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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Feb 22. 2021

[번역활동 1년째] 졸라의 세계에 빠져야만 했다

에밀 졸라의 <Pot Luck> 기획을 마치며

첫 장에서 나는 '제2의 유발 하라리를 찾겠다는 포부'로 번역의 세계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율리시스 그랜트의 회고록이 퇴짜 맞아서 의기소침해진 탓일까. 유명 작가에게 너무 기대려 한 게 아닐까 반성하게 되었다. 필력 좋고 트렌드에 맞는 무명작가를 발굴하겠다는 내 의지는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에밀 졸라라는 작가 앞에서는 내 초심을 잠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과장되면서 현실을 비판한 에밀 졸라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다. 


에밀 졸라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 '드레퓌스 사건'을 지탄했던 사회주의자로 유명할 뿐 <루공마카르 총서>라는 거대한 대작을 집필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다. <목로주점>, <제르미날> 같은 유명 작품은 줄줄이 번역되고 있지만 다른 <루공마카르 총서> 작품은 번역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1995년에 번역되었지만 현재는 절판된 <Pot Luck(프랑스어: Pot-Bouille)>을 번역하기로 결심했다. 2021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상류층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반발감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95년에는 중산층들의 반성 일기였다면, 2021년에는 대신 욕할 수 있는 욕받이 무녀가 되는 셈이다. 너무 막장일까 봐 걱정이 된다면, 후속작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을 먼저 읽은 후 <Pot Luck>을 읽는 것도 좋다.




너는 왜 불륜을 저질렀니?

<Pot Luck>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파리로 상경한 옥타브 무레가 출세를 위해 상류층 여인들을 정복(?)하는 이야기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성당에서 오귀스트와 베르트가 엄숙하게 결혼식을 치르는 와중에 남편 테오필이 아내 발레리의 부정을 추적하기 위해 옥타브에게 소리치는 모습, 아내 베르트의 불륜 소식을 듣고 화가 난 남편 오귀스트가 옥타브에게 달려들다가 힘센 옥타브에게 바로 굴복하는 모습이다. 내가 번역한 장면은 후자이다(전자는 번역 샘플로 넣기에는 대목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후자가 더 재밌기도 했고).


그러면 베르트와 옥타브는 불륜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옥타브야 출세 때문에 그렇다 치고... 베르트는 남편이 지겨워졌기 때문이다. 베르트는 부모님이 부부싸움(말이 좋아 부부싸움이지 사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갈구다시피 했다. 돈을 웰케 못 버냐고)을 보면서 자랐다. 베르트는 가난하고 우중충한 집안 분위기가 싫었고 결혼하면 모든 게 나아질 것이란 환상을 품었다. 그래서 어머니 말 따라 부잣집 아들 오귀스트를 유혹해 결혼에 성공했는데... 맙소사! 오귀스트의 아버지가 빚만 잔뜩 남겨 놓고 죽은 게 아닌가. 집을 팔아 빚을 갚긴 했지만, 오귀스트-베르트 부부는 허울만 좋은 빈털터리인 셈이었다. 하지만 결혼 전부터 있는 돈 없는 돈 모아 치장하기 바빴던 베르트는 결혼하고 나서 더 심하게 사치를 부린다. 아내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오귀스트는 베르트의 외출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청구서에 찍힌 돈까지 의심했다. 결국 베르트는 남편에게 학을 떼고 옥타브라는 청년과 바람을 피우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치정극 같다. 하지만 이들의 불륜 밑에는 상류층의 허세가 자리 잡았고, 졸라는 이들의 허세와 위선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 점을 잊지 말고 번역을 했다.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지 않은 문장들


“Go on, reproach me also with my outings,” stammered she in the midst of her sobs. “Accuse me of being too great an expense to you. Oh! I see clearly now; it's all on account of that wretched present. If you could shut me up in a box, you would do so. I have lady friends; I go to call on them; that is no crime. And as for mamma——” 


강주헌 선생님께서는 번역할 때 대명사를 유심히 보라고 하셨다. 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알아야, 원문의 뜻을 제대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I go to call on them'에서 'them'은 무엇을 가리킬까? 앞 문장의 'lady friends'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 친구들?이라고 번역하면 될까? 그런데 뒷 문장을 보면 'that is no crime'이 있다. 장면 전체의 맥락을 보자. 남편은 아내가 누구와 헤프게 지내는지, 어디서 돈을 펑펑 쓰는지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위 대사는 베르트가 애인 옥타브에게 하소연하는 대사이다. 이건 잘못이 아니라고. 죄가 아니라고. 내가 만난 사람은 절대 남자! 친구가 아니라, 같이 어울리는 여자 친구들일뿐이라고. 하지만, 여자 친구라 그러면.. 동성애가 의심될 수 있으니, 그냥 'them=친구들'이라고 번역했다(대체 누구를 부르러 가는 건지는 알겠는데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할지 파악하느라 죽을 뻔했다).


밑줄 친 문장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내겐 친구들이 있어요. 그들을 부르러 간 거예요. 이게 죄가 되나요? 어머니에게..."


'that is no crime'을 직역하면 '이건 죄가 아니다'이지만, 하소연하는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이게 죄가 되나요?'라고 의문형으로 번역했다. 'mamma'의 경우, 어머니를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이기 때문에, '엄마'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하지만 배경은 19세기 프랑스로 베르트는 상류층 여성이다. 그래서 겉으로나마 품위를 유지하려는 베르트를 위해 '어머니'라고 번역했다.




다음 문장을 보자.


“Sir, you are violating my domicile. It is disgraceful; you should act like a gentleman.” And he almost beat him. During their short struggle, Berthe had made off in her chemise by the door which had remained wide open; she fancied she beheld a kitchen knife in her husband's bleeding fist, and she seemed to feel the cold steel between her shoulders. As she rushed along the dark passage, she thought she heard the sound of blows, without being able to make out who had dealt them, or who received them. Voices, which she no longer recognized, were saying: “I am at your service whenever you please.” “Very well, you will hear from me.”


밑줄 친 문장은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 오귀스트가 아내의 불륜 소식을 듣고 방으로 쳐들어왔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오귀스트는 옥타브에게 돌진하지만 옥타브는 오귀스트를 가볍게 제압한다. 그런 뒤 옥타브가 하는 대사이다. 원래 'sir'은 이름 모를 남자에게 하는 경칭이다. '~님', '~경' 등으로 번역된다. '배경이 19세기 프랑스이니 '바브르(오귀스트의 성(姓)) 경'으로 번역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이들은 귀족이 아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혁명 이후 무너진 귀족들을 대신해 지배계층이 된 자본가들을 묘사하였다. 게다가 여기에 나온 'sir'은 존중하면서 비아냥대는 뉘앙스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sir'을 '형씨'라고 번역했다('형씨'를 사전에 검색하면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 상대편을 조금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라고 나온다).


밑줄 친 문장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형씨, 내 집을 욕보이는군요. 부끄럽지 않소? 신사답게 예의를 지키시오.”


'It is disgraceful.'을 직역하면 '이건 부끄러운 일이다'이지만, 여기서 옥타브는 오귀스트를 비웃고 있었다. 비웃는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의문형으로 표현했다. 


결국 오귀스트는 옥타브에게 굴복했다. 'I am at your service'를 사전에 검색하면 '무슨 일이든 시켜 주십시오' '마음대로 부리십시오'라고 나온다. 비록 오귀스트가 불리한 입장이었지만, 신분은 오귀스트가 더 높다. 옥타브는 저택에서 하숙하는 청년이고 오귀스트는 집주인 아들이기 때문이다(건물주-세입자 입장을 생각해보자. 21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누가 누굴 부리는 입장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번역해야 하지?(이걸 고민하느라 무려 1시간이 걸렸다).


뒷 문장을 보자. 옥타브는 오귀스트에게 '당신은 나한테 들을 수 있다고' 말한다. 뭘 들을 수 있지? 오귀스트가 옥타브를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싸우지 않는다. 언제 싸울까? 'whenever you please' 때. 즉, '당신이 좋을 때' 다시 오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래 두 문장은 이렇게 번역했다. 


“당신이 좋을 때 찾아오겠소.”

“좋소. 나중에 알려주리다.”

(이들의 신분을 생각하자. 오귀스트는 신사로서 예의를 지켜야 하고, 옥타브는 집주인 아들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는... 한마디로 쌍방으로 예의 있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경어체를 사용했다).




연애? 정사? 뭐가 더 고급스러울까?


Octave, tired out by this domestic squabble, decided not to answer, having noticed that Auguste sometimes got rid of her in that way. He let pass the flow of words, and thought of the ill-luck of his amours. Yet, he had ardently desired this one, even to the point of upsetting all his calculations; and, now that she was in his room, it was to quarrel with him, to make him pass a sleepless night, as though they had already left six months of married life behind them.


초반부에 나오는 대사이다. 베르트와 옥타브는 싸우고 있었다. 옥타브가 싸구려 라마 숄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레리, 마리 등 이미 사귀었던 여자들을 남편들에게 돌려주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베르트를 붙잡았는데 베르트는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트집을 잡는다. 마치 결혼한 지 6개월이나 지난 것처럼. 위 대목은 옥타브가 자신의 처지가 불행하다며 한탄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amour'라는 단어이다. 사전에 검색하면, 정사(情事), 통정(通情)이라고 나온다. 처음 이 단어들을 보았을 때 너무 예스러운 게 아닌가. '연애' 같이 현대적인 단어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비록 책의 배경은 19세기이지만 독자는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역가는 왜 'amour'라고 번역했을까? 현대식으로 할 거면 'date', 'romance'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자 사전에 검색하면 회색으로 흐릿하게 나온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구식, 불어에서'라고 나온 대목이. 번역가는 예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amour'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번역가의 의도를 따라, 나는 사전에 나온 대로 'amour=정사(情事)'라고 번역했다.


밑줄 친 문장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가 쏟아내는 말을 고스란히 귀에 담는 그는 자신의 정사(情事)가 참 불운하다고 생각했다.


Amour? 연애? 정사? 더 으른으른 하게, 예스럽게 보이려면 어떻게 옮겨야 할까? (출처: 픽사베이)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 말하는 거야!


Yet, when one loves a woman, good nature alone should prompt one to feed and dress her. But no man will ever understand that.

“For heaven's sake leave your mamma alone,” interrupted Octave; “and allow me to tell you that she has given you a precious bad temper.”


나는 두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근데요. 여자를 사랑하면, 선한 본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여자를 먹여주고 입혀줘야 해요."

“부디 당신 어머니 좀 내버려 두시구려. 하나 말하겠는데, 당신 어머니는 당신에게 귀중하고도 더러운 성격을 주셨소.”


위 두 문장은 자연스럽게 번역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대로 제출할 뻔했다. 하지만 스터디 조원들의 피드백 덕분에 위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전 찾은 티가 나는 어색한 문장이었다. 아마, 난 이들을 인형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계속 소설을 쓰다 보니 '작가가 이런 의도로 얘네가 이렇게 행동하게 했구나.'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긴 탓이었다. 앞 문장의 경우, 'good nature'를 직역하면 '착한 본성', '좋은 본성'이다. 난 '본성'이라는 단어에 집착한 나머지, 이 단어를 그대로 쓸 뻔했다. 작가와 번역가의 의도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대화체다. 여기서는 창조주인 작가보다 등장인물인 베르트의 의도를 생각해야 한다. 베르트가 가리키는 'good nature alone'은 누구일까? 뒷 문장을 보라. 'no man'에서 원래 'man'은 불특정 다수 남자이지만, 여기서 베르트는 옥타브에게 '당신은 제 남편과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다그치는 상황이다. 즉, 여기서 'man'은 애인과 남편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good nature alone'도 마찬가지다. 베르트는 '착한 남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 줘야 한다'라고 하면서. 


그래서 아래와 같이 수정했다.


"근데요. 여자를 사랑하면, 착한 사람이라면, 여자를 먹여주고 입혀줘야 해요."


아래의 대사도 비슷한 논리이다. 베르트가 '착한 남자의 조건'을 늘어놓자, 옥타브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베르트에게 비꼬고 있다. '당신 어머니께서 참 좋은 성격'을 물려주었다고. 'a precious bad temper'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그래서 비꼬는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precious=귀중한'이라는 의미를 살렸다. 하지만 조원들은 왜 저렇게 말했는지 이해가 되지만, 너무 사전 찾은 느낌이 난다고 말했다. 'precious'의 의미도 살리면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번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귀중하다'를 사전에서 찾으면 '귀하고 중요하다'라고 나온다. '귀하다'를 검색하면 4가지 의미가 있었다. 그중 눈에 들어온 의미는 '구하거나 얻기가 아주 힘들 만큼 드물다'였다. 즉, 옥타브는 '너처럼 성격 더러운 여자는 처음이야. 너 같은 여자는 파리 전역을 뒤져봐도 안 나올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수정했다.


“부디 당신 어머니 좀 내버려 두시구려. 하나 말하겠는데, 당신 어머니는 당신에게 보기 드문 더러운 성격을 주셨소.”



이렇게 고비를 넘긴 후, 기획서를 완성했다. 에밀 졸라 작품을 번역했던 출판사에 기획서를 제출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프랑스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고, 그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출판사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역서 한 권 없는 신인에게 19세기 대표 작가의 작품 번역을 맡길까?? 불안하지만, 저서 한 권 없는 내게 브런치 합격이라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처럼 이번에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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