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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Nov 29. 2021

땅을 얻으려면 말빨부터!!

(6)황제의 참모-2: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동로마)

에피로스의 알바니아인은 그동안 칸타쿠지노스가 상대했던 족속들과 달랐습니다. 산에서 은거하며 약탈하며 살던 그들은 산속의 지리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가 거느린 기병대로는 상대할 수 없었죠. 그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기로 결심하고, 친구 우무르를 찾아가서 튀르크 용병 2,000명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무르는 순순히 군대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1338년 봄, 황제와 칸타쿠지노스는 군대를 끌고 에피로스로 향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의 예상대로, 알바니아인은 산에서 공격하다가 수세에 몰리자 은신처로 도망쳤습니다. 이런 상황에 익숙했던 튀르크군은 경무장을 하고 민첩하게 알바니아인을 찾아냈습니다. 수천 명의 알바니아인이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가고, 무수히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습니다. 알바니아인이 물러가고 황제 일행이 몸소 행차하자, 에피로스의 동로마인들은 그들을 신으로 칭송했습니다.


아이딘의 우무르 석상(출처: 위키백과)



황제는 튀르크군을 해산하고 전리품과 노예를 나눈 뒤, 우무르를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튀르크군이 에피로스 지방을 약탈해서 동로마의 위신이 악화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최종 목적은 에피로스에 항복을 권유해서 동로마의 속령으로 만드는 것이었죠. 상황은 황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에피로스의 섭정이었던 안나 팔레올로기나는 미하일 8세의 증손녀로, 동로마 황실의 일원이었습니다. (1)에피로스의 백성들은 황제에게 저항하기로 결심하고, 멸망한 라틴 제국의 명목상 황태후였던 발루아의 카트린과 동맹을 맺었죠. 안나는 상황을 무시하고, 황제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니키포로스와 칸타쿠지노스의 세 딸 중 한 명과 약혼시키기로 약속하고, 아들을 데리고 에피로스를 떠나기로 약조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니키포로스가 사라졌습니다. 안나의 항복에 반대한 사람들이 니키포로스를 납치해, 이탈리아에 있는 카트린의 궁전으로 보냈기 때문이었죠.


황제는 시나디노스를 에피로스의 총독으로 임명한 뒤, 칸타쿠지노스와 함께 니키포로스를 찾으러 이탈리아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18개월 후, 그들은 귀국해야 했습니다. 니키포로스가 에피로스의 수도 아르타로 돌아와서 시나디노스를 가두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반란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테살리아의 총독 미하일 모노마코스와 칸타쿠지노스의 친척 요안니스 앙겔로스를 에피로스로 보냈습니다. 에피로스에 간 그들은 군대를 세 개의 사단으로 나누어 반란의 중심지였던 아르타, 로고이 성, 토모카스트론 성을 포위했습니다. 그들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했던 칸타쿠지노스와 달리, 무력을 사용했죠.


1340년, 황제와 칸타쿠지노스는 직접 에피로스로 진군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니키포로스의 반란에 대군무관 알렉시오스 카바실라스가 동참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카바실라스는 칸타쿠지노스의 친구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무력을 쓰기 전, 카바실라스를 설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카바실라스가 점령한 로고이 성으로 찾아갔습니다. 카바실라스는 칸타쿠지노스가 가까이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두려워했죠. 하지만 막상 친구가 성벽 아래로 찾아오니 쫓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리 반대편 끝에 서서 만났습니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칸타쿠지노스는 네가 반란의 주동자라고 지적했습니다. 카바실라스는 동포들이 제국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진저리 쳤죠.


로마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이 어떤가. 여기서 죽는 것보단 나을 걸세.

설득에 실패한 칸타쿠지노스는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3일 후, 그는 다시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로마 황제'의 신하로 사는 것은 끔찍하지 않으며, 포위당해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설득했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얘기한 뒤, 둘은 헤어집니다. 며칠 뒤, 카바실라스가 빠르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친구로서 그의 청을 받아들이겠다고, 싸움을 포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칸타쿠지노스는 친구와 친구의 군대를 이끌고 황제에게 자신의 성과를 보고했습니다. 황제는 그들을 흔쾌히 맞이하고, 카바실라스를 제국의 일원으로 인정했죠.



1315년부터 1358년까지 에피로스 전주국의 영토 변화(출처: 위키백과)



한편, 아르타에서는 계속 포위전이 진행되었습니다. 카바실라스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니키포로스는 무척 분개했습니다. 그는 카바실라스를 비난하며, 많은 뇌물을 주어도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죠. 칸타쿠지노스는 로고이에서 썼던 심리전을 다시 활용하기로 결심하고, 직접 아르타 성으로 찾아갔습니다. 


어서 항복하게. 시체가 된 병사들이 안쓰러울 지경일세.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칸타쿠지노스는 카바실라스 때와 달리 협박조로 항복하라고 말했습니다. 니키포로스는 백성들의 자유를 위해 저항한다고 주장했죠. 칸타쿠지노스는 포위전을 치르느라 경제와 농업에 피해를 끼치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계속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반박했습니다. 니키포로스가 도움을 청한 이탈리아인들은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고 했죠. 니키포로스는 성벽에 있는 병사들을 소집했습니다. 6개월 동안 포위전을 치르느라 다들 지쳤던 탓일까요? 칸타쿠지노스에게 항복하기를 바라는 병사들이 더 많았습니다. 결국 니키포로스는 항복하고 동로마군은 아르타 성으로 진입했습니다.


이제 토모카스트론만이 남았습니다. 토모카스트론 성은 몇 달 동안 포위전을 치렀지만, 정작 육지 쪽만 포위된 상태였죠. 성은 해로를 통해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타란토 함대에게서 식량을 보급 받고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가 토모카스트론에 도착한 지 3주 후, 타란토 함대 13척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포위된 성을 보고 하선하지 않고 머뭇거렸습니다. 성이 포위된 지 25일이 지나자, 칸타쿠지노스는 협상을 권유했습니다. 그들은 니키포로스의 가정교사를 사절로 보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사절을 앞에 두고 수업을 했습니다. 이탈리아인은 자기네들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니키포로스를 도왔다, 우리와 조약을 맺은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의 작전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황제가 군대를 끌고 여기를 지키고 있는데 상황이 더 좋아지겠냐. 발루아의 캐서린이 반란군을 돕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상황을 알면 낙담하고 포기할 것이다, 설령 병력을 더 보내서 여기를 점령해도 백성들은 비굴하게 살 것이다, 니키포로스는 반란이 확산되기를 바랐지만 이미 아르타와 로고이가 함락되었으니 소용없다. 황제가 성을 점령하기 전에 너희들의 어리석은 행태를 돌아보아라. 니키포로스도 내 딸과 약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 않냐고 말했죠.


결국 토모카스트론도 항복했습니다. 반란군은 황제의 진영으로 압송되었죠. 1340년 11월, 황제와 칸타쿠지노스는 에피로스를 떠났습니다. 앙겔로스는 에피로스 총독으로, 시나디노스는 석방된 후 테살로니카 총독이 되었습니다. 2년이 지난 1342년 여름, 테살로니카에서 두 쌍의 커플이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약조한 대로 니키포로스는 칸타쿠지노스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고, 칸타쿠지노스의 장남 마타이오스는 황제의 사촌 이레네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했죠. 이렇게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황실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도 마타이오스는 잠재적인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들 요안니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함정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죠.


전쟁을 치를 동안 안드로니코스 3세는 건강이 악화되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자 몸져 눕게 되었습니다. 그는 황후에게 아이들을 잘 돌보아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1341년 6월 15일,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죠. 장례는 수도원에서 치렀습니다. 황후는 수도원에서 3일간 황제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도 벗으로 여겼던 황제가 죽자 애석해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황제의 오른팔이었고 이제 어린 황제의 후견인이었던 그는 제국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황자와 황녀의 안전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는 30일 동안 500통의 편지를 써서, 모든 지방 총독과 대신들에게 황제가 살아있는 것처럼 임무를 수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7편에서 계속).



1330년대 칸타쿠지노스와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가계도




(1)라틴 제국은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세운 제국입니다. 1261년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뒤 멸망했죠.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라틴제국의 황제로 칭하고 남편이 죽은 후에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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