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살 우리 동네 이야기
“어르신, 어디 가셨었어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봄 직한 어른이셨다. 볼 때마다 나도 어르신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매번 했다. 백발이 성성하고 마른 체형에 허리가 살짝 굽어질 듯하지만 젊었을 때는 한 인물 하셨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근사한 어르신이다. 무엇보다 환한 얼굴이 너무 멋져 보였다. 하지만 단지 ‘어르신’이라는 호칭에는 부족함이 있다. ‘어른’이라 하면 어느 정도 삶의 지혜가 있고 몸에 밴 예의와 말에서 전해지는 교양이 담긴 사람이라 여겨지는데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나이 든 사람이 ‘어르신’이라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었다. 어른도 어르신도 부족함이 있는 할아버지는 다른 분이셨다. (결국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쓰고야 마는 내 얕은 지식이 밉다.)
자주 등장하시는 곳은 아파트 건널목 앞이다. 뒷짐을 지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를 발견하면 빙그레 웃으시며 인사를 건넨다.
“날 뜨거운데 아침부터 어디가?”
그 인사가 살갑다. 키가 워낙 크셔서 어디서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같은 라인에 살지 않지만 자주 마주치다 보니 안 보이면 안부가 궁금해진다. 아파트 관리인도, 경비실 아저씨도, 어딘가에 소속되어있는 분도 아닌데 늘 아파트를 관리하는 아저씨들과 함께 여기저기 손보느라 바쁘시다.
흐려진 주차장 선 다시 그리기, 보도블록에 높은 턱 정비하기, 건널목 그려주기, 화단 정비하기 등 어르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2,600세대가 사는 대단지 곳곳을 다니시며 이곳저곳을 관리실 분들과 함께 정비하고 다니신다. 그뿐만이 아니다. 복날이면 고생한다고 관리실 직원분들 밥을 사주시고, 가끔 청소하시는 분들에게 차가운 음료수며 따뜻한 커피도 타다가 나눠드리며 담소를 나누신다. 이쯤 되면 동네 반장인가 싶겠지만 어떤 감투도 쓰지 않는 순수한 봉사자다.
그런 어르신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라 터줏대감이 많이 산다. 겨울이 시작되면 건강히 지내시다 이른 봄에 뵙자는 인사를 나누고 겨우내 12층 할아버지, 1층 할머니가 건강하시기를 간절히 빈다. 그런데 추운 겨울도 아닌 한 여름 내내 어르신을 만날 수가 없었다.
“어르신 왜 안 보이셨어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반가움에 목소리가 높아진다. 한걸음에 달려가 손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조금 야윈 듯 보이지만 건강에 큰 무리는 없어 보여 한 편으로는 마음이 놓인다.
“아이고 우울증이 오나 봐, 사람 사는 거 한순간이야.”
같이 살던 동생을 얼마 전에 먼저 보내고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들어 나오지 못하셨단다. 금세라도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은 동생이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불도 못 켜고 짐 정리도 못 하셨다는 말씀에 목이 멘다. 그래서 여위셨구나. 안 그래도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는데 덥다는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셨을 어르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사는 거 별거 없다. 돈은 다른 사람 조금 도울 수 있을 정도면 되고 마음이 편안해야 해. 너무 욕심부릴 거 없어. 이제 움직여보려고. 여기 방지턱이 너무 높아서 좀 다듬어야겠어. 어여 가던 길 가. 찬 바람 불면 커피 마시자고”
세상 다 산 것처럼 말씀하시는 어르신이 금세라도 사라질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났다.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 테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이 자꾸 멈춰진다. 얼른 한 번 더 돌아보고 싶지만 그럼 숨긴 눈물을 들킬까 봐 한참을 걸어 간신히 돌아봤다.
마지막은 아닐 테지…. 자꾸 마음이 쓰이는 건 보기 드문 어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방지턱을 다듬는다고 하셨는데…. 바람은 차지만 아직 볕은 뜨거워 낮에는 더우실 텐데. 한낮에 나와계시면 차갑게 얼린 사과즙이라도 들고 나가봐야겠다. 환하게 웃는 어르신을 더 자주 뵙고 싶다.
“어르신 누가 보면 아파트 관리 직원인 줄 알겠어요.”
“허허허 몰랐어? 내 사무실은 1003동 801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