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인과 사위의 내전-1: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동로마)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칸타쿠지노스는 이시도로스 총대주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시도로스는 칸타쿠지노스의 친구이자, 그를 황제로 추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의 또 다른 친구 칼리스토스가 후임으로 선출되었지만, 당시 동로마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칼리스토스 선출을 놓고 말이 오갔습니다. 칼리스토스는 팔라마스와 황제의 친구였는데, 팔라마스가 헤시카스트 수사였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헤시카스트는 헤시카즘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15]헤시카즘의 사전적 의미는 '동방 정교회에서 전해지는 기도에 관한 신비로운 전통'입니다. 기도와 묵상을 거듭하여 신과 합일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원래 그리스 북부의 아토스 수사들이 행하던 의식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수사 발람이 콘스탄티노플에 오면서 헤시카즘은 동로마 종교계에서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가 황제가 되기 10년 전, 1337년 수사 발람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습니다. 서양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발람은 헤시카즘을 이단으로 규탄했습니다. 헤시카스트의 대표였던 팔라마스는 하느님의 본질과 행동을 구분했는데, 이는 스콜라 철학의 교리와 어긋났습니다. 결국 헤시카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공의회가 다섯 번 열렸습니다. 1341년 첫 번째, 공의회에서 발람은 이단자로 규탄당한 뒤 이탈리아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공의회 4일 후, 안드로니코스 3세가 병으로 죽고 헤시카즘 반대파였던 총대주교 칼레카스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한창 칸타쿠지노스와 내전을 벌일 때였습니다. 이제 종교 문제는 정치 문제로 번졌습니다. 칼레카스는 헤시카스트의 대표 주자이자 칸타쿠지노스의 지지자였던 팔라마스를 파문했습니다. 이 무렵, 칸타쿠지노스는 수도원 생활에 이끌리기 시작했습니다. 헤시카즘의 본질도 이해했죠. 이유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팔라마스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인지, 헤시카즘 자체에 매료되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칸타쿠지노스는 반헤시카스트에게 헤시카즘의 교리를 이해시키고자 했습니다. 교리 이해를 위해, 정치적 야망이 사라지고 온전히 신학에 몸담을 각오가 되어 있을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순간이 다가옵니다.
1351년 5월 28일, 총대주교 선출 문제를 놓고 헤시카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황제는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발람과 칼레카스 모두 죽은 상황이었기에 헤시카즘파에게 유리하게 재판이 진행됐습니다. (1)먼저, 1341년과 1347년 공의회의 결정들을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반헤시카스트에게 항변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폐하께서 어찌 이단의 편을....
황제의 친구이자 신학자인 니키포로스 그리고라스가 나섰습니다. 그리고라스는 자신의 친구인 황제가 헤시카즘을 지지한다는 사실에 비통해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회의의 공정성을 위해 친구의 항변을 끝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칼리스토스가 총대주교로 선출된 뒤, 황제와 칼리스토스는 공의회 칙령에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8월 15일, 황제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칙령을 엄숙히 발표했습니다. 헤시카즘이 정통 신앙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의 칙령은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 등 동유럽 정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라스는 저항하다가 1361년에 세상을 떠났고 7년 뒤, 팔라마스는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종교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바로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전쟁에 휘말렸습니다. 제노바가 무역로를 통제하자, 1350년 8월 6일 베네치아는 제노바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동로마의 영역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베네치아 사절은 황제에게 동맹을 맺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오랫동안 내전에 시달린 칸타쿠지노스는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노바인이 콘스탄티노플 해벽 위로 돌을 쏟아붓자 마음을 바꿔 베네치아의 편에 섰습니다. 1351년 여름, 그는 베네치아에 인력, 선박, 돈을 제공하겠다고 직접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노바인의 거점인 갈라타를 봉쇄했습니다. 그런데 10월, 이탈리아의 제노바 본국에서 함대를 보내자 베네치아 함대는 철수했습니다. 결국 황제 혼자 제노바군을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예상대로 동로마군이 패배했습니다. 1352년 5월 6일, 칸타쿠지노스는 제노바와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제노바인들이 원하는 대로 갈라타를 요새화하고 확장하는 것을 허용해야 했습니다. 키오스 섬도 계속 제노바의 손에 남겨둬야 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칸타쿠지노스에게 상처를 준 것은 사위 오르한이 제노바의 편에 섰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네치아를 경계한 오르한은 장인의 만류를 거부하고 갈라타에 보병과 기병을 보냈습니다.
1351년 여름, 칸타쿠지노스가 베네치아와 어쩔 수 없이 조약을 체결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세르비아 황제가 몰래 테살로니카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테살로니카에서 요안니스와 두샨이 내통해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두샨은 몰래 사람을 보내 요안니스를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이미 너를 황제 자리에서 쫓아냈다, 이제 너와 절연할 것이다, 네 권리를 지키려면 칸타쿠지노스와 맞서 싸워야 한다, 세르비아 황제는 기꺼이 너를 지지할 것이라고 하였죠. 19살이 된 요안니스는 장인이 보낸 아센을 부담스러워하던 차였습니다. 그는 두샨의 말을 듣고 아센을 해임시켰습니다. 두샨은 요안니스에게 지금 아내를 내쫓고 세르비아 여자를 새 아내로 맞이하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요안니스의 아내가 칸타쿠지노스의 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전쟁에 휘말린 터라 콘스탄티노플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안나 황태후를 테살로니카로 보내 아들을 설득시키게 했습니다. 이때, 두샨은 아내와 함께 테살로니카 근처에 진을 쳤습니다. 황태후는 두샨의 아내에게 접근해 남편을 테살로니카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설득이 어느 정도 먹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자 몇 달 후, 요안니스는 칸타쿠지노스에게 트라키아 공국에서 황제가 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콘스탄티노플 대신 트라키아를 선택한 것에 놀랐지만, 요안니스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트라키아는 장남 마타이오스가 다스리는 영지였죠. 칸타쿠지노스는 마타이오스를 아드리아노플로 보냈지만, 마타이오스는 불만을 품었습니다. 아버지가 요안니스를 편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황태후는 이날 이후 죽을 때까지 테살로니카를 다스렸습니다. 별다른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았습니다.
한편, 원치 않은 전쟁에 수없이 휘말린 칸타쿠지노스는 속세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10여 년 전 선황과 함께 테살로니카에 있던 시절, 아토스 산에 있는 수도원의 은둔자를 만났던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그는 수도원에 살기 위해 수도사에게 돈을 지불했으나 안나 황후의 만류를 듣고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다음 그의 기억은 1350년, 요안니스와 함께 아토스 산의 수도원에 다시 도착했을 때로 흘러갔습니다. 수도원에는 막시모스라는 별난 은둔자가 있었습니다. 막시모스는 칸타쿠지노스를 보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 뒤 마른 빵, 양파, 마늘을 선물했습니다. 예언이 곧 실현되리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이 오면 좋으련만.
하지만 세상은 황제에게 사색에 잠길 여유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1351년 마타이오스는 아드리아노플을, 요안니스는 트라키아와 디디모티호를 물려받았습니다. 황제는 두 사람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아마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전쟁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뒤늦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인지하고 마타이오스를 콘스탄티노플로 소환시키려고 했습니다. 마타이오스는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명을 거부했습니다. 황제는 황후 이레네를 디디모티호로 보냈습니다. 1352년 봄, 이레네는 디디모티호에 가서 요안니스에게 화해하라고 설득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황후가 떠나자마자 요안니스는 아드리아노플을 공격했습니다.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혁명의 순간을 기억하는 아드리아노플의 사람들은 요안니스가 오자 환호했습니다. 요안니스에게 기꺼이 성문을 열어주었죠. 마타이오스는 성에서 쫓겨나 '칸타쿠지노스파의 대표자'라고 손가락질 당했습니다. 마타이오스가 급히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자, 칸타쿠지노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들을 구원하러 갔습니다. 그는 카탈루냐와 튀르크 용병을 고용해 아드리아노플을 불태웠습니다. 두샨은 물론 알렉산더르도 합세해, 요안니스에게 칸타쿠지노스와 싸우라고 부추겼습니다. 베네치아도 테네도스 섬을 우리에게 주면 20,000 두캇의 융자를 지원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요안니스가 칼을 뽑자, 칸타쿠지노스는 오르한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오르한의 아들 슐레이만이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했으나, 요안니스와 세르비아, 불가리아 동맹군과 맞닥뜨려 참패했습니다. 1352년 10월, 칸타쿠지노스는 총대주교를 보내 요안니스를 설득했으나, 요안니스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참다못한 칸타쿠지노스가 전쟁을 선포하자, 그해 말 요안니스는 어쩔 수 없이 타협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를 불러서 버릇없는 아이를 어르듯 훈계했습니다. 디디모티호를 포함한 트라키아를 계속 관리하게 해 줄 테니, 내게 경의를 표하라고 했습니다. 요안니스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요안니스의 지지자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안니스 5세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를 눈치챈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더러 아내와 가족들을 데리고 테네도스 섬으로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그놈이 떠났다고?
요안니스가 멀리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마타이오스는 펄쩍 뛰며 기뻐했습니다.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1353년 3월, 요안니스의 지지자들은 칸타쿠지노스가 아드리아노플로 갈 것이니 이틈에 공격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요안니스는 지지자들의 말대로 (2)종려주일에 배를 타고 몰래 콘스탄티노플 돌진을 시도했습니다. 종려주일에 다들 기도하느라 바쁠 틈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이레네는 재빨리 성에 경비병을 배치했습니다. 기습에 실패한 요안니스는 10일 후,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이들을 모두 왕궁으로 초대했습니다. 요안니스를 적으로 규정할지 말지, 마타이오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할지 말지 정해야 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확고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총대주교를 찾아갔습니다. 7일 후 총대주교는 답을 주었습니다. 요안니스를 폐위하고 마타이오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지 않으면 왕궁에도, 총대주교청에도 절대 발을 디디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신료들과 지휘관들도 한목소리로 마타이오스를 후계자로 임명하라고 청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최대한 이미지를 챙겨야 했습니다. 그는 긴 연설을 했습니다. 내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1347년에 황태후와 어떤 협상을 했는지, 황태후의 아들이 어떤 도발을 일으켰는지, 특히 최근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진했던 일을 언급하였습니다. 난 어쩔 수 없이 아들을 공동황제로 임명하는 것이라고 하였죠. 모두들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며칠 후,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된 마타이오스는 황제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354년 2월, 마타이오스는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팔레올로고스 왕조에서 칸타쿠지노스 왕조로 대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관식을 치른 지 몇 주 후, 갈리폴리에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날은 3월 2일, 정교회 축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신이 분노했다며, 재앙의 책임을 칸타쿠지노스에게 돌렸습니다(13편에서 계속).
(1)1341년에는 발람이, 1347년에는 칼레카스가 이단으로 규탄당했습니다.
(2)부활절 직전의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