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연수 Jan 04. 2022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11)요안니스 6세의 치세-2: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동로마)

칸타쿠지노스는 제노바와 평화 조약을 맺은 뒤, 베네치아와 외교를 재개하려고 했습니다. 베네치아는 순순히 칸타쿠지노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베네치아에는 여전히 안나 황태후가 맡긴 보석 왕관이 있었고, 동로마는 아직 이자도 제대로 갚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칸타쿠지노스를 화나게 한 소식은 따로 있었습니다.


감히 상인 놈들이 제국의 왕관을..!!


베네치아 조정에서는 어차피 돈을 돌려받지 못할 테니, 왕관을 팔아서 수익이라도 챙기자는 말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바로 청구서를 들고,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대사들을 찾아갔습니다. 베네치아의 조치에 항의할 겸, 1342년에 맺은 평화 조약을 갱신하려는 목적이었죠. 대사들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전액을 상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칸타쿠지노스는 대사들과 논의한 뒤, 규정된 금액의 6분의 1을 선불했습니다. 남은 금액은 할부로 지불하겠다고 약조했죠. 그리고 1349년 9월 9일,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까지 부른 뒤, 금괴로 서명하고 날인했습니다. 베네치아에게 무기와 장비 보급도 약속받으면서, 베네치아와의 협상도 일단락되었습니다.


황제는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렸습니다. 먼저 이집트 술탄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술탄은 칸타쿠지노스의 즉위를 축하해 주기도 했죠. 그다음, 내전을 치르느라 뒷전으로 미루어두었던 서방 교회와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실 1347년 가을, 그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서신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서신을 통해 내전 당시 튀르크군을 고용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교황은 튀르크에 대항하여 유럽 기독교 동맹을 모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부상하는 튀르크 세력에 맞서 서부 기독교인의 무역로를 지켜서 이익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죠. 그들은 황제의 친구 우무르의 주요 활동지인 스미르나 항구를 노렸습니다. 1348년 3월 초, 칸타쿠지노스는 교황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는 기꺼이 지원해 주겠다고 약조했습니다.


그런데 4월, 황제는 우무르에게 세르비아에 맞설 군대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우무르는 스미르나에서 교황의 동맹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자기가 보낸 군대 때문에 죽마고우가 죽자 매우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칸타쿠지노스는 황제였습니다. 본인의 감정과 황제의 의무는 별개였죠. 그는 교황의 사절들과 서방 교회(가톨릭)와 동방 교회(그리스 정교회)의 통합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때, 그는 종교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기 시작했죠. 그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본심을 털어놓기로 결심하고, 1350년에 클레멘스 6세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심히 중대한 순간이니 세계 공의회를 소집해 동방과 서방 주교들이 논의할 자리를 마련코자 합니다. 고로 제 의견에 동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는 서신을 통해 교회 통합을 건의했습니다. 동방과 서방의 주교들이 모두 모여 교리를 진중하게 논의하고 서로의 교리를 쉽게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했죠. 이를 위해 로마 교황청과 동로마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 세계 공의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칸타쿠지노스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서방 주교들은 교회를 통합하면 교황의 권위가 훼손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결국 1352년 6월 클레멘스 6세가 선종하면서 교회 통합 논의는 흐지부지되었습니다.


한창 교회 통합을 논의할 때 황제가 진행하던 일이 또 있었습니다. 1340년대, 동로마의 영역은 콘스탄티노플과 트라키아와 테살로니카 정도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제국이 그리스 일대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뻗어나갈 것으로 기대했죠. 그는 그리스 일대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모레아의 지배권을 굳건히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349년, 황제는 제노바 분쟁이 끝나자마자, 차남 마누일을 모레아 친왕으로 임명했습니다. 마누일은 제노바 분쟁 때 콘스탄티노플에서 항전했죠. 마누일은 모레아로 간 뒤 1380년에 사망할 때까지 무난하게 자신의 영지를 다스렸습니다. 황제는 다른 가족들에게도 작위를 배분했습니다. 사위 니키포로스에게는 트라키아 통치권을 주었습니다. 또 다른 사위 요안니스는 공동황제였죠. 마타이오스도 아직 조용히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권력을 나누어서 불만을 잠재우려는 목적이거나, 황제가 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 일을 배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훗날 또 내전이 터지는 것을 보면, 옳은 처사였는지 의문이 듭니다.


1350년 지중해 영역의 지도, 보라색이 동로마 제국이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내부 정리를 한 황제는 이제 진짜 적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두샨의 손아귀에 놓인 테살로니카를 구원해야 했죠. 테살로니카를 점령한 젤로트는 여전히 팔레올로고스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와 친한 팔라마스가 테살로니카 주교로 임명됐지만, 그들은 팔라마스를 주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교회법에 따라 선출된 주교이니 팔라마스를 영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도시 한복판에서 황제의 서신을 불태웠죠. 그러자 젤로트당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정신 차려라, 안 된다, 왜 안 되냐라고 옥신각신할 때, 어떤 인물이 나섰습니다.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의 아들 알렉시오스가 황제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테살로니카는 이미 세르비아 군대에게 포위되었고 두샨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신을 받은 칸타쿠지노스는 잠깐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일단, 두샨에게 세르비아 군대의 철수를 요청했습니다.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튀르크군을 끌어들여 두샨을 위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오르한에게 전령을 보냈습니다. 1348년 봄이 되자, 오르한은 장남 쉴레이만이 이끄는 2만 명의 기마부대를 보냈습니다. 황제는 마타이오스에게 트라키아에서 튀르크군과 합류해 테살로니카로 진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오르한은 도중에 쉴레이만에게 돌아오라고 지시했고, 혼자가 된 마타이오스는 매복 상태였던 세르비아군에게 공격당했죠.


한편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와 함께 배를 타고 테살로니카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르비아군 지휘관과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는 우정의 카드를 이용해 지휘관을 포섭한 뒤, 포위를 뚫고 테살로니카에 도착했습니다. 테살로니카 시민들은 칸타쿠지노스의 편을 들지 말지를 놓고 싸우고 있었죠. 그들은 '진정한 황제' 요안니스를 보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손쉽게 테살로니카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뒤, 젤로트당 중에서 세르비아와 내통한 자를 축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성벽 주위에 진을 치던 세르비아군도 쫓겨났고요. 그리고 팔라마스의 주관 하에 남은 젤로트의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팔라마스는 '로마 제2도시'를 나락으로 빠뜨린 그들에게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황제의 요구를 떠올리고 자비를 베풀었죠.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수는 없었습니다.


바토페디 수도원에 있는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칸타쿠지노스는 기세를 몰아 테살로니카 주변에 있는 베로이아와 에데사를 점령했습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그 지역의 다른 도시들도 칸타쿠지노스를 황제로 인정했죠. 그는 테살리아로 진군했습니다. 테살리아 국경에 있는 세르비아 성은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곧 항복하자는 목소리가 세르비아 국경 안에서 들리기 시작했고, 두샨을 버리고 칸타쿠지노스의 편에 서는 장군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때 두샨은 북쪽의 헝가리와 전쟁하던 중이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의 소식을 들은 두샨은 바로 테살로니카로 진군했죠. 칸타쿠지노스도 두샨의 소식을 듣고 무장한 경비병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가 된 두 사람은 테살로니카 근처에서 경비병을 대동한 채, 회담을 개최했습니다. 두샨은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냐고 책망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배신할 의도는 없었다며, 그리 느껴지게 했다면 사과하겠다고 했습니다.


허나, 먼저 약조를 어긴 사람은 자네였네. 이 점을 잊지 말게.


그래도 짚어야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는 두샨이 점령한 에피로스와 테살리아, 마케도니아를 돌려달라고, 그러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샨은 베네치아에 갈라타와 에피로스를 넘겨줄 테니, 내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을 예전에 제안했었죠. 본인의 과거를 떠올렸을까요? 두샨은 내가 잘못한 것도 있다고 하면서, 타협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14]'세르비아의 노예가 된 그리스인 해방 전쟁'을 갈망했던 칸타쿠지노스는 두샨과의 타협을 원치 않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스의 지도, 빨간줄이 테살로니카이고 연두색 줄이 베로이아, 에데사이다(출처: 월드맵)



결국 1350년 12월, 일련의 논의를 거친 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1342년 이후 8년 만에 다시 맺은 조약이었죠. 마케도니아는 두 나라에 분할되고 에피로스와 테살리아는 동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1351년 1월에 출항했습니다. 그는 테살로니카에 국기를 게양한 뒤, 요안니스에게 테살로니카를 맡겼습니다. 남은 젤로트들을 달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테살로니카의 실질적 지배권을 쥔 사람은 칸타쿠지노스의 장인 아센이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테살로니카를 떠났습니다. 두샨이 젊은 황제 요안니스 5세를 위해 일하는 척하면서, 다시 내전을 부추길 것을 예측하지 못했지요(12편에서 계속).






이전 10화 슬픈 즉위식, 옛날의 영광을 기대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