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에서 정권을 잡은 아포카우코스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폭정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정치범을 추방시키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늘어나는 죄수들을 가두기 위해 새로운 감옥까지 만들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매일 누가 오는지 살펴보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던 아포카우코스는 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공사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호위병을 동원하지 않고 감옥에 갔습니다. 이때 죄수 한 명이 나무로 그를 때려눕혔습니다. 이틈에 다른 죄수들이 몰려와 그의 목을 자르고 기둥에 매달았죠.
나무에...목이!!
아포카우코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안나 황태후는 경악했습니다. 그녀는 아포카우코스의 추종자들에게 복수를 허락했습니다. 추종자들은 미친 듯이 200명가량 되는 죄수들을 살해했고, 그중 대부분은 무고한 자들이었습니다.
한편 칸타쿠지노스는 아포카우코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섣불리 콘스탄티노플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두샨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세레스로 행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레스로 가던 중, 동행한 이웃 베이국 아미르의 아들 쉴레이만이 죽었습니다. 튀르크군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쉴레이만의 부하들은 우무르 때문에 주군이 죽었다고 비난했습니다. 화가 난 우무르는 자신의 군대를 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혼자가 된 칸타쿠지노스는 회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칸타쿠지노스가 디디모티호로 돌아오자, 희망찬 소식이 들렸습니다. 칸타쿠지노스를 지원하기 위해 아포카우코스의 아들이 테살로니카에서 젤로트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이었죠. 하지만 머지 않아 아포카우코스의 아들 역시 부친처럼 살해당했습니다. 이와 중 칸타쿠지노스의 편을 들었던 바타치스가 다시 배신하려고 했습니다. 바타치스는 칸타쿠지노스를 지지했던 튀르크군에게 살해당했지만, 이판사판이 된 칸타쿠지노스는 바로 군대를 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실패했습니다. 한때 친구였던 두샨이 사건 하나를 크게 터뜨렸기 때문입니다.
두샨은 세레스를 점령한 뒤, 테살로니카까지 노렸습니다. 성공이 눈앞에 다가오자, 자신만만해진 두샨은 1346년 4월 16일에 대관식을 치르고 '세르비아와 로마 황제'를 자칭하였습니다. 5월 16일, 칸타쿠지노스도 두샨에게 맞서기 위해 아드리아노플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부하들은 칸타쿠지노스에게 장남 마타이오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는 거절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선황의 아들 요안니스를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훗날 콘스탄티노플에서 정식으로 즉위하면, 자신의 딸과 요안니스를 혼인시켜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다음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아드리아노플로 오자 주교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한창 헤시카즘 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헤시카즘을 이단으로 규정한 칼레카스는 헤시카즘을 지지한 팔라마슬를 파문했죠. 주교들은 칸타쿠지노스뿐 아니라 팔라마스까지 내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칼레카스를 파문하기로 결정했죠. 칸타쿠지노스는 이들의 결정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주교들이 떠나자, 칸타쿠지노스는 특별한 제안을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스만의 오르한이 사절을 보내, 칸타쿠지노스 딸과의 혼인을 간청한 것이었죠. 칸타쿠지노스 입장에서, 오르한을 사위로 삼으면 본인의 세력을 키울 뿐 아니라 두 나라 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장교들, 우무르와 이 문제를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장교들은 든든한 후원자를 둔다는 생각에, 우무르는 순전히 친구를 위해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이레네는 딸이 야만적인 외국 통치자에게 시집가는 것에 불쾌해했으나, 몇 달 뒤 결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결국 찬성했다고 추측됩니다. 그리고 칸타쿠지노스가 원했던 대로, 오스만은 7년 동안 동로마를 침공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칸타쿠지노스는 셀림브리아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마타이오스를 아드리아노플 총독으로 임명했죠. 아드리아노플은 콘스탄티노플 코앞에 있었기에, 안나와 칼레카스는 칸타쿠지노스가 자기 사람을 인근 도시에 꽂아 넣어서 자신들을 감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튀르크인 자객을 고용해 칸타쿠지노스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자객들 일부가 칸타쿠지노스 편으로 넘어가면서 암살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칸타쿠지노스를 지지하는 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셀림브리아로 가서 어떻게 콘스탄티노플을 뚫을지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언제 (1)금문에서 만날지 정했죠. 지지자들이 떠난 뒤, 칸타쿠지노스는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콘스탄티노플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빨간원이 아드리아노플(현: 에디르네)이고 분홍원이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이다(출처: 위키백과)
한편 아포카우코스가 죽은 후, 황태후와 총대주교의 사이는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칸타쿠지노스와의 협상 문제로 추정됩니다. 아마, 안나는 칸타쿠지노스와 협상을 원했던 것 같은데 막상 협상하면 더 큰일이 벌어질까 봐 주저했을 것이고, 칼레카스는 협상을 반대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칼레카스의 평판이 나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1347년 2월 2일, 주교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도 정치적인 이유로 칸타쿠지노스를 파문한 칼레카스를 좋게 보지 않았죠. 칼레카스는 항변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회의는 몇 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밤, 칸타쿠지노스가 군대를 끌고 금문에 도착했습니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공모자들은 벽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와 병사들은 구멍을 통해 성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죠. 그는 5년이나 콘스탄티노플을 비웠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지리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황태후의 궁으로 행진했습니다. 걱정이 된 황태후는 제노바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전에 칸타쿠지노스측에게 목격되었기 때문에 황태후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태후폐하, 전쟁은 모두를 피폐하게 만듭니다. 소신에게도 잘못이 있사오니 이제 자리를 마련해 해묵은 한을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황태후를 타일러서 항복을 권유하게 했습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주교들을 부른 뒤, 내전을 치르느라 튀르크군을 불러들인 점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사절을 보내 황태후와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지친 황태후도 사절을 보냈습니다. 그녀가 보낸 사절은 칸타쿠지노스의 장인 안드로니코스 아센과 아포카우코스가 모함했던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였습니다.
현재 이스탄불에 있는 금문 유적지(출처: 핀터레스트)
1347년 2월 8일, 칸타쿠지노스는 황태후에게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 요안니스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겠다고, 그러니 양측 모두 원한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대신, 나와 요안니스는 공동황제로 군림하되, 10여 년간 요안니스는 연장자인 나를 존중해야 하고 10년이 지나면 서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가 내민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칸타쿠지노스를 황제로 인정하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당당하게 황궁으로 입성했습니다. 거리를 행진한 뒤, 그는 아포카우코스가 가둔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병사들에게 약탈과 파괴를 금지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칸타쿠지노스의 입지도 달라졌죠. 수년 전 칸타쿠지노스에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던 백성들은 그의 귀환을 환영했습니다.
[11]그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콘스탄티노플 백성들은 황제를 보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황제의 발을 붙잡고 얼싸안고 기뻐하였다. 황제는 수많은 불운을 겪고 변해버린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면서도, 백성들과 같이 행복해하였다...... 고통에 짓눌렸던 모든 이들이여....... 새로운 황제가 나타나 행복을 되찾고, 새로운 삶을 얻었느니라. 행운을 상징하는 불사조(500년마다 부활하는 전설 속의 새, 이집트 신화의 벤누라는 새에서 기원하였다 - 옮긴이)의 부활에 환호하던 이집트인처럼, 이날을 기뻐하리.
-(2)데메트리오스 키도네스
(10편에서 계속)
(1)콘스탄티노플 앞에 있는 성문.
(2)동로마의 역사가이자 관료. 테살로니카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인해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었다가 칸타쿠지노스가 황제가 된 뒤 총리로 중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