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살 우리 동네 이야기
“앗! 뜨거. 아니 이보게 좀 살살 불어서 주지. 후 후 달다 달아~”
“군밤 뜨거운 거 처음 알았수?”
남편이 군밤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자주 준비해요.
“여보, 나 언제까지 새우 잡아야 해?”
“새우 등 펴질 때까지!”
“그때까지 나 군밤 구워줄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얼마나 더 같이 살려고?”
“부부가 백년해로하는 게 얼마나 큰 복인데 허허허 사람 참.”
추석 특집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었다.
한강에서 평생 새우를 잡는 남편을 따라나선 아내는 배 한쪽 구석에서 밤을 굽는다. 노릇하게 잘 구워진 밤을 깨끗하게 까서 엎드려 재잘대는 남편 입에 넣어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지만 배 안은 환하고 따스하다. 남편은 그 밤 한 알에 행복해하며 밤새 새우를 잡는다. 많으면 많은 데로 적으면 적은 대로 그렇게 욕심내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바닷바람에 까맣게 그을린 부부의 얼굴이 정겹다.
보는 내내 씁쓸했다.
요즘 내 마음은 바다의 밤보다 더 어둡고 춥다. 아닌 척 못 본 척 외면하지만 내 속이 아픈지라 그러기가 쉽지 않다. 부부가 백년해로하려면 전생에 얼마나 많은 복을 지어야 할까?
15층에 사는 어르신은 아침마다 중절모에 지팡이를 짚고 산책을 하셨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정해진 시간에 들어가셨는데 마주칠 때마다 인사드리면 정말 신사처럼 받아주셨다. 가끔 어르신보다 멀찍이 뒤에서 따라오는 할머니는 행색이 너무 초라했다. 푸석거리는 머리카락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밋밋한 얼굴 그리고 작고 여윈 몸은 두 분이 부부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어울리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 좋으련만 두 분 사이에 살가움이란 없는 듯 보였다. 그냥 남편이고 아내이지 않을까?
매일 보이던 어르신이 이틀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그러다 한 달, 두 달이 되더니 어느 겨울을 미처 다 보내지 못하셨다. 그렇게 남편을 보낸 할머니는 더 초라해지셨다. 예상 밖이었다. 부부 속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겉으로는 차가워 보였는데 금실이 엄청 좋으셨나 보다. 할머니는 어느덧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가끔 나오셨고 시간의 속도보다 더 빨리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새기셨다. 한쪽이 먼저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실감을 주는지 할머니를 보며 알게 되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옷을 우아하게 차려입어 한껏 멋을 낸 10층 할머니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오늘은 노래 교실에 가신다며 잔뜩 들떠 보였다. 고우셨다. 얼굴도 옷도 제법 긴 시간 공을 들여 꾸미신 듯했다. 먼저 간다며 내리신 발걸음이 경쾌했다. 긴 시간 할아버지와 함께 다니실 때 보았던 미소가 아니었다. 오랜 투병 후에 가신 할아버지는 할머니 마음에 짐이 되지는 않아 보였다. 나이가 들면 얼굴 살이 효자라는데 제법 살집이 있어 훨씬 좋아 보이셨다.
할머니는 내가 여기 이 집에 이사 왔을 때부터 새댁이라 부르며 이뻐하셨다. 첫 아이를 가져 배가 남산만 했을 때는 내 배를 쓰다듬으며 날마다 이쁘다 하셨고 아이를 안고 만나면 그 따스한 손으로 건강하게 자라라며 덕담을 아낌없이 나눠주셨다. 낯가림이 심해 뒤로 숨어버리는 아이를 센스있게 못 본 척하시며 그냥 내리실 때도 한없이 고마웠다. 두 아이가 어느덧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잘 자란 아이들을 보며 탄식을 금치 못하셨고 내가 힘들다고 투정하면 지금이 제일 좋은 때라며 나를 위로하셨다.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은 따로 있다. 그런 이웃은 아파트 안 보다 밖에서 만났을 때 더 반갑다. 우연히 지인과 근처 카페에 들렀는데 10층 할머니가 근사한 신사분과 마주 앉아 계셨다. 노래 교실에 가실 때보다 더 고왔다. 애써 못 본 척 외면하며 속으로 우리 어머니가 아깝다 생각했다. 그 어른보다 어머니가 더 멋져 보였다. 두 분은 쿠키 몇 조각과 차를 드시며 조용조용 담소를 나누셨다. 나를 알아보신 걸까?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벌써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 모습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 들키신 게 부끄러우셨을까? 그 뒤로 가끔 마주쳐도 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냥 건강하신지 더운 여름을 어찌 보내셨는지 짧게 안부만 나누고 해어졌다.
한번은 아들 내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가 너무 반가웠다. 나는 이미 같은 라인에 사는 할머니는 다 어머니라 부르고 다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반갑게 어머니라고 부르며 얼마 만에 뵙는 거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니도 환하게 웃으시며 내 손을 잡아주셨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내 삶도 더 분주해졌다.
몇 호 할머니는 여전히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겠지. 아래층에 요즘 인사 안 받는 할아버지가 안 보이던데 요양원을 가셨을까? 궁금해하며 봄, 여름을 보냈다.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오래된 나무가 노랗게 물들어갈 즈음 은행 냄새가 진동했고 아이들은 제발 은행나무를 잘랐으면 좋겠다며 투덜댔다. 한때는 은행도 줍고 은행잎도 빈 양파 자루에 넣어 곳곳에 숨겨뒀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른들이 양파 자루를 분주히 나르더니 어느덧 다가온 추석은 아파트 라인 전체에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오래된 아파트는 유독 겨울이 추웠다.
언젠가 둘째를 낳고 집에 왔더니 세탁기가 얼어있었다. 처음에는 A/S를 불렀지만 이제 세탁기 녹이는 거야 식은 죽 먹기다. 그래도 귀찮은 일이니, 겨울이 되기 전에 세탁기 뒤에 넉넉하게 보온장치를 했다. 아이들 방학이 다가오면 나도 마음이 좀 여유로웠다. 방학 동안 먹을 가래떡도 좀 해놓고 고구마도 들여놓으면 간식 걱정도 크게 되지 않았다. 올겨울에는 눈 좀 많이 내려서 눈썰매 좀 실컷 탔으면 하는 바람은 언제나 빗나갔다. 오가며 어르신들이 올겨울을 잘 지내시길 걸음마다 기도했고 그렇게 맞이한 봄은 언제나 반가웠다. 언제고 날이 풀려 거동하시려나 궁금해하며 또 부지런히 새해를 맞이했다.
10층 어머니를 우연히 마주쳤다.
홈드레스를 입고 분주히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셨나 보다. 집에서 막 나오셔서 그런지 머리 만질 새도 없으셨는지 어딘지 모르게 부스스해 보였다. 날 보고 반가운 인사도 못 해주시고 그저 총총 사라지셨다. 반가움도 잠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잘 지내시겠지, 안심하고 지나쳤다.
같은 라인에 사다리차가 오면 궁금하다.
누가 나가는지 들어오는지 13년을 살았으니 알 만큼 아는 이웃이고 얼굴 마주하며 인사 나눈 세월이 얼마냐며 그냥 가면 섭섭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오전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사다리차가 놓인 걸 봤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아주머니께 인사드리며 누가 이사 오나 봐야 하고 물었다.
“응 저기 10층 할머니. 그 집에 들어온대.”
“네? 10층이요?”
“몰랐어? 거기 할머니 돌아가셨잖아. 얼마 전에.”
아뿔싸 이런 비보가 있을까?
나는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말문이 막혔다.
내려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셨구나. 그게 마지막이었어. 후회가 밀려왔다. 예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도 못 했는데, 우리 아이들 덕담 많이 해주셔서 잘 컸다고 못 전했는데, 그냥 든든하게 의지하고 있었다고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가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인생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마주 앉아있던 신사분은 어떻게 정리하셨을까? 할아버지 가시고 즐겁게 누리신 세월이 얼마 되지도 않은데 그렇게 허무하게 가셨을까? 그때 그날 분주하게 집안 정리를 하셨던 거구나. 아셨으면 아셨으면 마지막일지 모를 인사라도 해주시지….
나는 부모님도 있고 자식도 있고 남편도 있다.
그런데 가끔 누군가와의 이별은 그들보다도 더 슬프다. 10층 어머니가 그랬다. 가신지 1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콧날이 시큰해지는 걸 보면 내가 정말 많이 의지했나 보다. 마냥 이쁘다 하셨다. 아무 이유 없이. 그 시절 주말부부였던 나는 많이 외롭고 힘들었다. 그땐 몰랐는데 가끔 만나 전해주시는 덕담이 내겐 삶의 비타민이었나보다.
사막 같은 내 마음에 가끔 내려주시는 단비처럼 달콤했다. 두툼한 손길이 따스한 눈빛.
친정엄마가 가신 것처럼 엉엉 울었다. 그냥 예쁘다 예쁘다 하시며 반겨주셨던 고운 얼굴이 다시 보고 싶다.
아이고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