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라 오드리 Oct 01. 2023

피리부는 여장부

살살 우리동네 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빠른 변화를 주도하는 뉴욕시가 수 세기가 지나도록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있다. 바로 쥐! 뉴욕 한복판에서 사람들 다리 사이로 지나다니는 쥐는 이미 익숙한 모습이라고 한다. 그 쥐가 귀엽고 깜찍한 만화 속 주인공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제법 덩치가 크고 색깔도 짙은 회색에 가까운 시궁쥐다. 어쨌든 뉴욕시장은 ‘쥐 박멸’을 핵심과제로 삼고 이를 해결할 고위 공무원을 공개 채용했다. 9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연봉 2억 원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경감 국장의 직함은 ‘랫 차르’인 청부 살서(殺鼠) 업자이다.


  그래서 반년 정도 활동한 그의 행적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뉴욕의 쥐는 감소추세일까? 다행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들어 쥐 관련 민원 접수 건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다섯 손가락 부회장님은 언제나 ‘엄마’들을 몰고 다닌다. 엄마들이 몰려있는 곳은 항상 그녀가 등장한다. 그녀가 먼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을 좋아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와 도와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엄마들이 모인 봉사단체 다섯 손가락은 초등학교 3학년과 1학년 학부모들이 삼삼오오 모여 구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등산을 가거나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 모여 간단하게 차를 마시고 서로 아이들의 학원 가는 시간을 도와주었다. 학원에서 학원으로 이동하는 아이들이 잠시 모여 쉬어갈 공간이나 놀이공간을 찾다가 직접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그 모임 안에 리더로 내가 선택된 것이다. 어쩌다 보니 굴러 들어간 돌이 되어버려 갈팡질팡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럴 때마다 어디든 불러 함께 차를 마시자고 하고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이 되어줄 기회에 나를 불러준 사람이 바로 부회장님이었다.      


  한번은 도서관 봉사자가 시어머니 상을 당해 장례식에 함께 가게 되었다. 선뜻 가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닌 사람들 모임에 불쑥 끼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늦은 저녁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여기저기서 모인 엄마들이 열 명이었다. 카니발 두 대에 나눠타고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더 놀라운 일은 도착해보니 이미 남편들이 모여있었다. 형님, 동생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가족처럼 아픔을 겪은 상주를 위로하는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엄마들과의 수다가 시간 낭비라는 어쭙잖은 생각에 학부모와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3학년 즈음 운영위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몇 안 되는 학부모들과 가깝게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들이 모이면 이런저런 말을 옮기고 도움 안 되는 이야기로 허송세월 보낸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혼자만의 허세에 갇힌 꼴이었다. 그날 저녁 정말 오랜만에 처음 만난 남편들과 아직 서먹한 엄마들이랑 술잔을 기울이며 즐겁게 지냈다. 첫날이라 그리 많지 않은 손님들로 허전했을 어머님이 가시는 길 섭섭지 않게 우린 웃고 떠들며 오랜 시간 마주했다.      


  엄마들은 먼저 나서지 않지만, 행사가 있을 때마다 소리 없이 나타났다가 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이 애쓴 것을 표 내지 않았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한데 모인 보이지 않은 손이었다.      

  그녀들 덕분에 많은 행사를 거뜬히 치렀다. 벼룩시장, 방학 특강, 추석 송편 나눔 행사까지 정말 어떻게 다 해냈나 싶을 정도다. 사실 행사를 기획하고 예산을 짜고 인원을 배분하는 일은 부회장님과 한두 명의 위원들이다. 고작 서넛이 이걸 어찌하나 걱정하면 또 아침 일찍 먼저 나와 세팅을 주도하는 어벤져스가 있다.    

  

  소소하게 작은 행사를 대행해주던 부회장님이 상가에 작은 공유공간을 만들었다. 그 공간을 청소하고 정리한다고 엄마들이 바쁘게 또 움직였다. 함께 참여하지 못한 엄마는 미안함을 전하고 행운을 빌어줬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바쁜 언니를 대신해 아이의 학원 가방을 챙겨 학원을 보내주고 누군가는 하원 하는 둘째를 받아줬다. 저녁이면 남편들이 돌아가며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공을 찼다. 공동육아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엄마들이었다.    

  

  과거 부모님 세대는 쥐약을 살포하거나, 쥐 꼬리를 학교에 가져가야 했다는데 뉴욕의 ‘쥐 차르’는 쥐 박멸을 위해 어떤 방법을 썼을까? 일단 먹이를 쉽게 찾을 수 없도록 했다. 식당 음식물 내놓는 시간을 오후 4시에서 8시로 바꾸는 등 쥐가 살기 힘든 상황을 만들었다. 점점 먹이를 찾기가 힘들어지면 서식지를 옮길 수도 있고 개체 수가 줄어들 수도 있는 긍정적인 결과를 예상한다.     

 

  기사를 읽으며 ‘피리 부는 사나이’가 떠오른 건 도시와 쥐라는 연계성 때문일 것이다. 엄마들을 몰고 다니는 언니를 보며 ‘피리 부는 사나이’가 떠오른 것도 같은 이유다. 언젠가 ‘나는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가’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만든 질문이었는데 오히려 되물어 당황했지만, 답을 떠올린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호감을 느끼는 대상은 예나 지금이나 ‘제 일에 열정을 지닌 사람’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까? 사람은 상대적이니 내가 원하는 모습을 지닌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엄마들은 왜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을까? ‘쥐 차르’처럼 엄마들의 호감을 얻고자 언니가 전략적으로 행동했을 리는 없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관계가 오래가지 않거나 오해를 사기가 쉽다. 이렇게 진심으로 남편까지 합세해서 모임을 하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 나이도 다양하다. 둘째나 셋째가 있다 보니 어린이집부터 중학교까지 성별도 나이도 다른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오빠, 형, 언니, 동생 하며 어울리고 있다. 얼핏 헤아려봐도 많게 모이면 서른, 한 두 집만 모인다 해도 다섯은 훌쩍 넘어버린다. 그러니 이들이 모였다 하면 안될 일이 없다. 더욱 특이한 점은 언니는 단지 안에 친정과 친언니가 살고 있다. 남의 손 빌릴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넓은 인맥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럼 언니한테 직접 어쩌다 이렇게 많은 엄마와 친하게 되었냐고 물어볼까? 사실 묻지 않아도 답은 하나다. 진솔함. 좋은 사람. 별 어려움 없이 가까이 지내고 친해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언니였다. 이물 없는 사람. 시집오고 나서 ‘이물 없다’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동네 가까운 이웃 한둘을 이야기하면 시어머니는 ‘이물 없는 사람이네’하시며 수긍하셨다. 언니는 꼭 그런 사람이다.      


  줌으로 오전에 수업을 듣고 있는데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문자로 남겨달라는 부탁을 하니 오늘 봉사하러 도서관에 오느냐고 묻는다. 일주일에 3일을 두 타임씩 도서관 봉사를 하는데 오늘도 그날이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럼 점심을 좀 먹어도 되냐고 묻는다. 아무래도 엄마들이 하나둘 모이고 아이들까지 합치면 그 많은 인원이 점심 먹기가 쉽지 않겠지. 당연히 된다고 했다. 사실 관리자도 아니지만, 그 정도 인심을 써야 봉사자들도 돕기에 나서지 않을 텐가. 점심을 먹는다고 했으니 이미 도서관 문은 열려있을 테고 서둘러 나가지 않아도 된다. 나도 늦은 점심을 대충 한 술 뜨고 짐을 챙겨 도서관에 나갔다. 문은 반쯤 열려있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멀리까지 들린다. 오늘 점심은 짜장면이었나보다. 고소한 냄새며 튀김 냄새가 진동한다. 다행히 센스있는 엄마들이라 환풍기, 선풍기까지 환기에 총동원했다. 


“안녕하세요?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에 마음도 두둥실 춤을 춘다. 오늘 마침 부회장님 공유공간 들어가는 날이라 점심을 먹었단다. 바쁜 나를 생각해 안 불렀을 언니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 한쪽에 고마운 마음이 더해진다.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은 봉사단체를 이끌며 고민이 많았다. 그때마다 먼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다독여주기도 하고 가끔은 섭섭한 소리도 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려 할 때 따끔하게 아니라고 선을 그어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가냘픈 몸매에 ‘피리 부는 사나이’란 별명을 붙일 수는 없지만, 외유내강형의 통솔력과 배포만은 사나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곧 있으면 마을 축제가 열린다. 이번에 우린 포토존을 직접 꾸미기로 했다. 아이들과 솜씨 좋은 그녀들이 함께 모여 어떤 작품을 만들지 기대가 된다. 말만 하면 뚝딱 요술처럼 만들어내는 재주꾼들. 축제가 끝나면 프리마켓과 영화 상영도 예정되어있다. 산다는 건 어쩌면 내 맘대로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크고 작은 행사를 할 수 있고 재미있는 일들을 꾸밀 수 있으니 마음먹기 나름 아닌가?      


  혼자서 잘 해내고 있다고 불도저처럼 앞서가던 이기적인 나를 뒷덜미 불쑥 잡고 우물에서 꺼내준 그녀들에게 한없이 감사하다. 개인적 자본에서 사회적 자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들 덕분이다. 사회적 자본으로 앞으로 더 즐겁고 살맛 나는 동네로 만들어보련다. 언니는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으려나? 내일은 공유공간에 꼭 한 번 놀러 가봐야겠다. 언니가 좋아하는 석류 에이드 하나 들고 가봐야지. 아니다 한 열 잔은 사야 할까?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 어디서 주워들었던 그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맴돈다. 



이전 03화 노년의 부부 모습은 담백하고 청초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