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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a Ka Oct 06. 2022

넓어지는 니케아, 커져가는 황제의 역할

(5)공동황제 시절: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지난 편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138


어째 바타치스 얘기가 더 많은 것 같은 느낌...




1240년대, 20대가 된 테오도로스는 왕실의 통치에서 점점 더 큰 역할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공동황제로서 원로 황제인 아버지의 일을 재정, 사법, 경영 및 여러 분야에서 분담했는데, 이 무렵 몽골의 침략에 맞서고 영토 확장 등을 하면서 니케아 제국은 도전의 카드를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내적으로도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는 등 변화가 있었지요. 1240년대 초, 황후 이리니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바타치스는 아직 40대 초반이었습니다. 재혼할 상대를 찾아야 했습니다. 당시 바타치스는 소아시아뿐 아니라 발칸 반도의 일부를 지배하면서 유럽 세계에서 한창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반면 라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만 간신히 붙들고 있었지요). 바타치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먼 훗날 감자 대왕으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명이인입니다)와 동맹을 맺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칭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바타치스는 '로마 황제' 타이틀을 달고 있는 신성로마의 프리드리히 2세를 좋게 바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로마 교황'에 대한 적개심으로 뭉쳤습니다. 바타치스는 교황이 라틴 제국의 십자군을 지원했기에 적대했고, 프리드리히는 6차 십자군 출정 문제를 두고 교황과 마찰 빚다가 파문당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니케아의 군인들은 십자군에서 돌아온 프리드리히의 공성전을 지원하고 신성로마의 군인들은 니케아의 이탈리아 공성전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두 황제는 합의했고, 프리드리히는 바타치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는 것을 돕기로 결정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 호엔슈타우펜의 초상화(출처: 위키백과)



1235-36년에 불가리아와 니케아가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벌인 것을 이유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십자군을 모집했습니다. 라틴 제국의 황제 보두앵은 거지처럼 서유럽에 원조를 호소하느라 바빴고, 바타치스는 룸 술탄국을 상대로 트리폴리스 등을 수복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지요. 바타치스는 프리드리히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벌였습니다. 처음에는 효과를 보는 듯했지만, 라틴 제국의 황제가 지원병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면서 많은 그리스 주민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바타치스는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물러나야 했죠(자기나라 백성들이었잖아요...ㅠㅠ). 


그래도 프리드리히와 바타치스의 동맹이 깨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240년 늦여름, 바타치스는 프리드리히의 딸 콘스탄차를 맞이했습니다. 이때, 바타치스는 40대였고, 콘스탄차는 10대 초반이었죠(ㄷㄷㄷ). 두 사람은 니케아로 가서 결혼식을 올렸고, 테오도로스는 이 의식을 보면서 '가정교사를 풍자하는데 쓸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인성 클래스;;;). 콘스탄차는 니케아의 황후가 된 후 그리스 사람들과 더 친근하게 지내기 위해 '안나'로 개명했습니다. 그러나 안나의 황후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254년에 바타치스가 죽는 14년 동안 두 사람은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바타치스가 안나를 멀리하고 안나의 가정교사였던 이탈리아 여인 마르치나를 더 총애했기 때문이었죠. 바타치스는 마르치나에게 황제만이 신을 수 있는 보라색 신발을 신을 권한을 주었고,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지탄했습니다. 대신 외동아들이었던 테오도로스의 '공동황제' 입지는 더 탄탄해졌지요. 


호엔슈타우펜의 안나의 돌무덤(출처: 위키백과)



니케아에서 결혼식을 마친 뒤, 바타치스와 테오도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프루사로 갔습니다. 이때 니케아에 있던 가정교사는 임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테오도로스는 니케아로 향했지만 가정교사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난 그의 죽음에 기뻐했다고, 악어의 눈물을 흘렸다"라고 했지요. 이제 그는 마음껏 철학에 전념하고자 했고, 블렘미디스를 가정교사로 임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블렘미디스는 황제의 요청을 거절했고, 공동황제로서 부담해야 할 테오도로스의 짐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1241년 결혼식이 끝난 뒤 바타치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보두앵 황제와 성벽 방어를 담당한 베네치아가 잘 막은 덕에 공성전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바타치스는 보두앵 2세와 2년 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테오도로스도 아버지와 함께 니케아측의 협상단을 대표했습니다. 테오도로스가 공적인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는 뜻이었죠.


바타치스는 라틴 제국과 평화 협상을 체결한 뒤 에피로스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에피로스의 테오도로스는 결혼을 통해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의 환심을 샀었지요. 그는 클로코트니차 마을을 기습했다가 차르에게 눈이 뽑힌 적이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차르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딸을 차르와 혼인시켰습니다. 이렇게 차르의 장인이 된 후, 그는 테살로니카의 전제군주로 있던 동생 마누일을 쫓아내고 자신의 아들을 군주로 임명했습니다. 마누일은 바타치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바타치스는 에피로스의 테오도로스가 니케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니케아로 초청했습니다. 바타치스는 극진히 대우하다가 에피로스의 테오도로스가 돌아가려고 하자 정중히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렇게 바타치스는 에피로스의 테오도로스를 포로로 붙잡았고, 그가 니케아의 종주권을 인정한 뒤에야(로마 황제 타이틀을 떼라는 뜻이죠. 에피로스의 왕은 황제가 아니라 군주라고 불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풀어주었습니다. 에피로스의 테오도로스는 고국으로 돌아간 뒤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둘째 아들을 테살로니카 군주로 임명했습니다.


1241년,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이 죽고 그의 미성년자 아들 칼리만이 차르가 되었습니다. 바타치스가 육해군을 동원해 발칸 반도의 테살로니카로 향하자, 아들 테오도로스는 소아시아에 남아 사무를 관리했습니다. 특히 몽골군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였기에 몽골군이 니케아에 언제 위협을 가할지 등에 관해 아버지에게 보고했습니다. 1241년 중반기에 몽골군이 침략하여 니케아의 주변 국가들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반 아센이 죽은 뒤 불가리아는 쇠해졌고 결국 몽골의 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요. 룸 술탄국은 몽골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짓밟혔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이 소식을 아버지 바타치스에게 전했습니다. 바타치스는 이때 막 테살로니카를 포위 공격하려던 참이었지요. 바타치스는 테살로니카의 통치자 요안니스에게 황제 대신 군주라고 칭하라고, 로마 황제는 나 바타치스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요안니스가 충성을 맹세하자 바타치스는 서둘러 소아시아로 철수했습니다.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2세(출처: 위키백과)



이 무렵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이웃 국가들이 마구잡이로 쓸려나갔습니다. 1243년,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쿠스로 2세는 바타치스의 지원을 받아 몽골군의 침략을 막으려 했다가 대패했습니다. 카이쿠스로는 두려움에 빠져 도주했고 몽골군은 카이세리 등 다른 도시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돌아갔습니다. 술탄은 몽골의 봉신이 된다는 서약을 맺은 뒤, 1245년 말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이쿠스로의 젊은 아들인 이즈 알둔이 술탄이 됐고, 그는 니케아의 젊은 여성과 결혼해 니케아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니케아 인근의 트레비존드(동로마의 콤니노스 황가가 세운 나라였죠) 제국과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도 몽골의 칸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습니다. 트레비존드의 황제 콤니노스 마누일은 1246년에 구육 칸의 취임식에 참석했고, 아르메니아 사절은 1247년에 카라코룸으로 갔다가 3년 동안이나 머물러야 했죠.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는 니케아도 몽골 때문에 이웃 국가들과 똑같은 길을 걸을까봐 염려했습니다. 그는 몽골인의 관습과 풍습, 잔혹성에 대한 평판을 들으며 두려워하며 글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나 테오도로스의 아버지이자 원로 황제인 바타치스는 마냥 몽골군을 보고 벌벌 떨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바타치스는 1243년 7월 쾨세다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패배해서 만신창이가 된 술탄 카이쿠스로와 조약을 맺었습니다. 몽골군을 방어하기 위해 함께 군사 작전을 하자고 약조한 거죠. 철공소들은 추가 무기 제작을 의뢰받고, 밀과 보리 같은 곡물들은 흉작과 전쟁에 대비해 곡창에 보관했지요. 그리고 곡창은 납으로 봉인하고 결혼할 부부들은 혼인 계약서에 각 집안이 어떤 무기를 갖고 있는지도 기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술탄국과 우호를 다지기 위해 술탄국의 이주민들을 니케아 국경으로 받아들였죠. 술탄도 더 이상 영토 내 니케아인들에게 공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테오도로스는 아버지가 술탄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맺었다고, 아버지덕에 이슬람과의 앙금을 풀 수 있었다면서 아버지를 찬양했습니다. 


주변국가들의 힘이 약해지고 니케아가 발칸 반도로 팽창을 하자, 테오도로스에게 할 일이 점점 늘었습니다. 1240년대 초, 보두앵은 원조를 받기 위해 서유럽 원정을 떠나느라 콘스탄티노플을 비웠고, 룸 술탄국은 몽골 제국에게 고개를 숙였죠. 트레비존드와 아르메니아도 몽골의 눈치를 봤고요. 때마침 불가리아의 차르 칼리만(이반 아센의 어린 아들입니다)이 살해당하고 그의 어린 이복동생이 차르가 됐습니다. 1242년에 몽골군은 불가리아를 습격해서 초토화시켰습니다. 강성했던 불가리아는 빠르게 쇠락했죠. 바타치스는 마케도니아의 세레스를 향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기로 결정했고, 실제로 발칸 반도로 진출해 서쪽의 베로이아에서 북쪽의 로도스 산맥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바타치스의 비정규군은 무방비 상태의 하층민들의 마을을 점령했고요. 또한 1248년에는 니코메디아에서 라틴인과 싸우고 콘스탄티노플까지 침공했습니다(다만 성벽에 막혀서...ㅠ) 이처럼 아버지가 부재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소아시아에 남아서 행정과 사무일을 처리하던 테오도로스의 권한도 점점 커졌죠. 특히, 1250년대 초에는 에피로스의 미하일을 향해 바타치스는 1년 이상 원정을 떠났기에 테오도로스는 아버지를 대신해 더 절박하게 니케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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