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1295~1383)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6세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칸타쿠지노스가 황위에 있던 시기는 그의 90년 인생 중 7년에 불과합니다. 그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참모를 거쳐 황제가 되고, 퇴임한 후에는 수도사가 살다가 인생을 마쳤습니다. 재임 기간은 짧지만, 90여년 간 살면서 칸타쿠지노스가 동로마 제국에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팔레올로고스 왕조 때 5번의 내전이 일어났는데, 칸타쿠지노스는 4번의 내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거나 휘말렸습니다. 첫번째 내전(안드로니코스 2세 vs 안드로니코스 3세)에서는 참모로서 안드로니코스 3세의 편에 서서 안드로니코스 3세를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한 후 요안니스 5세를 충실히 보필했지만, 황태후와 총대주교의 모략으로 집안이 위기에 몰리자 칸타쿠지노스는 황제를 자칭하고 두번째 내전을 일으켰습니다. 내전이 종식된 후, 칸타쿠지노스는 잠시 황제가 되어서 나라를 재건하려 했으나 칸타쿠지노스가 장남 마타이오스를 황위에 올리자, 요안니스 5세가 세번째 내전을 일으켰습니다. 실의에 빠진 칸타쿠지노스는 퇴위한 뒤 이름을 개명하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조용히 사나 싶더니, 네번째 내전(요안니스 5세 vs 안드로니코스 4세) 때 안드로니코스 4세에 의해 잠시 유폐되었습니다.
이렇게 칸타쿠지노스는 제국의 몰락을 자초하기도 하고 재건하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칸타쿠지노스가 오스만 제국과 외교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동로마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오스만의 오르한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켰습니다. 오르한에게 접근하기 전에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에게도 접근했는데, 스테판은 세르비아의 전성기를 구가한 황제였습니다.
외세가 막강해지던 시기, 동로마는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칸타쿠지노스는 동로마의 몰락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죠.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싶었던 걸까요? 칸타쿠지노스는 수도사가 된 후 회고록을 썼습니다. 그의 회고록은 후세에 동로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중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도널드 M.니콜은 칸타쿠지노스의 전기를 집필했는데, 니콜은 칸타쿠지노스를 'The reluctant emperor'라고 칭했습니다. 사전에 따르면 'reluctant'는 '꺼리는, 마지못한, 주저하는'이라는 뜻입니다. 니콜은 왜 칸타쿠지노스를 'reluctant emperor'라고 칭했을까요? 칸타쿠지노스에게는 '망국의 원흉'이 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요? 내전에 내전을 거듭해 제국이 몰락하던 시기, 참모에서 황제로, 황제에서 수도사가 되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일대기를 통해 답을 찾아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이자 수도사였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삶을 보여주는 삽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등장인물>
-칸타쿠지노스 가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주인공, 훗날 요안니스 6세가 된다(이하 '칸타쿠지노스).
이레네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노스의 아내. 불가리아 출신.
테오도라 칸타쿠제네: 칸타쿠지노스의 어머니.
마타이오스 칸타쿠지노스: 칸타쿠지노스의 장남.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칸타쿠지노스의 차남.
마리아 칸타쿠제네: 칸타쿠지노스의 장녀. 에피로스의 니키포로스에게 시집갔다.
테오도라 칸타쿠제네: 칸타쿠지노스의 차녀(할머니와 동명이인). 오스만의 오르한에게 시집갔다.
헬레네 칸타쿠제네: 칸타쿠지노스의 삼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5세와 결혼했다.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창시자
안드로니코스 2세: 미하일 8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3세: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 칸타쿠지노스와 절친한 관계였다.
요안니스 5세: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 요안니스 5세의 장남.
마누일 2세: 요안니스 5세의 차남.
요안니스 7세: 안드로니코스 4세의 장남. 요안니스 5세의 장손.
-동로마 황후
사보이의 안나: 안드로니코스 3세의 황후. 어린 아들이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었다. 총대주교의 편에 서서 칸타쿠지노스를 공격했다.
-외국의 군주
스테판 두샨: 세르비아의 왕. 훗날 세르비아와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
오르한: 오스만 베이국의 2대 왕. 칸타쿠지노스의 딸과 결혼했다.
우무르: 아이딘 베이국의 왕. 칸타쿠지노스의 절친.
미하일 시슈만: 안드로니코스 3세의 매형이자 불가리아의 왕.
이반 알렉산더르: 불가리아의 왕. 미하일 시슈만의 조카.
-동로마 관료
시르기안니스 팔레올로고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친구였으나 배반하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편에 섰다.
테오도로스 시나디노스: 칸타쿠지노스의 벗. 안드로니코스 3세 때 내전에 동참했다.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 해군 총사령관. 칸타쿠지노스의 벗이었으나 배반하고 총대주교와 황태후의 편에 섰다.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아포카우코스의 편이 되어서 칸타쿠지노스를 공격했다.
이시도로스 1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이자 칸타쿠지노스의 벗. 칼레카스 파면 후 총대주교가 됐다.
니키포로스 그리고라스: 동로마의 역사가이자 칸타쿠지노스의 벗. 헤시카즘에 반대했다.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 동로마의 학자이자 성직자. 헤시카즘 찬성파로,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시성됐다.
데메트리오스 키도네스: 동로마의 역사가이자 칸타쿠지노스의 총리. 훗날 마누일 2세의 스승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