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칸타쿠지노스의 회고록 1권에 따르면, 안드로니코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3세의 내전은 1321년 4월 19일부터 1328년 5월 24일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수도사가 되어서 조용히 살다가, 1332년 2월 7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측근이었던 총대주교 예사이아스와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도 사망하면서, 한 세대가 물러나고 다음 세대가 무대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내전 도중 부인을 사별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사보이의 안나와 재혼했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죠. 부부는 아이에게 요안니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황제의 오른팔로 자리매김하고, 시나디노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군사적인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 행정관의 임무 일부를 아포카우코스에게 넘겼습니다. 칸타쿠지노스의 실책이었죠.
안드로니코스 2세(좌)와 안드로니코스 3세(우)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내전이 끝났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1328년 6월, 불가리아의 시슈만이 다시 트라키아를 침공하면서 동로마는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지지부진해지고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하자 시슈만은 불가리아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해 초, 세르비아에 대항하기 위해 시슈만과 안드로니코스 3세가 평화 조약을 갱신하면서 전쟁은 일단락되었죠. 혼란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칸타쿠지노스는 감옥에 갇혀 있던 시르기안니스의 석방을 요청했습니다. 시르기안니스는 석방된 후 테살로니카와 일부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1)그는 테살로니카에서 황제의 어머니인 마리아 황태후를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칸타쿠지노스를 끌어낼 음모를 꾸몄지만, 1333년 마리아가 죽자 시르기안니스의 음모가 발각되었습니다. 황제가 세르비아에서 새로 왕이 된 스테판 두샨을 만나서 평화 조약을 맺고 세르비아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황제는 시르기안니스의 음모를 알게 되자, 격분했습니다.
1328년 지중해 영역의 지도, 보라색이 동로마 제국이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체포된 시르기안니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재판을 받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세르비아로 향했습니다. 두샨은 안드로니코스와의 조약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마케도니아를 침공했습니다. 시르기안니스를 선봉으로 내세웠죠. 여러 도시들을 야금야금 먹은 두샨은 테살로니카로 진격했습니다. 그때, 안드로니코스 3세가 시르기안니스에게 첩자 스프란치스 팔레올로고스를 보냈습니다. 스프란치스는 망명한 척하며 시르기안니스의 진영에 잠입했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르기안니스는 스프란치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는 내전의 책임자이자 그 이후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
시르기안니스의 반란이 흐지부지되자, 1334년 세르비아와 동로마는 다시 평화 조약을 맺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6]동로마 역사가 니키포로스 그리고라스는 시르기안니스를 "내전의 책임자이자 그 이후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평했습니다.
한편 궁정에서는 칸타쿠지노스를 견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사보이의 안나는 칸타쿠지노스가 남편의 옥좌를 노린다고 의심했고, 아포카우코스도 칸타쿠지노스 몰래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황태후가 시르기안니스를 지지한 이유는 아들이 권력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한 칸타쿠지노스의 어머니를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이때, 안드로니코스 3세는 칸타쿠지노스에게 공동황제직을 제안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궁정의 분위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황제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다시 안드로니코스 3세가 황위에 오른 1328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때 소아시아 내의 동로마의 영역은 에게 해와 니코메디아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2년 전에 빼앗긴 항구 도시 브루사는 오스만이 수도로 삼은 터라 어쩔 수 없었지만, 다른 중요한 도시 니코메디아와 니케아는 지켜야 했습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평화 조약을 맺은 황제와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군에 포위된 니코메디아로 진군했습니다. 1329년 6월, 그들은 주변 언덕에서 적을 볼 수 있는 펠레카논에 진을 치고 오스만 술탄 오르한의 군대를 맞닥뜨렸습니다. 여러 차례 돌격과 반격이 이어졌고, 칸타쿠지노스는 황제에게 아침에 후퇴해서 다시 준비하자고 조언했습니다. 하지만 술탄은 동로마군이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황제와 칸타쿠지노스는 가벼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동로마 진영에서 황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아픈 몸을 이끌고 병사들을 진정시킨 뒤, 황제를 해안가로 옮겼지만, 낙담한 병사들의 사기를 되돌릴 수 없었죠. 거기서 또 교전이 벌어졌고 동로마군은 대패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친척이었던 장교 두 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남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퇴각했습니다.
펠레카논 전투 이후, 니코메디아는 튀르크군의 봉쇄에서 풀려났습니다. 1330년, 죽어가던 황제는 칸타쿠지노스에게 또 공동황제 칭호를 부여하려고 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또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안드로니코스는 황후와 신하들을 불러서, 내가 죽으면 칸타쿠지노스를 나라의 지도자이자 자식들의 후견인으로 간주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칸타쿠지노스에게 나를 수도사로 서품시켜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수도사가 되면 황제로서 누렸던 권한을 박탈당하는 것을 아는 칸타쿠지노스는 황제의 청을 거부하고, 황제의 청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와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황제가 성수를 마시고 기적적으로 회복하면서 논쟁은 종결됐지만, 황제가 칸타쿠지노스를 얼마나 신임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소아시아에 자리 잡은 오스만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소아시아 복원 작전은 중단되고, (2)1331년 3월, 한때 동로마 망명 제국의 수도였던 니케아가 오스만에게 항복했습니다. 황제와 칸타쿠지노스는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1333년 8월, 황제는 직접 니코메디아로 가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식량을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술탄 오르한을 만나서 일주일 넘게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3)황제는 술탄에게 매년 12,000 히피르피론을 바친다고 약조하고, 술탄은 소아시아에 남은 동로마의 영역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조했습니다.
오스만 베이국의 2대 술탄 오르한(출처: 위키데이터)
칸타쿠지노스는 외교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문단에서 언급한 대로, 2년 뒤 시르기안니스가 두샨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시르기안니스가 암살당하면서 반란은 흐지부지 끝나지만, 두샨은 마케도니아 전체를 세르비아의 영역으로 삼으려는 야욕을 품고 테살로니카로 진군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세르비아와의 협상을 위해 테살로니카에 갔고, 거기서 두샨을 만났습니다. 이미 2년 전 안면을 익혔던 두 사람은 우정을 맺었습니다. 1년 뒤 안드로니코스 3세와 두샨이 평화 조약을 체결했는데, 칸타쿠지노스가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칸타쿠지노스와 두샨의 우정은 나중에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리고 동로마는 마케도니아를 수복했습니다.
레스노보에 소장된 스테판 두샨의 프레스코 벽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4)이 무렵, 칸타쿠지노스가 만난 외국인이 또 있었습니다. 아이딘 베이국의 (5)에미르 우무르였습니다. 1335년 제노바가 레스보스와 미틸레네 등의 섬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제와 칸타쿠지노스는 레스보스 섬을 제노바에게서 탈환하기 위해 원정을 나갔습니다. 그때 우무르는 도움을 요청받고 황제의 진영으로 갔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배를 빌려줄 수 있겠냐고 우무르를 설득했고, 우무르는 칸타쿠지노스와의 우정을 지키겠다면서,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6)결국 다음 해, 레스보스를 탈환하고 미틸레네는 동로마의 수중으로 돌아왔습니다.
[7](7)그리고라스는 칸타쿠지노스와 우무르의 우정을 그리스 신화의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형제가 아닌가. 형제끼리 어찌 혼인을 한단 말인가.
[8]오스만의 역사가 엔베리는 칸타쿠지노스가 우무르에게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제안했는데, 우무르는 우리가 '형제'이니 근친혼은 안 된다면서 거부했다고 언급합니다.
이처럼 안드로니코스와 칸타쿠지노스는 소아시아에서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리스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333년 스테판 두샨과 처음으로 평화 조약을 맺을 무렵, 테살리아의 영주가 죽자 황제는 재빨리 테살리아로 진군하라는 명을 내렸었습니다. 그리고 동로마는 테살리아, 아테네 공국, 테베 등을 수복했습니다. 그러나 1337년, 니코메디아가 오스만의 수중으로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에피로스 북쪽의 알바니아인들이 말썽을 부린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에피로스로 진군해서, 다시 우무르를 만나러 갔습니다(6편에서 계속).
(1)본명은 아르메니아의 리타였으나 동로마 궁정에 오면서 마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2)니코메디아는 1337년까지 존속했습니다.
(3)칸타쿠지노스가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지만, 그가 현장에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 조약은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베이국과 처음으로 맺은 조약이었습니다.
(4)룸 술탄국이 붕괴된 후 여러 베이국(공국)들이 독립했습니다. 오스만과 아이딘은 수많은 베이국 중 하나입니다.
(5)emir, 왕이라는 뜻이다.
(6)레스보스는 4편에서 등장한 필란트로피노스 장군의 활약 덕에 탈환했습니다.
(7)단테의 『신곡』에 따르면 오레스테스는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아들로, 간부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을 죽이자 필라테스가 '내가 오레스테스의 아들이다'라고 외치면서 죽음을 자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