 니케아와 화해를 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리고 불가리아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도사를 선출한 뒤, 니케아의 총대주교에게 보냈습니다. 이렇게 불가리아와 니케아는 군사 동맹뿐 아니라 종교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테오도로스와 결혼할 여인은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아센의 딸 엘레나 아세니나로, 두 사람은 1235년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말, 바타치스는 100여 척에 달하는 함대를 소집한 뒤 이반 아센이 이끄는 불가리아 동맹군과 합류했습니다. 이때 니케아와 불가리아 동맹군은 콘스탄티노플의 육로와 해로를 봉쇄했고, 니케아의 총대주교는 불가리아의 수도사를 독립적인 불가리아의 총대주교로 승격시켰습니다. 테오도로스와 엘레나의 결혼식은 람프사코스에서 엄격하게 치러졌는데, 엘레나의 외삼촌인 헝가리의 왕 벨러 4세는 테오도로스의 외숙모인 마리아 라스카리나와 혼인한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테오도로스와 엘레나는 근친혼을 한 셈이었죠. 테오도로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정세는 가족 문제(?)처럼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는 불가리아 교회가 니케아에서 독립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이 라틴인에게 함락되기 전까지(1185년) 불가리아가 동로마 제국의 속국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235년에 결혼할 당시, 테오도로스는 13살, 엘레나는 11살이었습니다. 법적으로 남자는 14살, 여자는 12살부터 혼인할 수 있었으니 법적 결혼 나이보다 한 살씩 어렸죠. 엘레나가 아직 11살이었기에 황후인 이레네는 외국인 소녀의 양육까지 도맡아야 했습니다. 엘레나는 새로운 가족과 소통하기 위해 그리스어를 배우고 그리스 문화를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10대였던 테오도로스와 엘레나는 함께 자라면서 진정한 애정이 싹텄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아내와의 관계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유대"이며 "모든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 "엘레나는 내 청춘의 꽃, 내 마음의 말과 소원이 가득한 곳, 내 영혼의 봄이다."라고 썼죠. 두 사람은 1240년대에 성인이 되어서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고, 1250년대에는 아들 요안니스(훗날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4세)를 낳았습니다.


한편 불가리아와 동맹 맺은 바타치스는 1235년 여름,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던 베네치아 도제가 신속하게 무장 갤리선 25척을 파견해 니케아 해군을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육로와 해로를 봉쇄는 계속됐습니다. 라틴 황제의 봉신이었던 아카이아의 왕자가 선박 120척과 900명의 전사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지원하려고 나서자, 1236년 봄에 포위가 풀렸습니다. 라틴 제국의 황제 보두앵은 자금 조달을 위해 영국, 프랑스 등지로 3년 이상 원정을 떠났고, 이로 인해 자금이 더 부족해져 베네치아에 가시 왕관을 저당 잡히는 신세가 됐죠.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원정에 실패한 니케아와 불가리아는 점차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237년 불가리아 차르는 엘레나를 강제로 불가리아로 데려간 뒤 라틴인과 동맹을 맺고 니케아가 점령한 요새를 공격했습니다. 다행히 마음이 누그러진 차르(변덕스러운 건지 교활한 건지;;;)는 포위를 풀고 엘레나를 다시 니케아로 돌려보냈지만, 배신당한 바타치스는 이반 아센과 거리를 두고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새로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무렵, 테오도로스는 가정교사를 점점 더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가정교사는 미래의 장군이 될 수 있도록 테오도로스에게 군사 훈련과 체력 훈련을 집중시키면서 테오도로스가 너무 철학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철학 연구를 더 하고 싶은 테오도로스 입장에서는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죠. 대신 사냥과 폴로에 집중하면서 승마 능력을 키웠습니다. 아마 선생님의 빡빡한 군사 교육보다 자유로운 사냥과 폴로를 더 좋아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 황제들의 전기와 구약 성서를 읽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싫어하는 공부와 좋아하는 공부를 모두 해야 했던 테오도로스의 인생을 바꿀 사람이 찾아옵니다. 


테오도로스가 수석 가정교사를 부임 받게 되었을 때,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라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난 아크로폴리테스는 함락된 도시가 어떤 곳이었는지 알고 있었고, 라틴어에도 능통했습니다. 바타치스는 아크로폴리테스 외 4명의 청년을 직접 선발하여 테오도로스와 함께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도록 지원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황실에서 근무했던 가문 출신이었으니, 대부분 고위급 자제들이었을 것입니다. 1237년, 그들은 성 베드로 수도원으로 이주한 뒤, 수도원장 니키포로스 블렘미디스의 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황제와 황후는 이들이 교육을 잘 받는지 주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1239년 6월 3일 일식이 일어났을 때, 황제는 아크로폴리테스에게 일식이 일어나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요구했죠.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의 스승 니키포로스 블렘미디스는 1197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의사 집안으로,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소아시아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집안 전통을 따라 1217년부터 7여 년간 의학 공부를 했고, 그의 이름으로 의학 저술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의사로서 훈련받은 후, 철학 공부에 대한 열정을 추구했고 콘스탄티노플에 프로드로모스가 수도사로서 겸손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블렘미디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가 고등 교육을 마친 뒤, 1225년~1232년에 니케아로 건너가서 황실의 서기가 된 뒤 고위급 자제들의 개인 교습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1234년 라틴 수사들과의 논쟁에서 토론 기술을 발휘하니, 황제는 블렘미디스에게 눈길을 주었습니다.


블렘미디스는 자신의 명성을 부담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수도사로서 조용히 살았지요. 다섯 명의 학생들은 주급을 받지 않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테오도로스는 가정교사의 승인도 받지 않고, 블렘미디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의 교육을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날 교육하면 아버지께서 보답을 줄 것이라고 하면서요. 테오도로스는 1238-39년 경에 블렘미디스에게 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블렘미디스는 이러한 제자에 관해 "황제의 아들과 친분이 없는 건 아니고 잘 알려져 있었을 뿐"이라고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남겼습니다. 이후 1241년까지 테오도로스는 블렘미디스의 밑에서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의 사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성한 수학과 신에게서 얻은 영감의 논리, 디오판토스의 산수, 피타고라스의 철학, 클라우디우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이 교육이 계속되기를 바랐고, 가정교사는 블렘미디스를 위대한 철학자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넌지시 부러움을 표했습니다. 


블렘미디스의 가르침을 받은 테오도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강조하고, 그다음 고대 수학자들(유클리드, 피타고라스)과 천문학자(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들을 강조하는 등 철학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습니다. 또한 물리학 같은 것을 공부할 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을 택하고, 저서를 집필할 때 플라톤의 법전의 구절을 종종 인용했는데, 이는 테오도로스가 블렘미디스의 고대 철학과 논리학, 수학 등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고 블렘미디스를 크게 존경한 덕이라고 추측합니다. 블렘미디스는 테오도로스에 관해 자세히 언급한 바는 없었지만, 위 문단에서 언급한 구절을 보면 제자를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블렘미디스는 언제까지나 테오도로스의 스승 노릇을 할 수 없었습니다.  


1240년대 초, 제자들은 블렘미디스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다섯 제자 중 한 명인 로마노스는 스승이 자꾸 비정통적이고 전복적인 글을 썼다고 비난했고, 다른 제자는 스승이 고인이 된 주교의 영지에서 횡령했다고 고발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경쟁자로 여긴 탓이었습니다. 블렘미디스의 횡령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지만, 의혹이 계속 제기됐습니다. 테오도로스는 가정교사가 블렘미디스에게서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타치스는 블렘미디스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지방 당국에서는 블렘미디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블렘미디스가 도서관에서 구할 수 없는 원고를 구하기 위해 발칸반도로 항해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트라키아 총독은 훔친 돈을 밀반입한다는 혐의로 블렘미디스를 구금하기까지 했습니다. 바타치스는 블렘미디스를 계속 믿어주어서 그를 풀어주었지만, 블렘미디스는 속세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니케아로 돌아온 블렘미디스는 다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총대주교와 황제는 블렘미디스에게 소년과 소녀를 위한 교육을 지도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스승이 떠나기를 원치 않았지만 결국 블렘미디스는 떠나버리고 말았죠. 테오도로스는 스승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크로폴리스를 스승으로 택했지만, 1240년대에 블렘미디스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면서 스승에게 그리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블렘미디스의 가르침을 회상하며 어떻게 해야 현명한 군주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철학과 신학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죠. 또한 동료들과 비서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주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훗날 황제가 되어서 죽을 때까지 스승을 존경했던 테오도로스. 하지만 은둔자이자 엄격한 규율주의자였던 스승과 달리, 테오도르스는 자신의 학식을 특유의 유머를 발휘해 살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승과 다른 신학적, 도덕적 관점을 선호하게 되었고, 점차 스승님께 제자로서 보여주었던 모습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됩니다(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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