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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Oct 01. 2023

노년의 부부 모습은 담백하고 청초했다

우리동네이야기


매일 5시 반이면 일어나 운동을 나가는데 가끔 마주치는 부부가 있다. 손은 잡지 않았지만, 뒷모습이 다정해 보이는 부부는 함께 아파트 주변을 걷고 있었다. 코로나 시기에 가끔 마주쳤으니 제법 꾸준히 운동하시는 분들이다. 아침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일정하다. 여자 혼자, 남자 혼자. 부부는 흔치 않다. 그래서 부부가 걸으면 금세 눈에 띈다.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최근 만난 부부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내의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남편은 아내의 한쪽 팔을 꼭 잡고 한쪽으로 기대게 한 다음 얼마 걷다가 아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참 한 후 다시 걷고 또 얼마 걷지 않고 이야기하기를 반복했다.      


“여보, 여기가 우리 집 옆 동이야. 00 아파트 10동. 봐봐. 우리 집은 어디라고? 우리 집 주소 기억나?”

...     


  초점 없는 눈. 어설픈 발걸음.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 몇 달 전 봤던 고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만, 아내를 향한 다정한 남편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더 다정해보였다.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아내를 바라보는 눈길에 애정이 듬뿍 담겼다. 목소리는 다정하고 표정은 개구졌다. 이 상황이 이상하게 행복해보였다. 초가을 쌀쌀한 새벽 공기 대신 그 둘을 둘러싼 온기가 오직 두 사람만의 공간을 감싸 안고 있었다.




“아내일까? 엄마일까?

여보 아래층 왜 있잖아. 몸 불편한 할머니 모시고 운동가는 아저씨. 내가 보기에는 엄마같은데 아닌가?”    

 

몇 해 전 남편과 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척 궁금했다. 아침, 저녁으로 매일매일 운동을 나가시는데 여자의 몸이 무척 불편해 보였다. 지팡이가 있지만 한 걸음 옮기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남자는 그 한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따라갈 뿐이었다. 남자와 달리 여자는 체구가 작고 말라서 남자 옆에 서면 정말 한 줌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남자의 머리는 까맣고 여자의 머리는 백발이었다. 그 둘의 루틴은 지난 5년간 한결같았다. 2층에 살면서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했고 한참이 걸려서야 현관을 나설 수 있었다. 한 발을 옮기기가 지구를 들어옮기는 것만큼 힘에 겨워보였다. 아무래도 오른쪽이 마비되었는지 오른팔은 가슴아래 딱붙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놀랍게도 지팡이가 없이도 거동이 가능할 만큼 건강해지셨다. 이 둘의 관계는 부부였다. 부부.     


  세상 무뚝뚝했을지 모를 남편은 하나에서 열까지 아내의 모습을 살폈다. 모자가 살짝 삐뚤어졌을 때 다시 모양을 맞춰 고쳐 씌워주고 현관을 나서자마자 불어닥친 바람에 점퍼의 옷깃을 세워줬다. 계단 오르기가 힘든 아내를 위해 조금 멀리 돌아 함께 걸어 올라가고 운동화 끈도 직접 묶어주었다. 젊은 연인의 모습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노년의 부부 모습은 담백하고 청초했다. 그렇다고 손을 꼭 잡거나 어깨를 부축하는 다정함은 없었다. 가끔 남편과 산책하러 나갈 때면 손을 잡고 싶어 어색한 자세로 손을 잡지만 얼마 가지 않아 손은 풀어지고 만다. 오래 산 부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꼭 손을 잡는 것만은 아니라는 건 10년 남짓 살아보니 알 것 같다. 어쩌면 살을 맞대고 산 진짜 부부의 모습이 아닐까?      



  아파트에서 마주치는 남자와 여자를 보면 퍼즐 맞추듯 누구의 남편이며 아내일지 궁금함이 생긴다. 부부가 오래 살면 닮는다는데 가끔은 예상치 못한 분들이 짝일 때도 있다. 어쨌든 두 분이 부부라는 사실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딸이 집에 들러 문을 열고 들어가며 반갑게 엄마, 아빠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다. 그날 궁금증이 해결됨과 동시에 놀라움이란 마치 방 탈출의 모든 열쇠를 풀었을 때의 희열감 같았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내가 과한 오지랖에 사로잡힌 입주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나도 내가 이렇게 주변인에게 관심이 많았나 하는 의구심도 들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이곳을 사랑하고 정이 들었는지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다.    

 

  오래된 아파트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오래된 화단, 오래된 보도블록, 오래된 엘리베이터, 오래된 창문, 오래된 지하실, 오래된 입구, 오래된 쓰레기통 하물며 오래된 상가 그리고 오래된 수목, 오래된 길목, 오래된 사람들, 정든 사람들, 정든 이웃, 그 세월만큼 꿈과 희망이 아로새겨진 길.      


여름이 지나 가을을 향한 길목의 새벽은 해도 늦잠을 자기 시작한다. 아직 어둑어둑한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 익숙한 모습들이 눈에 든다. 거동이 불편해진 아주머니는 아침 산책을 그만두셨나 보다. 어두우면 다치기 쉬우니 아무래도 낮 시간을 선택하셨겠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대충 집안일을 해놓기 바쁘게 나도 정신없이 집을 나섰다. 차에 시동을 켜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데 바쁜 와중에도 반가운 뒷모습에 속도를 줄인다. 여전히 남편은 무언가를 아내에게 계속 설명했고 아내의 표정은 아리송한 모양이었다. 그다지 좋아진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반가웠다. 달라진 현실이 받아들이기 힘들고 인정할 수 없겠지만 남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어쩌면 오늘이 두 사람에게는 남은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날일지도 모르겠다. 후사경에 비친 두 분을 보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행운을 빌어본다.     


  아침 운동을 하러 나가기는 정말 쉽지 않다. 일단 알람이 울리면 생각을 접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옷을 갈아입는다. 이렇게 하면 반은 성공이다. 다시 옷을 갈아입기 싫어서라도 운동을 나가게 된다. 문밖을 나가 찬 공기를 마시면 오늘 하루도 성공이란 강한 확신이 든다. 하지만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평일 새벽에는 헬스장에서 근력운동을 하고 주말 새벽에는 산에 가는데 두세 가지 정도의 근력운동이 끝날 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와 열두 번도 운동화를 고쳐 신는다. 오늘 아침은 비가 내려서 유난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데 입구에서 지팡이를 짚고 아주 자연스럽게 걸어 내려오시는 2층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직 7시도 안 된 시각인데 어딜 가시는지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빗길이니 조심하시라는 인사를 건네고 문을 들어서니 짝꿍 아저씨가 한 손에 북엇국으로 보이는 통을 들고 가볍게 나오셨다. 아마 근처 딸네 집에 가시나 보다. 이제 아주머니는 아저씨 도움 없이도 차를 타는 데 어려움이 없으셨다. 다행이다. 정말이지 다행이다.     


 두 부부는 어쩌면 비슷한 병에 걸린 아내를 보살피고 있는 것 같다. 그 모습이 달랐지만 아내를 사랑한다는 건 누가 봐도 금세 알 수 있었다. 상대를 향한 배려와 인내 그리고 보폭을 맞춘 발걸음. 나에게도 저런 시련이 오면 유쾌하게 넘길 수 있을까?       


 몇 층 되지도 않는 집에 올라오며 생각이 많아진다. 네모난 사각형 안에 저마다 꿈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늘 행운이 따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큰 굴곡없이 버틸 수 있는 만큼만 와주기를. 무엇보다 오래오래 서로 마주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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