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살로니카의 민중들은 스스로를 (1)젤로트라 부르며 시나디노스를 쫓아냈습니다. 본인들이 칸타쿠지노스를 비롯한 귀족층에 대항하는 영웅이라고 생각했죠. 칸타쿠지노스의 지지자들은 숨거나 달아나버렸습니다. [10]2~3일 동안, 테살로니카는 적에게 점령당한 것처럼 재앙이란 재앙은 모두 일어났습니다. 젤로트는 밤낮으로 거리를 누비며 '칸타쿠지노스는 우리의 적'이라고 떠들어댔죠. 아포카우코스는 70척의 함대를 이끌고 손쉽게 테살로니카를 정복했습니다. 젤로트는 아포카우코스를 열렬히 환대했습니다.
정의가 승리한다.
민중들이 본인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깨달은 칸타쿠지노스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정의가 승리한다'라고 믿으면서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에서 소규모 교전을 벌였습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테살로니카에 접근할 수 없고 디디모티호로 가는 길도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테살리아와 에피로스에 있는 친구들에게 접근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지지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칸타쿠지노스는 세르비아로 망명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세르비아로 건너 간 칸타쿠지노스는 세르비아의 왕이자 그의 벗인 스테판 두샨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1342년 7월, 두 사람은 동맹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두샨은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세르비아에 양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아무리 친구라 해도 조국의 영토를 함부로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두샨은 더 혹할 만한 제안을 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가 콘스탄티노플로 갈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제안이었죠.
1342년 여름, 칸타쿠지노스는 두샨이 제공한 세르비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디디모티호로 향했습니다. 적군에게 길이 봉쇄된 탓에 다시 세르비아로 돌아가야 했죠. 이때, 안나 황태후는 아포카우코스와 칼레카스의 부추김을 받고 두샨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두샨은 사신의 뇌물을 거부하고 당분간 칸타쿠지노스와의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진짜 목표를 이룰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본심을 모르는 칸타쿠지노스는 테살리아의 지주들의 항복을 받아들이느라 여념 없었습니다. 그리고 친척 요안니스 앙겔로스를 테살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다행히 앙겔로스는 테살리아를 잘 통치했고, 에피로스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앙겔로스를 배후로 둔 칸타쿠지노스는 테살로니카를 제외한 북부 그리스 지역에 힘을 행사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원래부터 제국의 영역이었던 곳과 새로 영입된 곳이 내분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디모티호에 있는 아내가 걱정됐지만, 길이 막혀서 디디모티호로 갈 수 없었습니다. 종종 수도사로 살고 싶다는 유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1342년 말, 칸타쿠지노스는 다시 세르비아로 향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행군길을 나서게 된 병사들은 불만을 품었습니다. 세르비아로 갈 바에는 차라리 지옥으로 가겠다고 했죠. 아포카우코스 군대에게 길이 막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칸타쿠지노스를 따랐지만요. 두샨은 칸타쿠지노스를 다시 지원해주면서, 어떻게 해야 나한테 도움이 될지 철저히 계산하고 있었죠(슬슬 우정의 진가를 발휘할 때가 오는군요).
한편 칸타쿠지노스의 아내 이레네는 디디모티호에서 군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디디모티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군대에게 봉쇄당했습니다. 1342년 말, 수개월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지친 그녀는 불가리아의 알렉산더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알렉산더르는 바로 군대를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콘스탄티노플의 군대 때문에 힘든 판에 불가리아 군대까지 오자, 백성들은 더 괴로워했습니다. 주교는 7일 안에 저들이 물러날 것이니 저들을 붙잡아 두라고 했습니다. 주교의 예언은 정확했죠. 칸타쿠지노스는 친구 우무르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기 때문입니다. (2)우무르는 '형'이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괴로워하며, 소아시아에서 배 380척과 병력 29,000명을 이끌고 출항했습니다. 이레네는 대규모의 군대를 보고 놀랬습니다. 우무르는 디디모티호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칸타쿠지노스를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바로 혹한 때문이었죠. 수백 명의 튀르크군이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죽어나갔습니다. 따뜻한 소아시아에서 살던 우무르도 추위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무르는 생존자들을 이끌고 퇴각했죠.
불가리아의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1343년 초, 날씨가 좋아지자 칸타쿠지노스는 우무르를 찾아 나서지만, 우무르는 이미 소아시아로 떠난 뒤였죠. 그러나 칸타쿠지노스의 친구가 먼 곳에서 도우러 왔다는 소식이 북부 그리스 지역에 퍼졌습니다. 마케도니아 일부 마을이 그를 황제로 인정했고, 소식을 들은 테살로니카 남부에서도 마케도니아의 선례를 따랐습니다. 그는 테살로니카 전체를 접수하기 위해 테살리아에서 기병대를 소집했습니다. 두샨은 칸타쿠지노스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두샨이 친구를 경계하는 것을 아는 아포카우코스는 함대를 이끌고 테살로니카로 진군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칸타쿠지노스는 앙겔로스를 테살로니카에 보냈습니다. 이를 모르는 우무르가 친구를 돕기 위해 함대 60척을 끌고 등장했습니다. 아포카우코스는 전의를 잃었죠. 하지만 테살로니카에 남은 젤로트는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결국 성벽은 뚫리지 않았고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죠.
우무르와 싸우느라 아포카우코스가 힘을 잃어가자, 디디모티호의 봉쇄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디디모티호로 가서 군대를 지키는 아내를 만났습니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나의 폐하이시여.
'[11]그들의 황제가 지옥에서 오래 머물다 살아난 것처럼'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황후에게 아첨해야 더 이득을 본다고 생각한 두샨은 칸타쿠지노스에게서 발을 뺐습니다(이제 우정의 진가를 발휘했군요). 하지만 모든 친구가 칸타쿠지노스를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무르뿐 아니라 오스만 베이국의 베이 오르한하고도 친분을 쌓았죠. 그는 튀르크군을 불러들인 뒤, 디디모티호와 콘스탄티노플의 접견 지역인 트라키아에서 황태후-총대주교-아포카우코스파와 싸웠습니다. 전쟁은 지지부진했고 식량도 떨어져 갔습니다. 제노바인들은 다른 곳에서 몽골군과 싸우느라 식량 보급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황태후파와 칸타쿠지노스파 모두 힘들어했습니다. 결국 1343년 8월, 황태후는 베네치아와 평화조약을 맺은 뒤, 왕관의 보석을 베네치아에 담보로 맡기고 (3)30,000두카트를 빌렸습니다. 빚을 갚을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죠,
빨간색이 디디모티호, 초록색이 콘스탄티노플, 빗금 친 영역이 트라키아이다(출처: 위키백과)
칸타쿠지노스에게 상황이 유리해지자 아포카우코스는 점점 절박해졌습니다. 우무르의 군대가 떠난 것을 알고 디디모티호를 공격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아포카우코스와 총대주교는 칸타쿠지노스에게 서신과 함께 사절단을 보내 황제 칭호를 내려놓으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는 6일 동안, 서신에 있는 내용을 반박했습니다. 먼저, 그는 1341년에 있었던 일을 읊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치기 전까지 황태후와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아포카우코스와 총대주교가 튀르크군을 불러들여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황폐화시켰다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알려준 건 그들이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들의 수많은 서신을 인용하면서, 파문은 신앙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을 때 하는 것이지, 정치적인 이유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파했고요. 그러자 사절단은 안나 황태후의 명만 받았을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서신을 쓸 테니 황태후에게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서신을 보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황태후가 아포카우코스와 총대주교의 편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죠.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트라키아는 점점 칸타쿠지노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요안니스 바타치스를 포함한 아포카우코스 진영의 사람들이 칸타쿠지노스에게 항복했죠. 바타치스는 그에게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칸타쿠지노스의 편이 된 사람들 중에 아포카우코스의 아들도 있었습니다. 아포카우코스는 더 큰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기세를 몰아 트라키아 대부분을 정복하고 1345년이 되자,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보이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아포카우코스의 군대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이 그를 만나러 왔습니다.
이틀 동안, 칸타쿠지노스는 수도사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려고 애썼습니다. 서방 교회에서 튀르크인과 연결된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튀르크군을 처음 불러들인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들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들이 감옥에 갇혔다고 한탄한 뒤, 나와 총대주교 사이를 중재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황제가 아닌 개인 시민으로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다면, 나의 지지자와 친척들이 풀려날 수 있다면, 속세에 미련을 버리고 아토스 산으로 은퇴하겠다고 덧붙였죠. 수도사들은 칸타쿠지노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 황제의 금색 인장으로 봉해진 서신을 들고 떠났습니다.
수도사들은 총대주교의 서신을 들고 칸타쿠지노스를 찾아왔습니다. 또 거절당했습니다. 아포카우코스가 자기를 이용하는 것을 알게 된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군을 풀어 콘스탄티노플 교외를 황폐화시킨 뒤, 아드리아노플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우무르가 다시 나타나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디디모티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불가리아로 향했습니다. 불가리아를 신나게 약탈하고 슬라브족 군 지도자를 전사시켰을 때, 두샨이 세레스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두샨은 칸타쿠지노스 몰래 발칸 반도 내 동로마의 영역을 야금야금 먹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칸타쿠지노스가 세레스로 향할 때,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아포카우코스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9편에서 계속).
(1)젤로트는 자신들의 대의에 '열과 성을 다하는' 열성분자를 뜻한다.
(2)칸타쿠지노스가 1295년생으로 추정되고 우무르가 1296년생이니, 나이상 칸타쿠지노스가 형이었다고 추측됩니다.
(3)당시 베네치아의 화폐 단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