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4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는 요아사프 크리스토둘로스로 개명한 뒤, 성 게오르기오스 수도원으로 물러났습니다. 요안니스 5세는 장인의 퇴위식을 지켜보았지만, 사실 장인어른께서 이대로 물러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막 정치에 발을 담근 그는 노련한 정치가의 도움을 원했고, 마타이오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칸타쿠지노스는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요안니스 혼자 마타이오스와 트라키아에서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두 사람은 황제 직위를 유지하되 마타이오스는 트라키아를 포기하고 모레아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영토를 공평하게 배분해야 했는데 동로마의 영토가 거의 남지 않아 마타이오스가 한 발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둘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타이오스의 동생 마누일이 5년 동안 모레아를 무난히 통치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누일은 두 사람의 계획에 반대했습니다. 마타이오스는 렘노스로 가려 했지만, 렘노스의 주둔군은 몰래 마타이오스 암살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1356년, 다시 내전이 시작됐습니다.
마타이오스는 트라키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습니다. 그때, 세르비아군이 마타이오스를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세르비아의 소식을 들은 마타이오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폐하께서 작년에 승하하셨습니다.
작년 12월에 두샨이 죽은 뒤 세르비아가 붕괴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트라키아에는 오르한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튀르크군은 세르비아를 침공하려 하다가 세르비아군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마타이오스는 싸움에 휘말려 포로가 되었습니다. 요안니스는 몸값을 치르면서 마타이오스에게 장님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마타이오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된 뒤 레스보스 섬에 감금됐습니다. 1357년 말, 요안니스는 마타이오스에게 황제 칭호를 포기하라고 제안했지만, 마타이오스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평생 감옥에 있겠다며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결국 수도원에 있던 칸타쿠지노스가 나섰습니다. 고결한 수도사의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아들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 덕에 에피바타이에서 의식을 거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석방되고 의식에 참석한 마타이오스는 요안니스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1)그는 몇 년 간 콘스탄티노플에서 머물다가 1361년 모레아로 가서 동생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아들과 함께 모레아로 갔다가 1362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수도원으로 돌아와 작품 집필에 열중했습니다. 그는 벗이었던 팔라마스의 교리와 헤시카스트의 관행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1368-69년에 집필된 수도사 (2)프로코로스 키도네스의 논문을 반박하거나, 두 이단자인 발람과 아킨디노스의 이단적 교리에 반대하는 논문을 집필했습니다. 또한 정교회의 수호에 관심이 많았기에 유대교에 반대하는 논문을 쓰거나 이슬람교에 대항해 기독교를 지킨 이야기와 그때 했던 연설을 논문을 집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코란을 인용했는데, 다른 수도사가 라틴어로 번역한 뒤 데메트리오스 키도네스가 그리스어로 재번역한 덕이었습니다. 데메트리오스 입장에서는 그리스어 공부 차원에서 번역한 것이었겠지만, 오르한을 사위로 둔 칸타쿠지노스에게는 좀 더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1362년에 오르한이 죽고 딸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뒤 집필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가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신념이 별개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16]그는 카르시아네티스 수도원에서 회고록을 집필했는데, 회고록에는 1364년부터 1376년까지 집필했다고 언급됩니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1320년부터 1356년까지의 본인의 삶을 회고록에 담았습니다. 주관적이고 편파적이라는 평가는 피할 수 없지만, 14세기 초중반 동로마뿐 아니라 발칸반도 전체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기에 지금까지 학자들에게 중요한 사료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14세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에게 주석을 남기는 관행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칸타쿠지노스는 이러한 작업은 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1366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번역도 본인이 진행하지 않고, 번역에 필요한 돈만 지원해 주었죠. 철학자나 인문학자보다 신학자의 길을 추구하려는 목적 때문인 듯합니다.
앙드레 테벳이 그린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출처: Look and Learn)
한편 1355년, 칸타쿠지노스가 퇴위하자마자 요안니스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동로마의 남은 영토를 보존하려면 서방 기독교 국가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칸타쿠지노스와 요안니스의 설득 방향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가 교황의 우위권을 인정하고 기독교 세계를 통합해서 교황을 설득하려 했다면, 요안니스는 우리에게 군대를 지원하면 얻을 이익을 과하게 나열해서 설득하려 했습니다. 교황은 요안니스의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367년이 되어서야 요안니스는 원조를 얻기 위해 교황에게 교회 통합 문제를 건의했습니다. 5년 전, 콘스탄티노플의 코 앞에 있는 아드리아노플까지 오스만에게 함락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황이 라틴 총대주교 바울을 사절로 파견하자, 요안니스도 특사를 접견할 대변인을 찾아야 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팔라마스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교회 통합을 회의적으로 여긴 총대주교 필로테오스는 사절단과 공식적으로 만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요안니스는 전직 황제이자 수도사인 칸타쿠지노스를 소환시켰습니다.
1367년 6월, 공의회가 개최됐습니다. 요안니스 5세와 헬레네 황후, 그들의 아들 안드로니코스와 마누일, 고해신부와 세 명의 주교가 참석했습니다. 주제는 서방과 동방 교회 재결합이었습니다. 이미 1350년에 칸타쿠지노스가 교회 통합을 추진했지만,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평생 교회 통합을 주장했었다고, 진리를 변호하기 위해 죽음이나 재판도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분열 이후 한 번도 우리와 우호적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로지 권위만 내세웠다고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17]아무도 교황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그의 말은 그리스도의 말로 받아들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권위를 내세우면 우리는 단결할 수 없습니다.....나는 당신보다 이곳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 충고를 받아들이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계적인 공의회를 개최하는 것입니다....성령의 사랑과 형제애로 자극받아,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요인을 찾아야 합니다....하지만 로마 교회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더 사태가 나빠질까 봐 두렵습니다. 어떤 이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고, 다른 이는 제 조상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시대 때처럼 그들의 신앙을 위해 순교와 박해를 견뎌내겠지요.
-1368년 공의회에서 칸타쿠지노스의 연설
칸타쿠지노스는 연설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1350년에 교회 통합을 주장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황제도, 총대주교도 아니었기에 정치적인 견해를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황제라고 부르며 치켜세웠습니다. 그가 황제의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칸타쿠지노스를 고기 꼬챙이에 비유했는데, 고기 한 개를 돌리면 밑의 고기들까지 돌아가는 고기 꼬챙이처럼 칸타쿠지노스가 명령하면 백성들도 따라갈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칸타쿠지노스는 황제가 아니었고, 황제라 해도 백성들의 신앙까지 좌지우지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교황이 내세우는 말만이 진실이라고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교회 통합을 위해 기독교 국가가 전부 모인 세계 공의회 주최를 내세웠습니다. 결국 바울은 2년 안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고, 칸타쿠지노스는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필로테오스는 주교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바울을 설득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신앙을 조화시켜서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칸타쿠지노스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공의회 계획은 물 건너갔죠. 절망에 빠진 요안니스는 교황을 직접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1369년 10월, 로마에서 교황을 만났고 성 베드로 의식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황에게 복종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3)이는 황제와 교황만의 사적인 교류였고, 요안니스가 원했던 군사적, 경제적 원조는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황제의 개종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소문이 퍼지면, 백성들이 동요할까 봐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1371년 키프로스의 주교에게 팔라마스의 전파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팔렘주의, 반팔렘주의, 아킨디노스교 등의 반목의 역사를 설명하느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할 동안, 제국은 또 시끄러워졌습니다. 2년 전, 요안니스는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던 중 베네치아에게 붙잡혀 빚을 갚으라고, 안 그러면 왕관을 시장에 팔겠다고 협박당했었습니다. 요안니스는 베네치아에게 테네도스 섬을 양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장남이자 공동황제인 안드로니코스 4세가 섬을 양도하라는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4)결국 차남 마누일이 베네치아로 달려간 덕에 1371년 3월, 요안니스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와중 튀르크군은 유럽 대륙에 더 거침없이 진출했고, 콘스탄티노플에 온 지 1년 만에 요안니스는 튀르크와 화해를 자청했습니다. 서방 세계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373년 초, 요안니스 5세는 술탄 무라트 1세의 편에 서서 싸우고 공물을 바치는 신세가 됐습니다. 황제는 사실상 술탄의 가신이 된 셈이었죠.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안드로니코스에게 화가 난 요안니스는 안드로니코스를 폐위시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1373년 5월 초,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던 안드로니코스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술탄은 요안니스에게 안드로니코스의 눈을 뽑은 뒤 잔인하게 살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황제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안드로니코스를 폐위하고 가두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그리고 1373년 9월 25일, 자신을 구했던 마누일을 공동황제로 임명했습니다. 1376년, 안드로니코스는 제노바의 도움을 받아 몰래 감옥에서 탈출한 뒤 갈라타로 향했습니다. 몇 달 뒤, 제노바와 튀르크의 도움을 받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안드로니코스는 요안니스와 마누일을 감옥에 가둔 뒤 다시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1379년, 요안니스 부자는 탈옥하여 무라트 1세의 궁전으로 갔습니다. 요안니스는 복위하면 더 많은 공물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술탄의 원조를 받았습니다. 1379년 7월, 두 사람은 콘스탄티노플에 재진입했습니다. 이때, 조용히 살던 칸타쿠지노스에게 슬픈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의 군대를 본 안드로니코스는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를 인질로 삼아버렸습니다. 안드로니코스가 갈라타로 도망칠 때, 칸타쿠지노스는 딸과 같이 갈라타로 끌려갔습니다.
안드로니코스 4세의 초상화(출처: 위키백과)
두 사람은 갈라타에서 1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80대 중반의 노인이었습니다. 감옥에서 꼼짝도 못한 채 시끄러운 전쟁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고통과 굶주림, 전염병에 시달렸죠. 전투는 1381년까지 진행되었고, 안드로니코스의 복위 조건으로 협정이 체결된 후에야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는 수도원의 평화로운 생활을 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1년 전 모레아를 다스리던 아들 마누일이 죽고 마타이오스가 모레아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마타이오스는 50대 중반으로 더 이상 권력에 대한 야망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모레아 친왕직을 승계했습니다. 요안니스는 자신의 사남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를 모레아의 친왕으로 임명해달라고 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순순히 요안니스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룬 마지막 업적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시끄러웠습니다. 흑사병도 돌았죠. 그는 시끄럽고 위험한 수도에서 벗어나 한적하고 조용한 미스트라로 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타이오스의 아들, 즉 칸타쿠지노스의 손자들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테오도로스는 모레아 친왕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맞섰습니다. 이것이 칸타쿠지노스와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마지막 갈등이었습니다. 이제 칸타쿠지노스에게 힘이 없었습니다. 생을 마감할 때를 기다릴 뿐이었죠. 그는 조용히 살다가 1383년 6월 15일, 90세를 앞두고 사망했습니다(마지막 편에서 계속).
(1)1380년 마누일이 사망한 뒤 모레아 친왕이 되었습니다.
(2)데메트리오스 키도네스의 형제입니다. 칸타쿠지노스와 친분이 있었으나 그는 반헤시카스트가 되면서 칸타쿠지노스와 결별했습니다.
(3)참고로 키도네스도 같이 로마로 가서 공문서 번역을 했습니다. 그 역시 가톨릭 개종을 선언했습니다.
(4)설상가상으로 요안니스는 중간에 불가리아에 억류되었습니다. 이때 대행 통치하던 안드로니코스는 아무 대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