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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an 18. 2022

마지막 회의, 최후의 결심

(13)장인과 사위의 내전-2: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동로마)

갈리폴리에 지진이 났을 때, 팔라마스가 갈리폴리에 있었습니다. 죽지 않았지만, 튀르크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습니다. 지진 난 틈을 타 튀르크군이 갈리폴리에 상륙했는데, 그때 콘스탄티노플로 항해하던 팔라마스를 붙잡은 것이었습니다. 팔라마스는 비티니아로 끌려간 뒤 1년 후에 풀려나지만, 튀르크군의 지휘관이 오르한의 아들 슐레이만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지진 때문에 주민들이 피난을 가고, 거리에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근처에 있던 슐레이만은 황폐화된 도시를 손쉽게 점령했습니다. 갈리폴리 점령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 정복의 발판이 되었지만, 동로마 입장에서는 큰 재앙이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오스만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습니다. 슐레이만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알라의 의지를 따랐을 뿐이오. 버려진 도시의 점령은 알라의 뜻일지어니.


칸타쿠지노스는 지진 직전, 오르한 부자를 만났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때 슐레이만이 갈리폴리 근처의 짐페를 점령했는데, 이 문제를 놓고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협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슐레이만이 갈리폴리까지 점령해버렸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자포자기한 채, 슐레이만에게 배상금을 제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전에 제안했던 것보다 4배나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황제는 오르한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르한도 아들의 행동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니코메디아에서 오르한과 만나서 논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칸타쿠지노스가 약속한 장소로 배를 타고 나갔을 때, 오르한이 아파서 출항할 수 없는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빈손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튀르크인을 회유하려 한 황제를 원망했습니다. 황제가 우리의 신앙을 짓밟고 불경한 이교도인에게 노예로 바쳤다고 주장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에게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위해 속세를 떠나고 싶다는 열망이 이미 자리 잡았죠.


갈리폴리와 주변 지역의 지도(출처: 위키백과)



(1)한편, 총대주교 필로테오스는 요안니스를 찾아가서,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마타이오스 즉위 소식을 들은 요안니스가 이미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354년 여름, 칸타쿠지노스는 마타이오스와 함께 직접 요안니스가 있는 테네도스로 가서,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목적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테네도스로 가던 중 무인도에 정착했는데, 몇몇 장교들이 요안니스에게 의심스러운 편지를 보냈습니다. 요안니스의 병사들이 물을 끌어올리는 것을 막기도 했습니다. 결국 협상에 실패한 칸타쿠지노스는 마타이오스를 아이노스에 맡겨두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갔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를 잠에서 깨울 사건이 대기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1354년 11월 29일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요안니스는 몇 척의 배만 가지고 테네도스를 건너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근위병들의 눈을 피해 콘스탄티노플 남쪽의 항구로 살금살금 들어갔습니다. '예수의 화신'이 귀환했다는 소식이 콘스탄티노플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백성들은 요안니스를 환영했지만, 전투를 해도 될지 말지 망설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정말, 진짜, 마지막으로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이레네와 총리 데메트리오스 키도네스와 의논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항은 악마의 유혹이고 항복은 깊은 바다에 몸을 던지는 짓이거늘, 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호전적인 지휘관과 참모들은 바로 요안니스와 싸우라고 요구했습니다. 남아 있는 카탈루냐 용병들도 싸움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칸타쿠지노스는 아들 마타이오스와 사위 니키포로스에게 군대를 지원했습니다. 백성들도 항구의 무기고를 장악해 무장하고 전투태세를 갖췄습니다. 요안니스는 황궁으로 진군했습니다. 1347년에 칸타쿠지노스가 황궁으로 입성한 순간이 연상되었습니다. 다음 날, 백성들은 꽁꽁 닫힌 황궁 공격에 동참했습니다. 황제의 용병대도 건물 몇몇에 불을 지르며 맞섰습니다. 광기는 극에 달해서 총대주교가 피난을 갈 정도였습니다.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좌)와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우)의 초상화



12월 1일,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를 궁정으로 입성시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참모와 지휘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요안니스와 기꺼이 화해했습니다. 두 사람은 공동 황제로 군림하고, 예전처럼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예의를 갖추기로 엄숙히 맹세했습니다. 마타이오스는 황제 직위는 유지하되, 아드리아노플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야 했습니다. 마타이오스는 세 번째 황제로 밀려난 셈이니, 속으로 불만을 품었을 것입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아들의 불만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보수하고 요새화한 금문을 요안니스에게 물려주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아들에게 미안했지만, 또다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튀르크군에게 이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니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트라키아에 주둔하던 튀르크군은 황제의 소환 요구를 예상하고 성문 밖에 주둔해있었죠. 도시를 약탈할 기회를 잃은 그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12월 5일, 칸타쿠지노스는 고(故)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는 트라키아에 있는 튀르크군을 어떻게 다룰지, 점령당한 갈리폴리와 트라키아 일부 지역 문제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무력으로 처리할 것인가, 협상으로 설득할 것인가. 칸타쿠지노스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 야만인들은 경험도 풍부하고, 병력도 많고 열정도 크다. 그들은 유럽뿐 아니라 소아시아에서도 자원을 끌어모을 수 있다. 반면 우리의 자원은 너무 적다. 한때 찬란한 명성을 휘날렸던 우리의 군대는 이제 소규모로 전락했다.....우리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돈과 야만인들과 맞먹을 힘을 가진 외국 군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그러므로 전쟁을 치르는 대신 사절을 보내 화해를 청하고 빼앗긴 트라키아를 돌려달라고 설득하기를 바란다...그러면 우리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점령한 우리의 땅을 내놓으라고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역사』 중에서


위의 회고록에 기록한 대로,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군과의 화해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회의장에 있던 이들은 모두 전쟁을 주장했습니다. 일부 젊은 귀족들은 황제가 야만인을 사위로 두었다는 이유로 전쟁을 회피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요안니스는 수심에 잠긴 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하고 회의를 해산했습니다. 무기력해진 그는 혼자 자책했습니다.


다들 왜 내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인가.


예상대로, 그들은 튀르크군과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칸타쿠지노스는 저들이 제멋대로 하는 모습을 보고 흡족하게 여겼습니다. 지금까지 밝히지 않았던 비밀을 털어놓을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2월 8일, 황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금문으로 찾아갔습니다. 금문을 지키던 카탈루냐 용병대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황제가 전쟁을 개시하라고 명령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사실대로 털어놓았습니다. 카탈루냐의 지휘관은 병사가 많든 적든 상관없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싸우겠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들이 고집부리는 모습을 보자 황제는 화가 났습니다. 그는 너희들의 본국 스페인에 너네가 반란자라고 알리겠다며, 당장 내 명에 따르라고 협박했습니다. 결국 카탈루냐인들은 열쇠를 넘겨주었습니다. 다음 날, 금문을 점령한 요안니스는 카탈루냐 용병대를 해산시켰습니다.


회의 이후, 칸타쿠지노스 부부와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지만 다른 궁에서 살았습니다. 요안니스의 단독 집권을 기대한 백성들은 두 황제의 화해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일부 백성들은 두 황제가 함께 식사하는 강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칸타쿠지노스는 부인과 상의하고, 젊은 황제를 자신의 궁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늙은 황제는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았습니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수도사가 되어서 조용히 살겠다고 하였죠. 12월 10일, 궁궐에서 간단한 의식을 치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화려한 황제복을 벗고 수수한 수도복을 입었습니다. 이레네도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 수녀복을 입었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요아사프로 개명한 뒤, 콘스탄티노플의 성 게오르기오스 수도원으로 물러났습니다. 이레네는 에우게니아로 개명하고 키라 마르타 수녀원으로 물러났습니다. 키라 마르타는 그녀의 시어머니 테오도라가 묻힌 곳이었죠.


현재 이스탄불에 있는 성 게오르기오스 수도원의 터(출처: The Byzantine Legacy)


늙은 황제는 언젠가 수도원장이 되고, 젊은 황제는 길고 험난한 길을 걸어갈 것이다.


4년 전 칸타쿠지노스와 요안니스가 아토스 산의 수도원에 갔을 때 막시모스가 했던 예언입니다. 막시모스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막시모스의 예언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예전부터 수도원에 애착을 품었을 뿐 아니라, 황제가 퇴위한 뒤 수도사가 된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황제는 바로 26년 전 퇴위한 안드로니코스 2세였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와의 내전에서 패한 뒤, 퇴위하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안드로니코스의 나이는 68세였죠. 내전에서 승리했을 때 30대였던 칸타쿠지노스, 아니 요아사푸스는 이제 6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먼 옛날, 젊은 안드로니코스의 편에 서서 늙은 안드로니코스를 패배시켰지만, 본인이 패배시킨 자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수도사가 된 지 4년 만에 승하했습니다. 반면 요아사푸스는 수도사가 된 뒤 30년을 더 살면서, 제국의 황혼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수도복을 입으면서, 수녀복을 입는 부인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과거를 돌이키면서, 회한에 잠겼을까요. 아쉬움을 느꼈을까요. 그리움에 잠겼을까요. 마지막 30년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질문의 답을 찾도록 하겠습니다(14편에서 계속).  




(1)마타이오스 즉위 문제로 칼리스토스가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나고 필로테오스가 총대주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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