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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Oct 22. 2023

골목을 부르다.

살살 우리 동네 이야기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 제법 마당이 넓은 넉넉한 집에서는 해 질 녘 달에 한 번, 또는 보름에 한 번 반상회가 열렸다. 반상회 하는 날이면 어느 집에서 부침개, 누구는 과일, 누구는 막걸리를 손에 들고 한둘 한 집으로 모였다. 엄마도 그날만큼은 저녁상을 일찍 봐놓고 반상회에 가셨는데 회의 시간보다 집 앞 가로등 아래에서 수다 떠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때 나와 상관없지만 반상회에 다녀오시면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는 일도 있었고 새로운 주제도 많이 등장해 나름 재미있었다. 반상회 덕분에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온 엄마는 그렇게 외롭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주택에서 아파트로 변화하며 반상회도 사라지고 동네 이야기나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우리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까막눈인데 그나마 가까운 도서관과 주민센터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다.      


그 옛날 골목이 있었다면 이제는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있다. 가끔 우리 라인에 사시는 할머니가 다른 라인에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왜 열리지 않는지 아리송해하시는 모습을 본다. 그럼 무안해하지 않으시도록 애쓰며 조심스레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는 살짝 1층에 쓰인 라인 번호를 가리키면 부끄러워하시며 얼른 내려오신다. 5층에 사는 나는 안부를 나누기에 너무 시간이 짧다. 그래서 정말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진심을 담아 안부를 전한다. 내리면서 아쉬움에 인사도 못 나누는건 나도 상대도 같으리라.     


한 가지 신기한 건 나는 5층에 살기 때문에 6층까지는 어떤 분들이 사는지 외우지만, 그 이상은 외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나보다 위층에 사는 분들이 손수 버튼을 눌러 주시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나는 모르는데 말이다.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우리 집은 학교 바로 밑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못 했다. 1등은 항상 멀리서 한참을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다시 걸어야 학교에 올 수 있는 친구들 몫이었다.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그 친구들은 정말 잘 달렸다. 한 번은 친구 집에 놀러 간다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출발했는데 친구 집에 도착하니 벌써 어둑해져 정말 친구 집만 보고 다시 나와 우리집으로 돌아온 기억도 있다. 친구 집에서 내려다 본 전망은 근사했다. 제일 꼭대기에 있던 친구집은 버스도 끝까지 가지 않아 한참을 걸어서 도착할 수 있었다. 어스름 저녁에 집마다 밥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굽이진 산새는 어린 시절 내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친구는 소방관이 되어 아주 잘살고 있다. 물론 그녀도 달리기를 잘했다.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초등학교 다니는 우리 둘째도 달리기를 잘한다. 신기하다. 알고 보니 친구들과 동 사이를 다니며 술래잡기를 그렇게 하고 놀더라. 우리 아파트는 6동 옆에 7동이 없다. 순서대로 동이 나열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원하는 아파트를 찾지 못해 헤매고는 한다. 아파트에 총 3곳의 놀이터를 종일 돌면서 뛰어다녔다. 32동에 사는 친구를 데려다주고 다시 26동에 사는 친구도 데려다주고 본인은 마지막에 집에 온단다. 물론 헤어지기 싫어서겠지만 집에 돌아오는 코스를 좀 잘 짜서 일찍 왔으면 좋겠다.     

어렸을 때 골목에서 마주치는 어른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면 지금 아이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어른에게 인사를 한다. 마을의 좁디좁은 골목 사이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이제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배운다. 웃어른에게 먼저 타기를 양보하고 혹시라도 문이 닫힐 때 뒤늦게 들어온 다른 사람을 기다려준다. 아래층 젊은 아빠는 한 층을 섰다가 올라가면 시간 걸린다고 일부러 5층에서 내려서 한 층을 걸어 내려간다. 그뿐만 아니다. 레이디 퍼스트를 실천하는 한국 남자를 만나면 가끔 너무 당황하게 된다. 우리 라인에는 그런 분들이 많지는 않다. 다행이다.     


아파트 게시판의 광고를 보면 제철 과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가까운 곳에서 요즘은 양파즙을 광고하는 게시물이 한참 동안 올라왔다. 철마다 사과, 배, 각종 과일을 판매하는 광고가 게시된다. 아파트 주변에 새로 문을 연 식당 광고는 유심히 보면 쿠폰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터줏대감은 따로 있다.  

    

운좋게도 아파트 옆에 전통시장이 큰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 전통시장 골목마다 유명한 가게가 하나씩 있는데 내가 주로 이용하는 가게는 두부 가게다. 직접 두부를 만들어 파는데 나는 운 좋게도 꼭 하나 남은 두부를 사는 행운이 따른다. 이 집 두부는 정말 크고 두툼하다. 그리고 제법 두부가 단단해서 부치기도 좋고 찌개에 넣어 끓이기도 좋다. 요즘 마트에서 파는 두부는 금세 으깨져서 사실 식감이 썩 좋지 않다. 단단한 두부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가격도 적당해서 살림에 큰 도움이 된다. 두부 가게에서는 도토리묵이랑 청포묵도 판다. 떫지 않은 묵사발 한 그릇은 주말 우리 가족의 별미이다.      


앞 골목의 대장은 채소 가게다. 툴툴거리기 좋아하는 채소 가게 사장님의 대표 종목은 콩나물이랑 숙주. 유독 통통하고 길이가 짧은 콩나물과 숙주는 늘 싱싱하고 맛이 좋다. 게다가 오래 보관해도 쉽게 상하지 않는다. 예전에 엄마 심부름으로 사 오는 콩나물은 오백 원어치도 많았는데 이제 최소 가격은 이천 원이다. 제법 많은 양의 콩나물은 꼭 두 번 나눠 채소 보관용 지퍼백에 넣어둔다. 그럼 언제든 요긴하게 쓸 수 있다. 

    

골목에서 나와서 얼마 걷지 않으면 떡집이 있다. 3대째 이어져 오는 이 떡집은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며느리에서 딸로 이어져 내려온다. 아직도 시어머니가 계시는데 깐깐하고 날카롭다. 성격만 봐도 얼마나 꼼꼼하게 떡집을 운영해오셨을지 눈에 보인다. 이 집은 수수팥떡을 잘한다. 제사용으로 쓰이는 팥떡은 달지 않고 적당히 쫄깃해서 친정아버지가 오시면 사뒀다가 가시는 길에 꼭 손에 들려드린다. 11시 반이면 떡이 모두 팔려서 서두르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다. 아직도 가래떡은 꼭 여기서 산다.    

  

비 오는 날이면 꼭 생각나는 순댓국밥집도 있다. 순댓국은 남편이랑 결혼 후 먹게 되었는데 피순대는 거의 못 먹고 그나마 잡채 정도는 가능하다. 우연히 알게 된 이 집은 냄새가 안 나고 맛이 깔끔해서 남편이랑 자주 들른다. 부부가 다정하게 운영하는데 양파껍질로 끓인 물이 달짝지근하니 맛있다. 밑반찬이며 밥도 넉넉하게 주셔서 보양식처럼 먹는다. 최근 요리를 담당하신 사장님이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문을 닫았는데 하루빨리 완쾌하셔서 맛있는 순댓국을 다시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 아파트 골목시장에 최근 멋진 과일가게가 생겼다. 제법 젊어보이는 여자 둘이 가게를 운영하는데 실내에 아무것도 없이 냉장고만 있다. 과일 종류도 다양하다. 올여름 두리안을 팔아서 깜짝 놀랐다. 엄청 큰 두리안을 속만 잘 다듬어서 소분해서 팔았다. 뿐만아니라 직접 농장과 계약을 맺어 저렴한 가격에 싱싱한 과일을 판매하고 있다. 덕분에 제철 과일을 좋은 가격에 맛볼 수 있다. 과일이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최근 지점을 하나 더 냈다. 이 정도면 성공이다.     


처음에는 골목골목 다니며 맛집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시장이 축소되어 문을 닫은 곳들이 많아졌다. 자주 가던 세탁소 사장님은 어떻게 지내실까? 여름이면 옥수수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옥수수 껍질을 까던 진풍경을 이제는 볼 수가 없다. 일년내내 늘 한결같은 옥수수를 먹을 수 있었는데. 가마솥을 걸어놓고 쉴새없이 옥수수를 쪄내던 사장님은 어디서 무얼 찌고 있을까?그 앞을 지나가면 지금도 옥수수 찌는 달큰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옛 골목 살리기로 벽화 그리기가 한동안 유행했었다. 통영, 부산, 천안, 지역을 갈 때마다 벽화마을 하나 정도는 있었다. 이곳도 학교와 아파트를 둘러싼 벽에 벽화 그리기 사업을 지원받았다.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학교 담과 아파트를 잇는 담을 알록달록 색칠해 특색있는 벽화가 나올 것을 무척 기대했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그림은 예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달리 보였나 보다. 마을 축제에 우리 동네 그리기를 했는데 아이들 그림에 벽화가 제법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예쁘게 다시 그려진 벽화를 보고 다시 벽화를 보니 내 눈에도 예뻐 보였다.     


이제 골목은 옛날의 골목처럼 굽이굽이 미로처럼 얽혀있지 않다. 

하지만 아직도 그 골목에는 저마다의 추억이 담겨있다. 

물론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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