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니코스 3세가 세상을 떠난 후, 칸타쿠지노스는 모든 지방 총독과 대신들에게 500통의 편지를 써서 황제가 살아있는 것처럼 업무를 행하라고 명했습니다. 다행히 편지는 잘 전달되었고 장례식도 무사히 치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를 만났습니다. 칼레카스는 칸타쿠지노스의 도움을 받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고, 1334년 칸타쿠지노스에 의해 총대주교로 임명된 인물이었죠. 그는 칼레카스가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것과 섭정 자리를 노린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1330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생사를 오갈 때, 칸타쿠지노스에게 공동 황제직을 제안했었습니다. 하지만 11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안드로니코스의 아들 요안니스가 있기 때문이었죠. 이때 요안니스의 나이는 9살로, 섭정이 필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인이 된 선황의 벗이자 참모였던 칸타쿠지노스를 섭정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칸타쿠지노스는 부유한 귀족층의 대변인이었기에, 그가 섭정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안나 황후는 칸타쿠지노스의 여론이 나쁘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부터 칸타쿠지노스를 견제했던 그녀는 칸타쿠지노스가 어린 아들의 자리를 위협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녀는 칼레카스를 섭정으로 임명했습니다. 칼레카스는 시르기안니스의 반란과 에피로스 정벌로 선황이 콘스탄티노플을 비웠을 때, 섭정을 맡은 적이 있으니 섭정 자격은 내게 있다고 생각했죠. 그는 황후의 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황후 사보이의 안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안나와 칼레카스를 지지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그자는 바로 안드로니코스 2세 & 3세의 내전 때 칸타쿠지노스가 포섭했던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선황이 죽기 직전에 그를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해, (1)헬레스폰트로 보냈습니다. 아포카우코스는 칸타쿠지노스에게 황제가 되라고 부추겼지만 칸타쿠지노스가 귀담아듣지 않았기에 돌아선 것이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가 동료의 배신을 눈치챘을까요? 그는 황후와 총대주교에게 군사령관 직책을 내려놓겠다고 나섰습니다. (2)처음에는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한 미하일 시슈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 모였으나, 불가리아 문제는 뒷전이고 칸타쿠지노스의 섭정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보다못한 칸타쿠지노스가 사임을 자청하자, 황후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버리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누그러졌고 다시 군사령관직을 이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내부 문제를 해결한 뒤, 칸타쿠지노스는 군사령관으로서 할 일을 했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밀린 급여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는 세금 징수원 파트리키오테스가 야금야금 돈을 모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트리키오테스에게 죄를 눈감아 줄 테니 횡령한 돈을 병사들에게 분배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의 사비까지 포함해 금화 10만 개를 모은 뒤,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불하니 병사들은 칸타쿠지노스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칸타쿠지노스는 군대를 소집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났습니다. 동로마 국경 근처에서 불가리아의 차르 알렉산더르가 사촌의 송환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친구 우무르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진군시켰습니다. 탈탈 털린 알렉산더르는 조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갈리폴리 근처에 상륙하려는 튀르크군도 몰아냈습니다. 그는 황궁에서 자신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무렵, 칸타쿠지노스에게 모레아의 전령이 찾아왔습니다. 모레아 총독들이 항복하고 칸타쿠지노스를 황제로 받들겠다고 나선 것이었죠. 그들은 라틴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로마의 휘하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내 눈 앞에...!
칸타쿠지노스는 모레아 영토 수복을 '[9]로마 제국을 부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보고, 모레아 총독들이 오기만을 기다렸죠. 하지만 칸타쿠지노스에게 그들을 만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아포카우코스가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죠. 아포카우코스는 칸타쿠지노스에게 헬레스폰트에 상륙한 튀르크군을 몰아내라는 명을 받았지만 튀르크군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아예 콘스탄티노플의 지배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요안니스를 납치한 뒤 황후에게 가서 콘스탄티노플 통치권을 넘기라고 말했습니다. 황후가 칸타쿠지노스에게 소식을 전하자, 아포카우코스는 바로 도망쳤습니다. 1341년 9월, 칸타쿠지노스는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갔습니다.
이때 궁궐에서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칸타쿠지노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총대주교에게 '우리의 영웅'은 황궁으로 걸어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칸타쿠지노스가 황제와 동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황한 칸타쿠지노스는 황후에게 왜 저들을 불러들였냐고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아포카우코스를 어떻게 처리할지 황후와 논했습니다. 아포카우코스는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감시에 놓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아포카우코스에게 자비를 베풀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죠(또 실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안니스의 대관식을 치르되, 자신의 딸과 요안니스와의 혼인을 권했습니다. 황후는 둘 다 반대했습니다. 결국 칸타쿠지노스는 타협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도망친 아포카우코스를 찾는 게 우선이었죠. 1341년 9월 23일, 칸타쿠지노스는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이날이 어머니를 뵙는 마지막 날임을 알지 못했죠.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칸타쿠지노스는 자신의 군대가 주둔하는 디디모티호로 향하던 중, 아포카우코스를 만났습니다. 석방된 아포카우코스는 잘못했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청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아포카우코스의 죄를 용서해 주고 콘스탄티노플로 보냈죠. 측근들은 아포카우코스를 체포해서 디디모티호로 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칸타쿠지노스는 측근들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황궁은 칸타쿠지노스파와 황후와 총대주교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아포카우코스는 거지꼴로 황후에게 가서 싹싹 빌었습니다. 그리고 칸타쿠지노스의 어머니를 찾아가, 당신의 아들에게 평생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다음 칼레카스에게 가서, 칸타쿠지노스가 당신을 몰아내고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하려는 계책을 꾸민다고 속삭였습니다. 칼레카스는 아포카우코스의 진의를 의심했습니다. 팔라마스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수도 생활에 전념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포카우코스가 계속 입을 놀리자, 총대주교는 아포카우코스의 말을 믿고 '칸타쿠지노스 타도 작전'에 합류했습니다.
안나 황후도 아포카우코스의 말에 속아, 칸타쿠지노스가 자신의 아들을 몰아내려는 계책을 꾸민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하루 종일 황궁에 모여서 '칸타쿠지노스 타도 작전'을 모의했습니다. 그리고 칸타쿠지노스가 콘스탄티노플에 없는 틈을 타서 작전을 수행하죠. 첫째, 칸타쿠지노스의 장인 안드로니코스 아센을 포섭했습니다. 둘째, 섭정이 된 칼레카스는 '황위를 노리는 사악한 자'를 벌하자고 민중들에게 연설했습니다. 황후는 칸타쿠지노스의 모든 직책을 박탈하고 '디디모티호의 죄수'로 선언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독이 된 아포카우코스는 자신의 경호대를 이용해 시위대를 몰아내고 군중들을 자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칸타쿠지노스의 집에 침입해 세간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온갖 금은보화와 진귀한 물품이 나왔고, 이를 목격한 가난한 군중들은 분노했습니다.
우린 엄청 힘들게 사는데 너희는 우리 피 빨아서 이런 걸 모아?
요안니스 칼레카스의 직인(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칸타쿠지노스의 아내와 막내아들을 제외한 아이들은 칸타쿠지노스와 함께 디디모티호에 있었기에 안전했지만, 다른 친척들은 성난 군중을 피해 피신해야 했습니다.
디디모티호에서 칸타쿠지노스는 자신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파문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의 지지자들은 디디모티호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황후와 총대주교는 묵살했습니다. 아포카우코스가 손을 써 놓은 탓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재판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죠. 결국 1341년 10월 27일, 군대는 칸타쿠지노스를 황제로 선포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황제의 조끼를 입고 황제를 상징하는 자주색 부츠를 신은 뒤 서임식을 치렀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하얀 망토를 두르고 벗이자 '형제'였던 선황 안드로니코스 3세의 죽음을 애통해했죠. 칸타쿠지노스는 여전히 요안니스와 황후를 지위를 존중하고, 부제로 남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황후파의 입장에서 그는 '반역자'였죠. 그는 사절을 보냈지만 모두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11월 19일, 어린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한편, 칸타쿠지노스의 집에는 어머니와 막내아들만 남았습니다. 테오도라는 처음에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가, 1341년 말에 투옥되었죠. 집은 파괴당하고 그녀의 막대한 재산은 몰수당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그녀는 아포카우코스의 경호대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면서, 정신적인 괴롭힘을 주기도 했죠. 어느 날, 그녀의 몸이 펄펄 끓다가 쓰러졌습니다. 혹독한 겨울이었지만 불을 피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황후는 의사를 보냈지만, 경호대는 의사에게 감옥에 가면 칸타쿠지노스파로 몰릴 수 있다고 협박했습니다. 결국 다음 해 1월 6일, 테오도라가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3)칸타쿠지노스의 재산은 아포카우코스와 총대주교 등이 나눠가졌죠.
칸타쿠지노스가 황제로 선언된 후, 혁명의 기운은 동로마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민중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의 총독들은 칸타쿠지노스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민중들은 칸타쿠지노스가 자신들을 착취한다고 생각했고, 귀족들은 황실에게 보복을 당할까 봐 칸타쿠지노스를 선뜻 지지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혹독한 추위 탓에 원정을 벌일 수 없었기에,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내서 평화 조약을 맺자고 요청했습니다. 총대주교는 사절의 알현을 거부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칸타쿠지노스를 지지했던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두 안드로니코스의 내전 때 같이 활약한 친구 테오도로스 시나디노스였습니다. 테살로니카 총독인 시나디노스는 칸타쿠지노스에게 테살로니카의 성문을 열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1342년 3월, 칸타쿠지노스는 아내에게 디디모티호를 지키라고 한 뒤, 군대를 이끌고 테살로니카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테살로니카의 민중들은 그들에게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시나디노스는 테살로니카에서 쫓겨나고, 칸타쿠지노스의 지지자들은 숨거나 달아났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퇴각해야 했습니다. 이때, 아포카우코스의 함대가 군대를 이끌고 테살로니카에 도착했습니다(8편에서 계속).
(1)현재 터키의 다르다넬스 해협.
(2)4편에서 나온 시슈만의 아들입니다. 시슈만이 죽은 뒤 아들과 조카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싸우다가 아들이 패배해서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했습니다.
(3)할머니와 같이 감옥에 있었던 칸타쿠지노스의 막내아들은 5년 후,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