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요안니스 6세의 치세-1: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동로마)
소신들은 오로지 폐하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1347년 2월 9일, 칸타쿠지노스는 부하들에게 황태후와 요안니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부하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칸타쿠지노스만을 따르겠다고 외쳤죠. 결국 사흘간 설득한 끝에 부하들의 충성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딸 헬레네와 요안니스의 약혼식을 치르게 했습니다. 어린 황제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요. 이렇게 칸타쿠지노스와 요안니스는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총대주교가 없으면 콘스탄티노플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빨리 파문당한 전(前) 총대주교 칼레카스를 재판에 넘기고 새로운 총대주교를 선출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1347년 3월, 종교 회의를 열었습니다. 먼저, 종교 회의에서 칸타쿠지노스를 황제로 임명하는 칙령이 반포됩니다. 그리고 팔라마스의 친구 이시도로스를 총대주교로 선출했습니다. 이시도로스는 총대주교로 서임되자마자 칼레카스가 칸타쿠지노스에게 내린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그리고 팔라마스를 테살로니카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궁정에 아직 칸타쿠지노스와의 화해를 거부한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전(前) 총대주교 칼레카스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칼레카스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빠른 시일에 재판정으로 출두하시오.
칼레카스는 순순히 칸타쿠지노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재판할 날이 다가오자 칼레카스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교들이 여러 번 요구해도 소용없었죠. 결국 디디모티호로 질질 끌려갔습니다. 몸도 상하고 실의에 빠진 칼레카스는 시름시름 앓다가, 1347년 12월에 사망했습니다.
이제 두 명의 황제가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를 때가 왔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에서 치러야 하지만, 얼마 전에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성당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결국 인근 교회에서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347년 5월 21일, 이시도로스의 주례 하에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이시도로스에게 자신의 왕관을 받은 뒤, 아내 이레네에게 황후의 왕관을 씌워주었습니다. 의식이 끝난 뒤, 말을 타고 행렬하고 궁궐에서 연회를 벌였죠. 사람들은 황제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황제는 유리 왕관을 쓰고 있었고, 잔치용 접시는 놋쇠와 진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진짜 보석 왕관은 베네치아에 저당잡혔습니다. 옛날, 제국의 화려했던 영광은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일주일 후, 요안니스와 헬레네도 같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이렇게 칸타쿠지노스 가문과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표면상으로 화합을 이루었습니다. 중요한 의식들이 끝나자, 황제 요안니스 6세가 된 칸타쿠지노스는 관례대로 서훈 명단을 발표했습니다(편의상, 계속 칸타쿠지노스라고 표기하겠습니다). 먼저, 차남 마누일에게 모레아 친왕직을 하사했습니다. 장남 마타이오스에게는 처음 보는 작위를 만들어서 주었습니다. 친왕보다는 높고 황제보다는 낮은 작위였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칸타쿠지노스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군이 요안니스를 위해 꼼수를 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하들은 마타이오스에게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황제의 권리를 주장하라고 부추겼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공동황제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마타이오스도 아버지의 처신을 못마땅해하던 차였죠. 아들과 부하들의 행각을 알게 된 칸타쿠지노스는 매우 화가 나서 이레네를 불렀습니다.
어서 저놈을 말리시오. 어서!
이레네는 마타이오스를 찾아가서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그 덕에 마타이오스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부하들은 처벌받았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아들을 달래기 위해 디디모티호와 트라키아에 있는 넓은 땅을 다스릴 권한을 주었습니다. 마타이오스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당분간' 요안니스에게 충성심을 유지했습니다.
이제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내전도 끝났고 새로운 총대주교도 선출했습니다. 정식으로 대관식도 치르고, 결혼식도 마쳤죠. 하지만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마타이오스의 반항은 시작에 불과했죠. 그해 여름, 흑사병이 제국을 강타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막내아들 안드로니코스가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흑사병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국의 상황은 말도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죠. [12]데메트리오스 키도네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흑사병 환자가 갈수록 느는 통에 사람들은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아버지는 자식이 죽어도 묻지 못하고, 자식도 아버지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의사는 속수무책이 되었다'라고 합니다.
당시 막내의 나이는 13살이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8편에서 테살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친척 앙겔로스도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죠. 하지만 마냥 슬픔에 빠져 지낼 수 없었습니다. 총독의 죽음으로 그리스 북부 지역이 무주공산이 된 틈을 타, 두샨이 그곳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동로마에서 흑사병은 1년여간 지속되었고, 두샨은 알바니아, 에피로스, 테살리아까지 정복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동로마의 영토를 정복해 '세르비아와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 두샨의 야망이었죠. 테살로니카만이 간신히 두샨의 손길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 친구들에게 다시 도움을 청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절친 우무르는 자신의 나라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상황이었습니다. 남은 사람은 사위 오르한뿐이었죠. 오르한은 언제든지 장인이 원할 때면 도우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가 요청을 하든 말든 상관없었습니다. 마음먹으면 무조건 도와야 했죠.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헬레네와 요안니스의 결혼식이 끝난 직후, 오르한은 요안니스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습니다. 나이와 직책에 상관없이 잠재적 반역자를 죽이는 것이 튀르크인의 관습이었기 때문이죠. 칸타쿠지노스는 오르한을 저지한 뒤, 요안니스를 자신의 곁에 두고 일일이 감시했습니다. 그 와중 전령이 와서 칸타쿠지노스에게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헬레스폰트에...튀르크놈들이...!!!
헬레스폰트는 오스만과 동로마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강이었습니다. 1348년, 두샨의 침공 소식을 들은 오르한이 임의로 튀르크군을 보낸 것이었죠. 트라키아 해안에 상륙한 튀르크군은 인근 지역을 약탈하고 다녔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사전에 논의하지 않고 강을 건넌 튀르크군을 보고 놀랬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튀르크군을 내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두샨을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었죠. 당시 동로마는 안드로니코스 2세 때 해군을 해체한 이후, 갈라타에 있는 제노바인에게 함대를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노바 함대는 흑사병을 퍼뜨리는데 톡톡한 기여를 하고 있었죠. 그는 제노바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상선 함대와 군함을 재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국고는 텅 비었고, 칸타쿠지노스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습니다. 시민, 상인, 군인, 백성, 수도원장, 귀족 등 지위와 신분을 막론하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불러들였죠.
우리는 지금 너무도 약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남에게 멍에를 씌우기는커녕 우리의 멍에를 벗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다시 일어나 우리의 친구들이 존중하고 우리의 적들이 두려워하는 제국을 건설합시다. 만약 그 반대로 우리가 좌절로 인해 비난받아 마땅할 나태에 빠진다면 우리는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에 중간이란 없습니다. 고대의 미덕을 되찾아 제국을 구하거나, 아니면 실패하고 정복자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고귀한 결정을 내리십시오. 여러분의 영광과 안전과 자유와 생명을 위해 행동에 나서십시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1347년 기금 모금을 호소하며(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발췌)
사람들이 모이자 칸타쿠지노스는 제국의 상황을 장황하게 알립니다. 제국은 오랜 내전과 지진, 흑사병 때문에 황폐화되었고, 거리에 빈민이 즐비하다, 세금을 걷지 못해 국고가 비었고 왕관의 보석까지 저당잡혔다, 군대에게 식량과 급여도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요. [13]그리고라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황실의 금고에는 공기와 먼지, 에피쿠로스의 원자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황의 밑에서 재무장관으로 활동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재무장관은 법관처럼 사회질서와 법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내게 협조해서 빈부 격차를 해소하자고 설파했습니다. 이상을 설파하기에는 너무 일렀던 것일까요? 야유가 터져 나옵니다. 특히, 대금업자나 환전상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려는 칸타쿠지노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말을 해도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결국 칸타쿠지노스는 강제로 돈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콘스탄티노플에 물품을 내리는 선박들의 관세를 일부러 낮췄습니다. 당시 갈라타에 있는 제노바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오가는 배와 중개무역을 하면서, 이득을 보고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관세를 낮춰서 직거래를 추진했습니다. 제노바인들은 가뜩이나 칸타쿠지노스가 독자적으로 배를 건설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무역에서까지 소외시키니 격분합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제노바인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없었죠. 그는 특별 감독관을 파견해 세금을 걷고, 부자들에게 돈을 기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동로마 사람들은 황제에게 불만을 품었지만, 기꺼이 명을 따라야 했습니다. 제노바인의 침략을 막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제노바인들은 콘스탄티노플 해안을 멋대로 침략해 방파제와 부두를 공격하고 배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때 콘스탄티노플 방어는 칸타쿠지노스의 가족들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병에 걸려 디디모티호에서 요양을 하다가, 1348년 10월 1일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빨리 선박을 건조하고 장비를 준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돈은 꽤 많이 모였지만, 바닷길을 제노바인이 막고 있었기에 목재를 운반하느라 시간이 많이 소비됐습니다. 1349년 3월 초가 되어서야 제노바인과 교전했습니다. 동로마군의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급하게 선박을 건조했지만, 선원들 대부분 전함을 조종한 경험이 없었고 항해나 해군 전술에 대한 지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안개가 자욱하고 배가 심하게 흔들렸기에, 선원들은 갑작스러운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신의 분노'를 샀다고 생각했죠.
제노바인들은 동로마군이 도망치거나 물에 빠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신이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제노바인들은 비어 있는 동로마 배를 끌고, 합의를 위해 황궁으로 향했습니다. 무역권을 되찾는 것이 중요했죠. 그런데 갈라타의 제노바인들이 협상을 하기 전에, 제노바 본국에서 보낸 배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습니다. 제노바 대사들은 황제와 협상해서, 10만 히피르피론이 넘는 배상금을 바치겠다고 합의하고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감독관이 유실된 배의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많은 돈을 갈취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감독관이 세금을 적절히 모았고, 그 세금은 오로지 함대를 위해 쓰였을 뿐이라며 백성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민중들에게 더 이상 애국심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국고를 채우고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강압적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먼저, 자국 시장을 보호하고 제노바에 의한 무역 의존권을 없애기 위해, 갈라타를 거치지 않은 외국 함대에게는 관세를 줄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수입하는 곡물과 외국으로 수출하는 와인에 세금을 부과했죠. 중개무역을 하는 상인들은 두 배로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세금을 거둔 뒤, 200척의 함선을 건조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 때 해체된 해군을 재건하고 항구를 개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제노바가 점령한 키오스 섬을 돌려달라고 요청한 뒤, 제노바가 매년 임대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협상을 끝냈습니다. 베네치아하고도 무역을 재개하고, 매년 무기와 장비를 동로마가 지급받기로 약조했죠. 이처럼 칸타쿠지노스는 나라를 안정시켰지만, 진짜 적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11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