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연수 Nov 01. 2021

제국의 쇠락, 내전의 시작

(2)시대적 배경: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동로마)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1295년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동로마 제국은 과거의 영광을 잃고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동로마 조정에는 비어버린 국고, 화폐 가치 하락, 튀르크족의 부상, 각지에서 터지는 반란,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무역 전쟁 등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의 미약한 대처가 제국의 쇠퇴를 부추긴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쇠퇴의 책임을 오로지 한 명의 황제에게만 떠넘기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몰락 원인은 '이래서 망했어'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 악재가 겹쳐서 서서히 몰락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동로마는 안드로니코스 2세가 집권하기 전부터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12세기부터 잦은 내전, 높은 세금, 추락한 왕권, 라틴인 학살 등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몰락에 쐐기를 박은 시기는 4차 십자군 때였습니다.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라틴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쑥대밭이 되었고 약탈과 살인이 자행되었으며 소중한 문화유산이 박살났습니다. 살아남은 황족들은 니케아, 에피로스, 트레비존드 등에서 망명 제국을 세웠습니다. 다들 민심을 모으고 국고를 축적하며 콘스탄티노플 수복을 노렸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황제는 니케아 제국의 미하일 8세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지 57년 만이었습니다.


1209년 동로마 제국의 지도, 보라색이 니케아 제국이다(출처: 위키백과)



1261년 8월, 미하일 8세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습니다. 미하일은 제국의 영광을 되찾아, 두 번째 도시 건설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는 막대한 돈을 들여 훼손된 교회, 수도원, 공공건물 등을 복구합니다. 그 덕에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35,000명에서 70,000명으로 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하일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미하일이 11살이었던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고 무단으로 황위를 찬탈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총대주교는 미하일의 찬탈을 꼬투리 삼아 미하일을 파문했습니다.


동로마에서 지지를 얻지 못한 미하일은 외부로 눈을 돌립니다. 그는 제노바 상인더러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인을 몰아내라고 시키고,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자 막대한 돈을 줍니다. 베네치아인도 용서해 주고 그들의 무역권을 보장했습니다. 또한 에피로스, 아카이아, 시칠리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습니다. 딸들을 불가리아, 킵차크 칸국, 트레비존드 등에 시집보내서 동맹을 확보했습니다. 이렇게 전쟁과 동맹을 반복해 제국을 안정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막 부활한 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많은 국고가 소모되었습니다.


파키메레스의 역사서에 있는 미하일 8세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와 중 서유럽에서는 미하일에게 불만을 품었습니다. 교황청과 베네치아는 라틴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십자군을 모집합니다. 미하일이 로마 교회에 순응하지 않았기에 '성전'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었죠. 특히 시칠리아의 왕인 앙주의 카를로는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고 지중해를 제패하겠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2)다행히, 미하일이 로마 교회 통합을 위해 협상을 벌이고,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카를로가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십자군 원정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1274년, 제2차 리옹 회의에서 교회 통합이 선언됩니다. 하지만 동로마인들은 아직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라틴인'에 대한 앙금을 품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서유럽의 교황에게 고개를 숙였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미하일에게 반발했습니다. 미하일은 교회 통합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습니다. 1282년 12월, 미하일은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사람들은 그에게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미하일이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고 재건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방 전선에 집중한 탓에 동로마의 근거지였던 소아시아 국경을 방치했고 그 틈에 튀르크족이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복 전쟁과 혼인 정책으로 다른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형성했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국고를 소비했습니다. 미하일이 남긴 짐은 후임 황제들이 지게 되고, 훗날 칸타쿠지노스도 그 황제들 중 한 명이 됩니다.


시칠리아의 만종, 프란체스코 아예스 작품(1846) (출처: 위키백과)



1282년, 미하일 8세의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2세는 부황이 남긴 짐을 처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교회 통합을 철회하고 정교회의 수호자를 자청합니다. 하지만 이미 성직자들은 통합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민심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안드로니코스는 경제 문제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3)히피르피론의 가치가 하락하고, 국고는 비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는 수입을 증대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면세 혜택을 줄였습니다. 그리고 부황이 건설한 해군을 해체해서, 허리를 졸라맸습니다.


해군을 해체한 안드로니코스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에게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자기들끼리 무역 전쟁을 벌였고, 안드로니코스는 이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안드로니코스는 제노바 함대를 고용해 베네치아와 전쟁을 치렀지만 두 차례나 패배했습니다. 해군 해체로 인한 여파가 고스란히 드러났죠. 안드로니코스는 뒤늦게 갤리선 20척을 건조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소아시아 국경을 방치한 탓에, 튀르크족의 침략이 빈번해졌고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결국 1295년,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터졌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동로마 조정에게 무시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불만을 품고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소아시아에는 새로운 적수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오스만 제국의 건국자 오스만 1세였죠. (4)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황제였던 미하일 9세가 친정에 나섰지만, 오스만 1세의 군대에 패배했습니다. 이후 동로마는 소아시아에서 점차 밀려납니다. 튀르크족은 에게 해의 섬과 그리스 본토까지 침범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사납기로 유명한 카탈루냐 용병을 고용해 튀르크족을 진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황제에게 막대한 돈을 받은 카탈루냐 용병들은 소아시아의 튀르크족을 물리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아시아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황제의 허락 없이 도시를 약탈했습니다. 더구나 카탈루냐 용병들이 물러가자 튀르크군이 다시 소아시아를 침범하면서 성과도 무효화됐습니다. 카탈루냐 용병대장 루지에로 드 플로어는 이를 동로마 군대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그들을 응징했습니다. 동로마 조정에서는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루지에로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동로마에 남은 것은 막대한 빚과 수많은 사상자뿐이었죠. 이와 중 불가리아군까지 동로마를 공격합니다. 미하일 9세는 이왕 불러들였으니, 카탈루냐 용병들에게 불가리아를 막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루지에로는 3만 히피르피론을 요구했지만, 오랜 전쟁과 막대한 용병비로 국고는 이미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결국 미하일 9세는 연회를 가장해 루지에로를 불러들인 후, 루지에로를 살해했습니다. 그러자 카탈루냐 용병들은 황제를 배신하고 동로마의 속령이었던 아테네와 테베를 정복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루지에로 드 플로어, 호세 모레노 카르보네로 작품(1888)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카탈루냐가 떠나자, 튀르크군은 다시 동로마의 영역을 침범했습니다. 동로마는 비타니아, 미시아, 시마브, 스미르나 등 소아시아의 주요 영역 대부분을 상실했습니다. 황제는 속수무책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아시아의 난민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몰려들자, 가뜩이나 폐허가 된 콘스탄티노플은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튀르크군에게 재산을 빼앗긴 지주들도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총대주교 아타나시오스 1세는 "그들의 죄로 인해 불행이 생겼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젊고 진취적인 황제가 필요한 시기였죠. 마침 1320년 10월, 미하일 9세가 죽었습니다. 미하일 9세의 아들이자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 기회를 잡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돈을 모을 기회'로 보고 반란에 참여한 사람도 있고, '제국을 구하겠다는 고결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참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고결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2편에서 계속)




(1)6년이 지난 후에야 총대주교가 교체되면서 미하일은 파문에서 풀려납니다.

(2)미하일이 몰래 시칠리아의 반란을 지원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미하일을 극구 부인했습니다.

(3)14세기 동로마 제국의 화폐

(4)오스만 1세의 해군에 안드로니코스의 해군 해체 때문에 실직자가 된 동로마인도 있었습니다.

이전 01화 참모에서 황제로, 황제에서 수도사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