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1년 초, 칸타쿠지노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난 뒤 젊은 안드로니코스를 옹립하려는 자들을 만났습니다.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있을 때 반란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어 트라키아 지방을 다스리게 된 시르기안니스 팔레올로고스와 죽은 미하일 9세의 절친한 벗이자 육군 부사령관이었던 테오도로스 시나디노스였죠. 시르기안니스는 안드로니코스의 향락과 살인에 동조해서 황제의 눈밖에 났습니다. 아마, 칸타쿠지노스가 시르기안니스를 만난 이유는 트라키아 총독인 시르기안니스가 아드리아노플도 다스렸기 때문에 아드리아노플에서 민심을 얻기 위한 방책으로 추측됩니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다스린 적 있는 시나디노스는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고요. (1)그리고 예리하고 지략이 풍부한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도 반란에 가담시킵니다.
1321년 4월 15일, 칸타쿠지노스 무리는 안드로니코스를 기다렸습니다. 안드로니코스는 부활절을 틈 타, 궁을 탈출해 무리에 합류했습니다. 손자의 소식을 듣고 화가 난 늙은 황제는 안드로니코스를 범법자라고 선언하고, 반란군과 그들의 지지자를 파문했죠. 하지만 반란군은 황제 몰래 지지자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특히 트라키아 백성들은 높은 세금 때문에 신음하고 있었는데, 반란군은 이들의 불만을 이용해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나를 따르거라. 그러면,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
이렇게 민심을 얻고 군대를 규합할 때, 트라키아 북쪽의 불가리아가 안드로니코스에게 접근했습니다. 불가리아의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1307년에 안드로니코스의 누나 테오도라와 혼인한 뒤 동로마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동로마의 내전을 관망하던 차르는 기병 300명을 보내 안드로니코스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안드로니코스는 차르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뒤,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할 준비를 했습니다.
내전 직전(1307년) 발칸반도의 지도(출처: 위키백과)
칸타쿠지노스는 안드로니코스에게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논의 끝에 안드로니코스는 칸타쿠지노스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경고도 하고 협상도 할 겸 수도에 사람을 보내자, 황제도 협상을 위해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1321년 6월 6일, 양측은 트라키아의 도시 레기온에서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시르기안니스의 어머니와 필라델피아 주교가 협상을 주도했습니다. 이들의 노력 덕에 할아버지와 손자는 공동황제가 되었고 제국의 영토는 두 황제가 분할해서 통치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아드리아노플과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일대를, 안드로니코스 2세가 콘스탄티노플과 나머지 일대를 지배하게 되었죠. 칸타쿠지노스는 협상의 공을 인정받고 군사령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르기안니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칸타쿠지노스를 편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젊은 안드로니코스는 시르기안니스의 부인을 탐하기까지 했죠. 더 이상 참지 못한 시르기안니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를 배반하고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가서 내전을 재개하라고 부추겼습니다. 늙은 안드로니코스는 시르기안니스의 참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1321년 12월, 트라키아에서 두 번째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6개월간 전쟁을 벌였죠. 젊은 안드로니코스는 모아둔 자금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용병에게 줄 돈이 부족해졌죠. 자금을 확보하려고 폐지된 세금을 다시 걷으면 민심을 잃을 것은 안 봐도 뻔했습니다. 이때 칸타쿠지노스와 그의 어머니가 나섭니다. 칸타쿠지노스 모자는 사비를 털어 용병비를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다시 내세우면서 안드로니코스 3세는 명성을 회복했습니다. 테살로니카와 렘노스 섬이 젊은 황제의 편에 섰습니다.
J.H.Valda가 그린 미하일 아센 3세(미하일 시슈만)(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1322년 7월, 셀렘브리아 인근에 있는 에피바타이에서 두 황제는 두 번째 조약을 맺습니다. 양측은 분할 통치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늙은 안드로니코스는 젊은 안드로니코스가 제국 전체의 황제임을 인정하고, 연간 35,000 히피르피론과 군대도 제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에피바타이에서 예식을 치른 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습니다.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죠. 젊은 황제는 궁전에서 15일을 보낸 후, 트라키아의 도시 디디모티호를 거처로 삼았습니다.
이때 불가리아가 트라키아를 침공했습니다. 스베토슬라프가 죽고 새로 차르가 된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가 동로마의 내전을 이용해 트라키아의 도시 플로프디프를 점령하고 아드리아노플까지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게오르기는 차르가 된 지 1년 만에 요절했습니다. 1323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차르의 죽음으로 혼란이 생긴 틈을 이용해 플로프디프와 트리키아를 탈환하고 여러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새로 차르가 된 미하일 시슈만은 트라키아로 진군했습니다. 하지만 동로마군은 불가리아군의 침공을 막아냈습니다. 그러자 시슈만은 콘스탄티노플 인근 도시 트라야노플로 진격했습니다. (2)결국 안드로니코스와 시슈만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협상을 맺고 테오도라와 결혼하면서 분쟁이 종식되었습니다.
내가 후계자 없이 죽는다면, 로마인에게 이 자를 황제로 삼으라고 권할 것이다.
불가리아 침공 당시 칸타쿠지노스의 행보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322년의 조약 이후 두 황제를 성실히 섬기고 안드로니코스 3세를 도와 불가리아의 트라키아 침공 때 활약했다고 추정할 뿐입니다. [4]늙은 안드로니코스는 '내가 후계자가 없이 죽는다면, 로마인에게 이 자를 황제로 삼으라고 권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두 황제를 이간질하던 시르기안니스는 불안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시르기안니스는 안드로니코스 2세를 암살하고 자기가 직접 황제가 되려고 했습니다.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1325년 2월 2일, 양측은 세 번째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두 번째 대관식을 치르고 공동황제로 인정받았습니다. 4년 전에 이미 공동황제가 된 것을 알지만 다들 입 다물고 넘어갔습니다.
오랜 내전과 외세의 개입으로 제국은 황폐화되었습니다. 제국의 근거지였던 소아시아 영역은 튀르크군에게 야금야금 갉아먹혔죠. 어쩔 수 없이 안드로니코스 2세는 30년 전 반란을 일으켰다가 눈이 뽑히고 감옥에 갇힌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를 사면했습니다. 필란트로피노스는 이미 늙고 눈도 멀었지만 튀르크군은 과거에 자신들을 무찔렀던 필란트로피노스에게 경외감을 갖고 있었기에, 필라델피아를 순순히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튀르크 해적단이 트라키아 해안을 침공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군사령관인 칸타쿠지노스가 활약할 때가 왔습니다. 1325년 후반, 칸타쿠지노스는 두 황제의 승인을 받고 트라키아로 진격했습니다. (3)튀르크 해적단을 몰아냈지만, 부르사가 오스만 베이국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것은 막지 못했습니다.
1326년 황족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킵니다. 머지않아 요안니스가 죽으면서 반란은 종식되지만, 제국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징표였습니다.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인기가 떨어지자, 내전의 기미가 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웃 국가들이 더 적극적으로 내전에 간섭했습니다. 불가리아의 시슈만은 세르비아의 왕 스테판 데찬스키에게 맞서주는 조건으로 안드로니코스 3세의 편에 섰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의 데찬스키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트라키아에서 세금을 감면해주고 군인의 월급을 올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지지자들을 모았습니다. 내전에 필요한 자금은 칸타쿠지노스가 지원할 예정이었습니다(칸타쿠지노스는 돈이 많아서 괜찮아요).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사절을 보내서 협상을 제의하려 했습니다.
스테판 데찬스키의 프레스코 벽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하지만 패닉에 빠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제대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안드로니코스 3세는 칸타쿠지노스와 시나디노스의 조언을 듣고 군대를 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군대를 물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카를 먼저 공략하자고 제안합니다. 테살로니카는 동로마 제국 제2의 도시였죠. 마침, 테살로니카 백성들은 안드로니코스 2세가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은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테살로니카 성을 손쉽게 점령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마케도니아의 다른 도시들도 순순히 항복했습니다.
그런데 불가리아의 시슈만이 갑자기 안드로니코스 2세의 편에 섰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인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그를 견제한 것 같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흔쾌히 시슈만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시슈만은 군인 3000명을 콘스탄티노플에 보냈습니다. 갑작스러운 매형의 배신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질겁하자, 칸타쿠지노스는 불가리아 군대를 물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안드로니코스는 지휘관을 설득해 군대를 물리고 시슈만에게 편지를 보내 동맹 관계를 상기시켰습니다.
이때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내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무역하겠다고, 넌 돌아가라고 싸우던 것이었죠. 사소한 무역 전쟁이었지만, 베네치아 함대가 제노바의 식량 선박이 짐을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항구를 봉쇄했습니다. 식량을 보급 받지 못한 동로마 백성들은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늙은 안드로니코스는 그나마 남은 인기마저 잃었습니다. 1328년 5월 23일, 젊은 안드로니코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테오도로스 시나디노스는 800명의 군인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습니다. 그들은 수비대 지휘관을 매수해 손쉽게 성문으로 들어갔죠. 침실에 있던 안드로니코스 2세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깹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링컨 타이피콘에 있는 테오도로스 시나디노스(좌)와 그의 아내(우)(출처: 위키백과)
우리는 하느님의 목적을 이루었을 뿐이다.
칸타쿠지노스는 병사들에게 약탈과 인명 피해를 금했습니다. 우리는 '신의 목적'을 성취했을 뿐이라고 했죠. 한편 늙은 안드로니코스는 몸을 피했습니다. 손자에게 해를 당할까 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힘도 없었죠. 궁정에 입성한 손자는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성모의 조각상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할아버지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킨 뒤, 수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조용히 살다가 1332년 2월 13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5편에서 계속).
(1)훗날 칸타쿠지노스는 시르기안니스와 아포카우코스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실책을 저질렀음을 알게 됩니다.
(2)스베토슬라프와 결혼했던 안드로니코스의 누나입니다.
(3)오스만 베이국은 룸 술탄국이 분열한 후 소아시아에 세워진 튀르크계 베이국(공국)중의 하나였습니다. 훗날,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