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타쿠지노스 가문의 기원은 소아시아로, 1100년경 콤니노스 왕조의 알렉시오스 1세(1081-1118 재위)를 섬긴 군 지휘관이 시조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알렉시오스의 밑에서 착실히 전공을 쌓았던 그는 본명과 조상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가 안나 콤니니는 그를 뛰어난 장군으로 치하했습니다. 이후,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군대의 지휘관이 되거나 황실 가문과 혼인을 맺으면서 '강력한 자'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누일 1세(1143-1180 재위)가 치른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전사한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1)안드로니코스 1세(1183-1185 재위)의 폭정에 희생당한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있습니다. 전자는 마누일 1세의 조카 마리아 콤니니와 혼인하고, 후자는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3세의 누이 이레네 앙겔리나와 혼인했죠.
[1]4차 십자군 시기가 되면,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한 가문이자 '잘 태어난 귀족', 즉 동로마 궁정의 세습 귀족으로 거듭났습니다. 마누일 1세 치세를 시작으로 콤니노스, 앙겔로스, 팔레올로고스 같은 황실 가문과 혼인으로 연을 맺으면서 세력을 불려나갔죠. 이 시리즈의 주인공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이하 '칸타쿠지노스')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2)칸타쿠지노스의 아버지는 대한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본명도 알려지지 않았죠. 도널드 M. 니콜의 『칸타쿠지노스의 비잔티움 가문』에 따르면, (3)1286년부터 모레아(중세 또는 근대 초에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일컫던 말, 출처: 위키백과) 총독으로서 안드로니코스 2세를 섬기다가 1294년에 사망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129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칸타쿠지노스의 어머니는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앙겔리나 칸타쿠제네입니다. 예전에 동로마를 지배했던 앙겔로스 가문뿐 아니라 당시 동로마를 지배하던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성도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앙겔로스와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혈족이라고 추정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친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3]안드로니코스 3세의 친척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칸타쿠지노스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랍니다.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문장(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테오도라는 남편을 잃은 뒤 50여 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상속받은 재산으로 평생 아들을 뒷바라지했습니다. 황실 가문의 성을 모두 물려받은 그녀는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었는데,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존경했습니다. 훗날 칸타쿠지노스가 집필한 회고록에 아버지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반면, 어머니는 '여성이 지닌 힘 그 이상을 타고난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는 평생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며 몹시 슬퍼했습니다.
테오도라는 지략이 뛰어나고 신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처럼 헌신적이고 현명한 여인을 찾아서 아들의 결혼을 주선합니다. 불가리아의 차르 이반 아센 3세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의 딸 이레네 팔레올로기나의 손녀 이레네 아사니나 팔레올로기나였죠. 1318년, 칸타쿠지노스는 23살의 나이에 이레네와 결혼합니다. 이때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황궁 행정부에서 작고 명목상인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4)그는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를 만납니다. 신중했던 칸타쿠지노스와 활달했던 안드로니코스는 성격이 달랐지만, 사냥이나 마상 시합 등으로 절친이 되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1295년생으로 추정되고, 안드로니코스는 1297년생으로 비슷한 나이대였죠.
하지만 안드로니코스 2세는 두 사람이 어울리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5)손자가 술과 도박에 탐닉하고 좋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제노바인에게 빚을 지는 등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황실에서는 안드로니코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제시키기 위해 1317년, 브런지윅 그루벤하겐의 공작 하인리히 1세의 딸 이레네와 혼인시켰습니다. 소용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아이는 죽고, 안드로니코스는 여전히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게다가 안드로니코스는 어머니의 고향인 아르메니아나 모레아에 집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와 아버지 미하일 9세는 안드로니코스의 행태에 실망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잔소리를 거부하던 안드로니코스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여색을 밝히는 안드로니코스는 어떤 여인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이 여인을 차지하려면 연적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는 암살단을 고용해 여인의 집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안드로니코스의 동생 마누일이 지나갔습니다. 암살 대상을 오인한 암살단은 마누일을 살해했습니다. 병상에 있던 미하일 9세는 장남의 패륜에 충격을 받고 1320년 10월 1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동황제였던 아들과 둘째손자를 한꺼번에 잃은 안드로니코스 2세는 격분했습니다. 첫째손자를 더 이상 봐 줄 수 없다고 생각했죠. 황제는 안드로니코스와 의절하고 상속권을 박탈했습니다. 공동황제직은 미하일 9세의 형제나 서자에게 물려주겠다고 선포했죠. 상황을 지켜본 칸타쿠지노스는 회고록에서 안드로니코스의 살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악마의 유혹'이라고 칭했을 뿐이었습니다.
손자 안드로니코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트라키아로 향했습니다. 수도에 홀로 남은 칸타쿠지노스를 경계한 황제는 1321년 4월, 칸타쿠지노스에게 모레아의 총독직을 줄 테니, 황궁을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황제의 명을 거부했습니다. 모레아는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간 주둔한 곳으로, 모레아만 떠올리면 슬퍼진다고, 모레아에 주둔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손자와 칸타쿠지노스를 떨어뜨리기로 결심한 황제는 칸타쿠지노스에게 테살리아를 다스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어쩔 수 없이 테살리아로 떠났습니다. 이는 안드로니코스 2세의 실수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난 뒤, 젊은 안드로니코스를 옹립하려는 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공모했습니다. 소아시아 영토 상실 등으로 나락에 빠진 제국을 구하고 더 이상의 영토 상실을 막겠다는 명분으로요. 그들은 콘스탄티노플 북쪽의 아드리아노플에 본부를 세우고 안드로니코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습니다(4편에서 계속).
14세기 초반 팔레올로고스-칸타쿠지노스 가문의 가계도
(1)본문의 주인공과 동명이인입니다.
(2)[2]러시아 역사학자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가 집필한 『Byzantische Geschichte 324 - 1453』에 따르면, 칸타쿠지노스의 아버지는 1308년부터 모레아 총독직에 재임하다가, 1316년에 죽은 미하일 칸타쿠지노스라고 합니다.
(3)중세 또는 근대 초에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일컫던 말, 출처: 위키백과.
(4)할아버지와 손자의 이름이 똑같습니다, 훗날 안드로니코스 3세가 됩니다.
(5)칸타쿠지노스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