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
설님, 안녕하세요.
이번 편지는 조금 다급한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벌써 금요일이에요. 저의 신변에 이런 저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미리미리 써둘 여유가 없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코로나에 걸렸고, 일주일 동안 자가격리(플러스 재택근무와 밥 짓기)를 했고, 자가격리가 끝난 후에는 밀린 회사 일을 해치웠고, 예정되어 있었던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벌써, 3월이네요. 이번 주까지 또 몇 개의 일들을 해치워야 합니다. 아이고.
여행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겠다, 어쩔 수 없이. 저는 단체 행동을 싫어하는 만큼이나 어떤 주의나 사조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현 시점에 유행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주의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저는 제가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대개 유행에 휩쓸려 남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흉내내고 남들의 생각을 자기 생각이라고 철썩같이 믿어버리곤 하지요. 저는 제가 그럴 위험이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미니멀리즘을 밤거리를 홀로 돌아다니는 떠돌이 늑대개처럼 주의하고 있었습니다. 적게 갖고 단순하게 사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요. 하지만 뭐 그게 그렇게 목까지 맬 일인가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여행은 사람의 생활을, 더불어 마음을 단순하게 만드는 법이고(당연하지요. 먹고 놀고 돈 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으니까요), 저는 그간의 제 생활이 너무 복잡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잡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제가 항상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해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 마음의 조급증 때문입니다. 조급함은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불안해서 뭐든 빨리, 한 번에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금방 지칩니다.
그렇구나. 내 인생에 필요한 것은 미니멀리즘이구나, 라고 저는 미니멀리즘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이 지구의 대한민국 제주도 땅에서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나도 조용히, 남 모르게 미니멀리즘을 추구해도 괜찮겠지, 하고 쓸쓸히, 또 가뿐히 생각했습니다. 저의 미니멀리즘은 이렇습니다. 청소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니, 청소할 것이 없도록 물건을 줄이자.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하려다가 지쳐 나가 떨어지기 십상이니, 한 번에 딱 한 가지만 하자. 뭐든 다 잘하려 하지 말고,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 받을 수 있는 공만 받고, 칠 수 있는 공만 치자. 모든 사람을 내가 다 구제할 수 없으니, 나나 잘 살자. 그것이 제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안착한 미니멀리즘입니다.
아, 그리고 저는 이번 여행에서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나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나처럼 남들의 추함과 약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뭘 써도 되는 걸까? 그런 사람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달려들어도 되는 걸까?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해도 되는 걸까?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인정하는 척해도 되는 걸까? 나는 그저 평범한 아주머니고, 나 자신을 이 사회의 약자라고 믿지도 않고, 루저도 아닌 것 같고(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앞으로도 루저가 되고 싶지는 않고, 예외적으로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그런 사람이 인간에 대해, 인생에 대해 써도 되는 걸까?
그런 마음으로 저는 <나의 아저씨>라는 제가 너무 너무 사랑하는 드라마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저는 이 드라마를 보고 있어요. 어쩜 이렇게 잘 쓸 수가 있지? 어쩜 이렇게 잘 만들 수가 있지? 감탄하면서요. 이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아이유가 주인공 여자애의 연기를 하면서 그 애가 느끼는 감정 중에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착한 사람들 을 발로 차주고 싶은 감정도,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감정도, 바람을 피우는 여자의 감정도, 바람을 피운 아내를 받아주는 남편의 감정도, 나이 많은 유부남을 좋아하는 감정도, 나이 어린 여자애를 좋아하는 감정도, 위로 올라가고 싶은 감정도, 아래로 떨어질까 불안한 감정도, 누군가를 이유 없이 그냥 싫어하는 감정도, 나를 버린 남자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감정도, 매일 씻고 자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 하는 감정도 모두, 모두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내 안에 그 모든 것들이 있구나. 없는 것처럼 꾸며대도 다 있구나. 약자와 루저와 예외적으로 특별한 인간과 지겨우리만치 평범한 인간, 그 모든 것들이.
그리하여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자. 굳이 약자의 이야기를 할 필요도,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인간의 내면에는 모두 약자가 숨어 있으니까. 인간은 모두 약하고 또 특별하니까. 그저 평범한 인간의 평범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하면 된다. 무슨 주의고 사조고 유행이고 할 거 없이, 진실한 이야기를 하면 된다. 진실하고 성실하지 못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님, 이 책 읽어 보셨어요? 제가 오늘 소개할 책은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축복받은 집>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마지막 작품인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이야기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물론 쓰고 싶다고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줌파 라히리의 이야기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 작가는 쉽고 정확한 단어들로 아주 우아하게 중요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지요. 이 이야기는 젊고 가난한 인도 남자가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인도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대충 훑어 보면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싶기도 할 거예요. 말씀드렸다시피 한 인도 남자가 미국에서 끝내 자리를 잡았다, 는 일종의 자서전적인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좋은 이야기는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을수록 단맛이 나잖아요. 그러니 최대한 꼭꼭 씹어 먹어야 할 필요가 있지요.
1964년에 나는 무역사 자격증과 당시 환율로 10달러에 해당하는 돈만 들고 인도를 떠났다. 삼 주 동안 이탈리아 화물선인 SS로마호의 기관실 옆 선실에 자리를 잡고 항해했는데, 그사이 아라비아 해와 홍해, 지중해를 거쳐 마침내 영국에 도착했다. 나는 런던 북부의 핀스베리 파크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나처럼 돈 한 푼 없는 벵골 총각들이었는데, 적을 때는 열두어 명 있었고 더 많을 때도 있었다. 모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외국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발버둥 쳤다.
설님. 이런 도입부, 어떠신가요? 저는 구질구질하게 질질 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이 산뜻함이, 그저 ‘진술’에 가까운 이런 도입부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설님도 아마 아시겠지만 이야기는 시작부터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저도 첫 문장에, 첫 단락에 무척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물론 처음이 훌륭하다고 뒷부분까지 훌륭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럼에도 처음이 좋아야 읽을 마음이 드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퇴고 때 도입부를 다시 쓰는 일도 비일비재하지요. 초고는 무조건 저를 위해 쓰지만 퇴고는 독자를 위한 서비스, 라고 저는 생각하는 편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저 문장대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인도를 떠나 배를 타고 런던으로 갑니다. 그리고 미국의 한 대학 도서관에 일자리를 잡게 되지요. 그 와중에 그는 인도에 들러 가족이 정해준,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결혼을 해치우고 우선 먼저 미국으로 가서 하숙집을 구합니다. 그가 살게 된 집은 100살이 넘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하숙집입니다. 집주인 크로프트 부인은 정말로 늙었고, 깐깐하고, 지독히도 미국적인 사람입니다. 주인공이 미국행 비행기에서 내릴 때, 그러니까 미국 땅에 착륙할 때 미국의 우주 조종사들은 달에 착륙했습니다. 할머니는 주인공에게 달에 미국 국기가 꽂힌 걸 아느냐고 묻더니 마치 아이에게 그러는 것처럼 ‘굉장하다’고 말하라고 하지요. 그 이상한 의례는 그가 하숙집에서 묵는 동안 매일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의 삶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매일 저녁 도서관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몇 분 동안 크로프트 부인과 함께 피아노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일하는 곳에 대해 조금 얘기해주었고, 자물쇠를 잠갔다고 확신시켜주었으며, 달에 깃발이 꽂힌 것은 굉장하다고 말해주었다. 어떤 날은 그녀가 잠에 떨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곁에 앉아 있으면서 이 노인이 지구상에서 보낸 오랜 세월에 새삼 경외감을 느끼곤 했다. 때로는 그녀가 태어난 1866년의 세상을 그려보려 했다. 검은색 긴 치마를 입은 많은 여자들이 응접실에서 정숙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세상을 상상했다. 그러다가 무릎 위에 놓인, 관절이 부어오른 그녀의 포개진 손을 바라보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곱고 갸름한 손을 상상해보았다. 때로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그녀가 벤치에 꼿꼿이 앉아 있는지, 아니면 안전하게 침실로 들어갔는지 확인하곤 했다. 금요일이면 잊지 않고 방세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런 간단한 행위 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고, 방세 8달러 말고는 빚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후 그의 아내 말라가 인도에서 도착합니다. 아내라고는 하지만 결혼식 때 겨우 며칠 본 것이 전부, 그는 아내에 대해서 아는 게 없을뿐더러 얼굴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는 크로프트 부인의 하숙집을 나와서 아내와 함께 살 아파트를 구합니다. 인도 전통 의상을 곱게 차려 입고 도착한 아내와의 새로운 생활은 왠지 서먹하고 불편합니다. 그에게는 익숙해진 미국이라는 장소가 아내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것 투성이일 테지요. 어느 날 둘은 산책을 나갔다가 크로프트 부인의 하숙집에 들르게 됩니다. 그는 부인에게 아내를 소개하지요.
크로프트 부인은 말라를 더 잘 보기 위해 쿠션을 베고 있던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당신, 피아노 칠 줄 알아?”
“못 칩니다, 부인.” 말라가 대답했다.
“그럼 일어서!”
말라가 벌떡 일어나서 머리에 두른 사리를 매만지고 사리의 끝단을 가슴에 단정하게 붙였다. 그녀가 미국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나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문득 런던에 도착하고 처음 얼마 동안의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지하철을 타고 러셀 스퀘어까지 가는 법을 배우던 일, 처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탔던 일, “파이파”라고 외치는 남자의 말이 ‘페이퍼’를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일, 열차가 역을 출발하여 움직이기 시작할 때 승무원이 “틈을 조심하세요”라고 한 말의 뜻을 일 년이 지나도록 몰랐던 일 등이 뇌리를 스쳤다. 나와 마찬가지로 말라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왔다. 단지 내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이상한 일인 것 같지만 어느 날 그녀의 죽음이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더 이상해 보이지만 나의 죽음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걸 막연히 알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느낌을 어떤 식으로든 크로프트 부인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갓 스물이 되어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잠실역에서 지하철을 타려는데 아무리 표를 넣어도 개찰구가 열리지 않더군요. 멍하니 서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더니 초록색 화살표가 있는 개찰구만 열리는 것이었어요. 그때의 제게는 그런 일들이 웃어 넘길 만큼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울적하고 서글프고 피로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저는 여행을 온 것이 아니니까요. 이제 저는 혼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거니까요. 돌아갈 곳은 없으니까요.
흰 옷을 입고 나갔다가 돌아오면 회색이 되어 있던 것, 거리에 널려 있던 쓰레기들과 화난 표정의 사람들과, 거리에서 드잡이를 하던 사람들의 모습, 지하철의 문 쪽에 기대 서 있는 무표정한 얼굴들, 이 넓은 서울에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에 막막하던 매일. 그런 날들이 떠오릅니다. 조금씩 서울은 제게 익숙한 장소가 되었지만 혼자라는 사실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적응이 되지 않아서, 저는 결혼을 빨리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위에 옮겨 적은 문장들을 볼 때마다 저는 언제나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저는 왜 저 문장들이 제게 감동을 주는지를 이해해보려 애씁니다. 제가 보기에 저 단순한 문장들 안에는 의외로 복잡한 것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동시에 복잡한 것 같지만 의외로 깨끗하고 단순한 진실들이 담겨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주체할 수 없이 복잡하고 힘들어 보이면서도, 또 어느 순간에는 우스울 정도로 단순하고 가벼워 보이는 것처럼 말이에요.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낯선 사람과의 결혼을 야만적이라 쉽게 비판할 수 있지만, 낯선 이국 땅에서 타의에 의해 부부가 된 젊은 남녀는 서로를 연민하고 정을 느끼면서 점점 가족이 되어가지요. 이국 땅에 도착해 그곳에 적응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라 누구나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 서글픈 감정은 오직 그 일을 겪은 사람들만의 것으로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집니다. 인생은 모순투성이고, 그 모순들은 때로는 꽤 아름답습니다.
아들이 좌절할 때마다 나는 아들에게, 이 아버지가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네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고 말해준다. 그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겨우 몇 시간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거의 삼십 년을 지내왔다. 내가 이룬 것이 무척이나 평범하다는 것을 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 나 혼자뿐인 것도 아니고 내가 최초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모든 행로와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과 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들과 내가 잠을 잔 그 모든 방들을 떠올리며 새삼 얼떨떨한 기분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모든 게 평범해 보이긴 하지만, 나의 상상 이상의 것들로 여겨질 때가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설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저는 이 소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렇게 평범할 수가, 이렇게 단순할 수가, 이렇게 진실할 수가, 하고 저는 감탄하지요.
설님, 무언가를 흉내내는 것과,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드라마 <나의 아저씨> 이야기를 해볼게요. 이 드라마 속의 이야기는 아주 느리게 진행됩니다. 느리게, 천천히, 착실히 감정을 쌓아올려 가기 때문에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행동도 결국은 이해하게 되지요. 그래서 저는 결국 처음에는 거리감을 느꼈던 주인공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게 됩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줌파 라히리는 세부적인 이야기들에 공을 들입니다.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가는지를 촘촘하게 써내려 갑니다. 이것들은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보이지만, 그 문장들 덕분에 저는 그의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의 어려움을, 외로움을, 걱정과 고민과 두려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진짜가 되지요. 젊은 인도계 미국인 여자 작가가 나이든 인도 남자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인도 남자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거지요.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 말이에요.
설님. 제 책상에서 고개를 들어 베란다 밖으로는 숲이 한가득입니다. 숲 때문에 어둡지만 숲 때문에 이 집을 선택했어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저 숲을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지가 궁금했습니다. 겨우내 잎을 떨어뜨렸던 나무들에 작은 종기처럼 봉우리가 달린 모습이 보입니다. 곧 그 종기가 터지고 녹색의 잎이 돋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면 창 너머로는 온통 초록의 물결이 넘실거리겠지요.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좋습니다. 그리고 저는 단순하고 성실하게 또다시 제게 주어진 일년을 살아가기로 다짐합니다.
2022년 3월 4일
수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