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타쿠지노스가 1383년에 사망했을 때, 마타이오스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칸타쿠지노스가 요안니스의 사남 테오도로스에게 모레아 친왕직을 물려주자, 마타이오스의 두 아들 요안니스와 데메트리오스가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반항적이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1384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모레아 친왕직은 테오도로스에게 무사히 넘어갔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레아와 달리, 밖은 여전히 시끄러웠습니다. 세르비아 제국은 1371년 두샨의 아들 우로시 5세가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난 후, 귀족들의 분열과 권력 다툼으로 공중분해됐습니다.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는 이 틈에 소피아와 니스를 함락시켰습니다. 무라트가 동로마 정벌을 앞두고 있던 1385년 6월 28일,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안드로니코스 4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라트가 동로마로 진격할 무렵, 마누일은 테살로니카에서 항쟁을 했습니다. 무라트는 마누일이 봉신의 서약을 어긴 것으로 판단하고, 테살로니카에 군대를 보냈습니다. 마누일은 베네치아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요안니스 5세도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죠. 결국 1387년 4월, 테살로니카는 성문을 열었습니다. 영지를 빼앗긴 마누일은 렘노스 섬에 가서 조용히 지내야 했습니다. 한편, 테살로니카를 정복한 무라트는 세르비아로 눈을 돌렸습니다. 세르비아 제국이 무너진 뒤, 떠오르던 지방 귀족 라자르가 세르비아 공국을 세웠었죠. 1389년 6월 15일, 라자르와 무라트는 코소보에서 맞닥뜨렸습니다. 라자르는 오스만 진영을 돌파했고, 과한 열기 속에서 무라트가 전사했습니다. 라자르는 무라트의 아들 바예지드에게 붙잡혀 처형당했습니다. 코소보 전투에서 모든 전력을 쏟아부은 세르비아는 더 이상 힘이 없었고 라자르의 아들 라자레비치는 술탄의 가신이 됐습니다. 세르비아는 발칸반도에서 동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오스만의 속국이 되었죠.
마누일 2세의 초상화, 그는 요안니스 5세의 아들이자 칸타쿠지노스의 외손자이다(출처: 위키백과)
요안니스 5세는 마누일을 마지못해 렘노스로 보냈지만, 총명하고 용맹한 마누일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1390년 안드로니코스 4세의 아들 요안니스 7세가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5개월 만에 마누일과 요안니스 5세가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복위했습니다. 요안니스 7세는 술탄 바예지드 1세의 궁정으로 도망쳤습니다. 바예지드 1세는 요안니스 7세에게 셀림브리아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내심 마누일보다 요안니스 7세가 황제가 되기 바랐습니다. 술탄은 마누일을 자신의 궁정으로 소환시킨 뒤, 셀림브리아의 요안니스 7세에게도 소환장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필라델피아를 할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필라델피아는 소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오스만에 항쟁하던 도시였습니다. 1390년 가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손으로 필라델피아를 오스만에 넘겨야 했습니다. 이제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플에 최후통첩을 했습니다. 요안니스 5세는 튀르크군의 공격에 대비해 성문을 보강하고 있었습니다. 바예지드는 성문을 파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요안니스 5세가 명령을 거부하면, 마누일은 감옥에 갇히고 눈이 멀게 될 것이었죠. 요안니스 5세는 일국의 황제가 이교도 술탄의 명을 따라야 하는 상황에 자책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는 궁정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1391년 2월 16일에 사망했습니다.
술탄 바예지드 1세의 초상화(출처: 위키백과)
부황의 승하 소식을 들은 마누일은 재빨리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습니다. 1391년 3월, 그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됐습니다. 칸타쿠지노스의 중신 키도네스는 '칸타쿠지노스의 화신'이 나타났다며, 마누일의 즉위를 환호했습니다. 술탄은 마누일이 자신의 진영에서 도망친 것을 알고 분노했습니다. 그는 요안니스 7세가 단독황제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기지 있는 마누일이 황제가 되면, 제 손아귀에 넣고 부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은 마누일에게 내 궁정으로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네가 내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성문을 닫고 그 안을 다스려라. 성문 밖은 모두 나의 것이니.
-바예지드 1세
마누일은 술탄의 궁정에서 다음 해 1월까지 있어야 했습니다. 셀림브리아를 다스리던 요안니스는 숙부가 황제가 된 후에도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누일은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고, 술탄은 몇 차례 소환을 요구했지만 마누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바예지드는 1394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습니다. 오스만에 맞서기 위해 마누일과 요안니스는 합의를 봤습니다. 마누일이 요안니스를 입양하고 요안니스도 마누일의 자식들을 입양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요안니스 7세를 첫 번째 공동황제로 임명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봉쇄된 지 5년 후, 마누일은 서유럽에 지원을 요청하러 순방을 떠났습니다. 그는 어린 아들 대신 요안니스를 섭정으로 앉혔습니다. 티무르가 오스만을 침공하자, 콘스탄티노플 봉쇄가 풀렸고 마누일이 1403년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요안니스는 미련 없이 섭정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테살로니카 영지를 받아 조용히 살다가 1408년에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칸타쿠지노스가 스타트를 끊은 내전은 60여 년 후에야 끝을 맺었습니다. (1)마누일 2세는 1425년에 사망할 때까지 제국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그의 노력 덕에 아들 요안니스 8세와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졌습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이콘. 그는 마누일 2세의 아들이자 동로마 최후의 황제이다(출처: 나무위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의 생전, 사람들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딸 헬레나는 아버지의 군사력에 대해 찬사했고, 1347년에 세상을 떠난 학자 토마스 매기스터는 군사령관이었던 칸타쿠지노스의 업적을 알리는 연설문을 썼습니다. 칸타쿠지노스를 황제, 수도사, 정교회 교리의 수호자로 칭송하는 익명의 시도 쓰였습니다. 키도네스는 그를 군인, 판사, 정치가, 신학자, 문학인으로 치하했고, 그리고라스는 그를 위대한 장군이자 정의롭고 겸손한 지도자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찬사가 내려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다양한 직업 덕택인 것 같습니다. 제국의 역사상 칸타쿠지노스만큼 다양한 직업을 거친 황제는 없었죠. 황제의 참모이자 군사령관이 직접 황위에 오르는 경우는 많았으나, 황제가 자발적으로 수도사가 되어 신학자이자 역사가가 된 경우는 전무후무했습니다. 수도사는 대부분 권력 다툼에 밀린 황제가 원치 않게 짊어지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인맥이 넓었습니다. 제국 내의 중신들은 물론 신학자, 지휘관들과 교류했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오스만과도 인맥을 맺었습니다. 이집트의 술탄과도 교류했죠. 하지만 서방 세계와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습니다. 아라곤의 페드로 3세와 공식 서신을 교환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마, 그가 서방 세계와의 교류의 중요성을 모른 것이 아니라 몰락하는 제국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부유하고 평화로운 시대에 살았다면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고 서유럽과의 교류를 촉진해서 제국을 번영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현실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군대조차 부족했기에, 병력 요청을 위해 교황들과 교회 통합을 논의하고, 군대 재건과 경제 자립을 위해 제노바&베네치아와 분쟁과 화평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 황제'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347년 11월, 지지자들에게 포상을 위해 금인칙서를 반포할 때 '로마의 통치자'라고 지칭했고 교황이 서신으로 '그리스인의 황제'라고 적었을 때, 라틴어로 '신에게 충실한 그리스도인 요안니스, 로마인의 황제이자 중재자 칸타쿠지노스'라고 수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부심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국의 역사상 황제가 국경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1350년 교회 통합 문제를 논의할 때 그는 교황청으로 행차하는 것을 거부하였는데, 이것이 가톨릭계의 권위 문제와 연결되어 통합 논의를 물거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칸타쿠지노스가 군대 재건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황제'의 자부심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는 낙담하지 않고 지휘관들에게 '옛 조상 로마인들'을 본받으라고 연설했습니다. 그는 아마 유럽 대륙 전체를 호령했던 과거의 로마 제국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또한 어마어마한 토지와 재산을 지닌 대지주였기에 자부심이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 기준에서는 비난의 대상처럼 보이지만, 그는 재산과 권력에 취하지 않고 본인이 가진 것을 토대로 나라에 헌신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권력의 정점에 오른 칸타쿠지노스는 정적들의 눈엣가시가 되었고 그의 기반은 집안을 몰락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집에서 쏟아진 귀중품과 곡식, 과일 등의 식량을 목격한 백성들의 분노를 샀죠.
칸타쿠지노스는 부의 균등한 배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인지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대지주였기에 전반적인 토지 개혁을 주창하지 못했습니다. 1348년, 그가 총회를 소집해 기부금을 모으려 했을 때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은 이유는 '금수저가 주장하는 허황된 이상'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라리 가난한 백성들에게 시혜 정책을 베풀었으면 좋았겠지만, 황제의 입장에서는 외세의 침략을 막는 것이 우선이었고 오랜 내전으로 황권이 추락했기에 백성의 지지를 얻을 여유가 없었을 듯합니다. 백성의 지지 없이 함대를 재건했지만 1352년 제노바와의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예전의 전력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백성의 지지를 얻은 요안니스가 내전을 일으키고 신료들이 그의 명을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현실의 한계도 직감했겠죠. 그가 퇴위하고 수도사가 된 것은 현실에서 좌절감을 느낀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칸타쿠지노스는 수도사가 된 뒤, 회고록을 집필했습니다. 황제였던 사람이 직접 회고록을 집필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덕에 회고록은 학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군대를 지휘했던 사람이었기에 14세기 동로마사의 군사적, 정치적 상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었죠.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는데, 그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만큼 시각이 편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안드로니코스 3세의 전공을 치하하면서 안드로니코스의 패륜은 동료들의 탓으로 돌리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유약함을 부각했습니다. 아마 내전에 참여했던 본인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전쟁에서의 공적이 황제의 업적이라고 여겼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직접 참전해서 에피로스 등을 수복한 반면, 안드로니코스 2세는 그러한 경력이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추측건대, 칸타쿠지노스의 회고록이 주관적인 이유는 회고록을 집필한 이유가 역사서를 남기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는 본인의 죄를 사죄하기 위해 회고록을 집필했습니다. 1341년에 튀르크군을 끌어들여 내전을 일으킨 이유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황제가 될 생각이 없었다고 회고록에 적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생사를 오갈 때 공동황제 제의를 거절한 이유는 황제와 군인을 동일하게 취급했기에, 황제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래도 집안이 몰락하기 전까지 요안니스 5세를 충실히 보필하거나 요안니스가 반란을 일으킬 때 타협을 택한 것을 보면, 칸타쿠지노스의 충심이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상 미하일 8세가 어린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고 황제가 된 것과 대비됩니다. 칸타쿠지노스가 튀르크군을 불러들인 뒤 안나 황태후, 안드로니코스 4세, 요안니스 5세가 연달아 튀르크군을 불러들이다가 급기야 술탄의 가신이 되는 모습을 전부 보고 죽었기에 죄책감도 컸을 것입니다.
요안니스 6세 전기의 작가 도널드 M. 니콜은 칸타쿠지노스의 약점이 결단력 부족이라고 지적합니다. 저도 이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엄격한 대응이 필요한 상황에서 쓸데없이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내전을 부추긴 시르기안니스의 석방을 요청하거나, 쿠데타를 계획한 아포카우코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했죠. 그러나 시르기안니스와 아포카우코스는 칸타쿠지노스를 배반하고 내전을 부추겼습니다. 그리고라스는 1347년 황궁에 입성한 칸타쿠지노스가 적들에게 강경한 대우를 취하지 않는다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아마 1341년 디디모티호에서 황제 선언을 망설이거나 마타이오스의 황제 즉위 때 머뭇거린 이유도 그의 우유부단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때마침, 갈리폴리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이유도 마타이오스 즉위 문제로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칸타쿠지노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포부와 달리 제국은 갈수록 약해져 오스만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차남 마누일을 모레아 친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젊은 시절, 안드로니코스 2세가 그에게 제안했으나 어머니를 핑계로 거절했던 직책이었습니다. 마누일은 모레아를 지키던 라틴계 영주의 딸과 결혼한 뒤 라틴계 사람들과 힘을 합쳐 튀르크 해적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제멋대로였던 모레아의 질서를 확립해서 후임자들이 무사히 통치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스와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로 조용히 번영하던 모레아는 훗날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마지막 불꽃을 피울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칸타쿠지노스의 업적을 이어받은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차남 마누일과 동명이인인 마누일 2세였습니다. 마누일은 요안니스 5세의 아들보다 칸타쿠지노스의 외손자에 더 가까웠습니다. 마누일의 스승이 된 키도네스는 마누일을 '칸타쿠지노스의 화신'으로 치켜세웠습니다. 마누일은 칸타쿠지노스와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둘째 아들이었던 그는 황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위치였습니다. 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아버지를 도왔기에 황제가 될 수 있었지만, 처음부터 황제 자리를 노리고 아버지를 도운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네치아와 불가리아에 억류된 아버지를 구하러 간 것을 보면 효심과 의무감 덕이 큰 것 같습니다. 황제가 된 마누일은 외할아버지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서 고군분투했습니다. 오스만에게 콘스탄티노플이 봉쇄되자, 칸타쿠지노스처럼 제국을 구하겠다는 의무감이 충만했던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을 순방하며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정교회 교리의 수호자를 자청했기에, 함부로 개종하지 않고 교황과 서방 세계의 통치자들과 협상했죠.
1351년 공의회를 주최하는 칸타쿠지노스(좌), 1408년 마누일과 가족들을 그린 초상화(우)
위 초상화의 확대 버전, 취향뿐 아니라 생김새도 닮았다.
1367년 6월, 공의회에 참석한 마누일은 외할아버지가 연설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로마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동일한 조건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직접 대면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마누일이 걸음마를 떼기 전, 수도원으로 물러난 외할아버지를 기억했을까요? 그는 1384년, 칸타쿠지노스가 죽은 지 1년 후 테살로니카의 수도원에서 외할아버지를 추모합니다. <페르시아인과의 대화> 서문에서는 칸타쿠지노스를 '우리의 가장 신성한 할아버지,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황제'라고 하였습니다. 칸타쿠지노스도 회고록에서 외손자 마누일의 존재를 강조했습니다. 회고록이 1376년까지 집필됐으니 마누일도 외할아버지의 회고록을 읽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의 내전에 휩쓸려 고통스러워하던 상황이었기에 외할아버지의 심정에 공감했거나 본인을 기억해주어서 고마움을 느꼈을 수 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도 주위에서 전해 듣고 총명한 손자 마누일을 아낀 듯합니다. 황제의 충신으로 살아갈 운명이었으나 상황에 휩쓸려 '마지못해' 황제가 된 칸타쿠지노스는 회고록을 쓰면서 눈여겨 본 외손자가 본인과 비슷한 길을 걸으리라고 예측했을지도 모릅니다.
13~14세기 팔레올로고스-칸타쿠지노스 가문의 가계도
<1차 사료>
John VI Cantacuzenus, 『Ioannis Cantacuzeni eximperatoris Historiarum libri iv』, Parisiis: E Typographia Regia, 1645.
<2차 사료>
-참고 도서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바다출판사, 2016.
주디스 헤린, 『비잔티움: 어느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 글항아리, 2007.
Georgios Theotokis, 『A military history of the Mediterranean Sea aspects of war, diplomacy and military elites』, BRILL; Illustrated edition, 2018.
Jonathan Harris, 『The lost world of byzantium』, Yale University Press』, 2015.
Nicol, Donald M, 『The Reluctant Emperor: A Biography of John Cantacuzene, Byzantine Emperor and Monk, c. 1295-1383』,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Nicol, Donald M.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 1261–1453 (Second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Nicol, Donald M. 『The Byzantine family of Kantakouzenos (Cantacuzenus) ca. 1100-1460: A Genealogical and Prosopographical Study』. Dumbarton Oaks studies 11. Washington, DC: Dumbarton Oaks Center for Byzantine Studies, 1968.
Shaun Tougher, 『The emperor in the Byzantine World』, Routledge/Taylor and Francis Group, 2019.
Siren Çelik, 『Manuel II Palaiologos (1350–142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
-참고 사이트
한글판, 영문판 위키피디아
[1]Kazhdan, Alexander, ed, 『The Oxford Dictionary of Byzantium』. Oxford an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2]Georg Ostrogorsky, 『Byzantinische Geschichte: 324-1453』, C.H.Beck; 3. Edition, 2019.
[3]Manuel Philes, 『Manuelis Philae carmina inedita edidit Ae. Martini』, Typi Academici, 1900.
[4]John VI Cantacuzenus, 『Ioannis Cantacuzeni eximperatoris Historiarum libri iv』, Parisiis: E Typographia Regia, 1645.
[5]John VI Cantacuzenus, 『Ioannis Cantacuzeni eximperatoris Historiarum libri iv』, Parisiis: E Typographia Regia, 1645.
[6]Nikephoros Gregoras, 『Byzantina Historia: volume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7]Nikephoros Gregoras, 『Byzantina Historia: volume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8]Enveri, 『Le Destân d'Umiir Pacha』, Irène Mélikoff-Sayar (ed.), paris, 1954.
[9]John VI Cantacuzenus, 『Ioannis Cantacuzeni eximperatoris Historiarum libri iv』, Parisiis: E Typographia Regia, 1645.
[10]John VI Cantacuzenus, 『Ioannis Cantacuzeni eximperatoris Historiarum libri iv』, Parisiis: E Typographia Regia, 1645.
[11]John VI Cantacuzenus, 『Ioannis Cantacuzeni eximperatoris Historiarum libri iv』, Parisiis: E Typographia Regia, 1645.
[12]Demetrios Kydones, 『Letters』, ed. R.-:J. Loenertz, J (Vatican City, 1956), no. 88
[13]Nikephoros Gregoras, 『Byzantina Historia: volume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14]John VI Cantacuzenus, 『Ioannis Cantacuzeni eximperatoris Historiarum libri iv』, Parisiis: E Typographia Regia, 1645.
[16]John VI Cantacuzenus, 『Ioannis Cantacuzeni eximperatoris Historiarum libri iv』, Parisiis: E Typographia Regia, 1645.
[17]John Meyendorff, 『Byzantium and the Rise of Russia』, Cambridge, 1981.
(1)참고로 불가리아는 1395년 오스만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이 발칸의 강자로 군림하려던 시기였기에 이미 힘을 다한 동로마는 이득을 챙길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